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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생활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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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생활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1. 본래 ‘종교’(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레리지오’(religio)로써 ‘재결합’이라는 뜻입니다. 즉, 죄를 지은 인간이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어원은 ‘Relay’(릴레이), ‘전달하다’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뜻을 하나님께 전한다는 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원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것입니다. 범죄하여 쫓겨나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두고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음으로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믿음으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참조 : 요 17:21,14:10,14:2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 다시 말해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대신하여 십자가에 그 몸이 찢기시고 피 흘리신 것을 믿는 자’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도 그 믿는 자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예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거하시어 하나가 되신 것처럼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거하시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재결합’(religion)되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재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에덴 동산을 회복하여 사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과 하나되어 행복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 믿는 성도를 두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사장’의 첫째 사명은 하나님께 예배(제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적 예배”란 말씀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생령,生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창2:7)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아니 하느냐는 그 사람이 생령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대한 것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이 함께 하여 생령,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믿지 아니하면 단지 흙으로 지어진 육체의 호흡만을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를 두고 이사야2:2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예수 믿음으로 생령이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살려주는 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사람의 코에 불어넣은 ‘생기’(生氣)는 ‘영혼’(잠 20:27), ‘호흡’(사 2:22), ‘기운’(욥 33:4) 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잠언20:27입니다. 

(잠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그 영혼이 생령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해 인간은 그 영혼이 생령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며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33:4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인간의 생명이란 인간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의 숨결이 주어져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그 존재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사2:22) 하나님 자신의 ‘숨’을 불어 넣으니 인간의 몸이 ‘생령’(生靈),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聖殿)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6:19입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영성’, 靈性, spirituality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영성’은 라틴어로 ‘숨 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운’, ‘숨’을 불어넣으시니 영적인 존재, 영적 숨을 쉬는 생명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기운’, ‘영’(靈)을 거두시고 ‘숨’만 쉬게 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숨을 거두었다.’고 하면 곧 ‘죽었다’는 뜻입니다. 시편104:29,146:4을 보겠습니다.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숨’을 불어넣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숨’을 거두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숨은 내가 쉬고 싶어 쉬는 것이 아닙니다. 숨은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아담의 콧속에 들어갔던 숨은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아담’(사람)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만약 숨을 인간의 주도하에 쉬는 거라면 백 년이고 2백 년이고 인간은 숨을 멈추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의 숨을 쉬고 있습니다. 사람의 숨, 동물의 숨, 나무와 풀들의 숨으로 이들 생명의 중심에는 하나의 숨이 있을 뿐입니다. 숨을 쉬는 존재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17:25입니다.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마땅히 그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구약시대 하나님 말씀을 버린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어넣으셨던 영, 성령을 거두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 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숨을 쉬며 살아있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었습니다. 

(삼상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래서 성령이 떠난 사울은 육체적인 숨만 쉬는 존재에 불과하고 영성을 잃어버린 사람, 영적으로 죽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삼상 16:14) 성도 여러분의 호흡이 영성(靈性)이 있는 호흡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시므로 영성있는 성도, 영원한 생명의 호흡이 있는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 사건은 ‘예배’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아말렉이 공격했습니다. 그것도 광야 여정의 아주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비겁하게도 뒤에 처진 약한 사람들을 공격하여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출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말렉을 도말하기 위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누구를 막론하고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말렉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아니하고 생포했고, 가축들까지도 진멸하라고 하신 말씀을 어기고 가장 좋은 가축들을 살려서 남겨두었습니다.(삼상 15:7-18) 이를 모르실 리 없으신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을 추궁하자 비굴하게도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남겨두었다고 변명합니다.

(삼상15: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 후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었습니다. 

(삼상 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그 후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28:5-8)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고 인도하심을 원했지만 그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존재여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박수무당을 찾아갔지만 귀신에 홀려 전쟁터에 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 역시 인간인지라 사울처럼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처럼 자신의 죄를 비겁하게 변명하지않고 죄를 깨닫는 즉시 눈물로 통회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 호흡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죄를 범하고 그 죄악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 마저 전쟁터에 내보내 죽도록 간계(奸計)를 행한 죄악을 선지자로부터 지적받았을 때 그는 즉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편51:9-11을 보겠습니다.

(시51:9-11)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후 다윗은 성령이 항상 함께 하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전쟁이든 항상 이기며 점점 강성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과 교제,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성있는 삶으로 다윗처럼 형통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이제 너 자신을 구약의 제물처럼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뜻입니다. 제물은 동물인 경우 머리를 베어 죽이고,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인 경우에는 머리를 비틀어 끊으라고 했습니다(레1:12,15). 목을 베고 비틀라는 것은 철저히 죽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물을 당사자가 직접 죽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직접 제물을 완전히 죽여 각을 떠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에 태워 제사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철저히 죽이라, 다시 말해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죽이는 삶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며 자신을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죽기까지 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실 때부터 자기를 부정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낮추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할 수 있으면 그 쓴잔을 피하고자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내 자기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0: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자기 부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생각과 판단이 아무리 옳게 보일지라도 단호하게 포기하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자기 부정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할 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할 때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할 때 타인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할 때 어떠한 이웃이라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자신을 가장 낮추고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자기 부정에서 나오는 섬기는 생활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입니다. 때로는 영적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섬길 때 무시당하고 멸시받아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묵묵히 십자가 지시고 홀로 골고다로 향하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중심으로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철저히 자기를 부정해야만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 섬기느라 받았던 많은 상처와 아픔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상처와 아픔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철저히 부정하는 영적 예배의 생활로 항상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만 합니다. 제물의 종류나  값에 상관없이 모든 제물은 깨끗해야만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물의 내장과 정강이를 깨끗이 씻어 바치라고 했습니다(레1:9). 

짐승 중에서 더러운 부분은 내장과 정강이입니다. 내장에는 제물로 끌려오기까지 먹었던 온갖 음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이 더러운 내장을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정강이를 씻어내야 합니다. 짐승들의 정강이는 늘 지저분합니다. 깨끗이 씻어야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정강이는 겉으로 드러난 몸의 더러움을, 내장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마음의 더러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예배드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했지만 자꾸 애굽을 돌아보며 원망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은 부추와 고기 등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습니다. 몸만 애굽에서 나왔을 뿐 여전히 애굽의 문화와 생활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아직도 세상 관습과 풍습 등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는 믿는데 여전히 옛 성품 그대로 변화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던 죄의 문화와 옛 생활 습관과 관습들을 깨끗이 씻어내야만 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내장을 씻어내는 마음의 회개와 정강이를 씻어내는 생활의 성결이 있어야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열납하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에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거룩하게 하는 피의 의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출애굽기29:20을 보겠습니다. 

“(20)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출29:20)

여기 “귓부리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들을 수 있도록 성별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귀를 즐겁게 했던 세상 것들을 다 버리고 찬송과 하나님 말씀에 감동할 수 있는 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설교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아니하는 것은 세상 것들로 더럽혀져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귀를 성별하시기 바랍니다. 

“엄지손가락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엄지발가락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아무데나 분별없이 돌아다니며 지은 죄, 발로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여 복 있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더럽고 죄지을 자리에 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의 손으로 화투나 도박카드를 잡거나 거룩한 발로 술집 같은 데를 드나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손과 발을 성별하시기 바랍니다. 

언행심사가 깨끗해야 거룩한 제사장으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언어가 깨끗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의심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써야 합니다. 비판적인 말보다는 포용하고 이해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박한 말보다는 인격적이고 향기로운 말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입에다 소금을 치고 말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에 시기 질투, 탐욕과 교만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다 소금을 치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직장과 사회에서 모든 생활에 깨끗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과 마음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라고 다같이 고백합시다. 

세 번째로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에는 삶을 통해 예배드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예배를 ‘Service’(봉사)나 ‘Worship’(예배)이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는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왜냐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과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의식을 뜻하는 ‘미사’(Mass) 라고 하는 말은 예배의 제일 마지막에 하는 말, ‘Ite Misa est’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여기에서 예배는 이것으로 마친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서 행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당 안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삶으로 나타내야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로 끝나 버리고 세상에서의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진정한 예배의 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매일 매일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고,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일에 교회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갑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평일에는 회사에, 공장에, 학교에, 사무실에, 논밭에, 가정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갑니다.” 

우리 삶의 모든 현장이 예배의 장소가 되어 우리의 생활 속에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야 산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듯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산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산 예배에 감동하시어 생명 구원과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생활 전체가 산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본받아서는 안 되고 우리는 세상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먼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너의 생활을 이 세상의 온갖 유행에 맞추려고 하지 말아라. 주위의 색깔을 따라 변하는 도마뱀 카멜레온과 같이 되지 말아라. 세상과 함께 행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면 우리는 변화를 거쳐야만 하는데 그것은 외적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인격의 변화 즉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본질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 변화는 가장 비열한 인간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보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과 말씀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내적인 변화, 본질적인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 때 자기중심의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를 새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생에 들어오면 그는 새 사람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를 자기 생에 받아들이면 그의 존재의 중심이 다릅니다. 그의 생의 추진 원동력이 다릅니다. 그의 마음이 다릅니다. 이 이유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중심이 되면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그것은 생의 매 순간 순간과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중심이 될 때만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생활화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나 사회 환경의 변화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세상을 바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육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하면 그 변화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화가 백성들과 민족을 살리는 참 변화가 되려면 오직 예수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합니다. 예수 안에서 철저히 자기 변화를 경험한 후에 세계 변혁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성있는 예배, 영적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므로 삶의 변화, 생활의 변화, 가정과 사회의 참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살아 있는 예배를 드려 아브라함같은 축복의 통로가 되시고, 야곱같은 환경의 축복, 솔로몬같은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에 부와 영광의 축복들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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