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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을 전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살전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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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살전 3:2-3)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8)

예배 기원 Invocation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5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립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희들을 십자가 은혜로 구원하여 주시고, 부활의 참된 소망을 주시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고, 성령님의 위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존귀와 찬송을 하나님께만 돌리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살전 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살전 3: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고백의 기도 Prayer of Confession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나이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웃을 비방하였습니다. 힘들고 위급한 일을 만날 때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사람과 우상을 의지하여 믿음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평안하고 즐거울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닫지 못하고 방탕했습니다. 지나온 자국마다 불신과 어리석음 뿐입니다. 주여, 용서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 신실한 믿음을 채워 주옵소서. 

사함의 확신 Assurance of Forgiveness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아일랜드 사람이 길을 가는데 돼지 한 마리가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돼지가 당신을 따라 갑니까?' 아일랜드인은 '내 주머니에 콩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돼지는 콩을 좋아하는 나머지 아일랜드인이 몇 발자국마다 콩을 떨어뜨리며 갔기 때문에 미련 없이 쫓아가던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가 따라가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도살장이었습니다. 마귀도 우리들이 이런 방법으로 유혹하여 자신의 올무로 유인합니다.
   
물질과 건강의 결핍만이 시험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풍부한 물질과 권력으로 인해 신앙의 나태를 초래한다면 그것도 시험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을 이런 것들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파송한 전후 사정이 잘 나옵니다. 비록 바울은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는 것을 방해 당하였지만 그곳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므로 그들에게 디모데라도 보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도움이 되었으므로 그를 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신앙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디모데를 보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의 견고한 믿음과 발전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고통까지 감수하려는 이러한 바울의 애정은 오늘날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따를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여한 명칭이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2절)라고 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디모데를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기서는 형제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바울보다 나이가 어렸으며 전도 경력, 사회적 위치, 은사 체험 등 모든 영역에서 뒤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겸손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가 높임을 받고 교회의 존경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는 '복음'을 말할 때 '하나님의 복음'이라든가(2:2, 9), '우리 복음'이라고(1: 5) 표현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가 복음의 주제요, 실체로서 '그리스도 복음'이라고  언급됩니다.
바울의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습니다(딤전 1:13).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후 바울은(행 9:1-9)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죄악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악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서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다메섹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복음의 내용은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곧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계획하셨음을 전했습니다(엡 1:3-14).

그리고 때가 되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죄를 감당하시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전했습니다(엡 6:19).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 얻음을 전했습니다(롬 1:16).

이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자기의 사상이나 철학, 인생 경험, 자랑 등은 여기에 조금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내용은 오늘날에도 변질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한 행위입니다(갈 1:8, 9).
  
하나님의 일꾼(쉬네르곤투 데우)는 '하나님의 동역자'(God's fellow worker, NIV)란 뜻입니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디모데는 바울의 사상과 뜨거운 가슴과 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일꾼이었기에 그를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들은 서로 존경하며 굳세게 해야 하며 다투어 분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을 모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여 거기에 알맞은 생활을 하도록 권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낸 목적과 의도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를 굳건하게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살전 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굳게 하다’는 ‘고정하다’‘확립하다’‘튼튼한 기초를 세우다’ 등의 뜻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신 경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성도를 굳게 세우는 것은 복음의 일꾼의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데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를 성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서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주님의 기적으로 벌떡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그 자리에 루스드라의 청년 디모데가 함께 있어 그 현장을 목도한 듯합니다.
그때도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행 14:19-23). 
  
이렇게 복음의 일꾼은 성도들에게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하는 사람입니다.
양떼들은 자신들이 만난 여러 가지 경우들에서 저들의 영적 지조를 지키고 신앙에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하는 지도자를 만날 때 행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주 안에서 든든히 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양떼들에게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방목하거나 방임해서는 안 됩니다.
양떼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라고 합니다.

(살전3:2)...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믿음에 대하여’라 함은 ‘믿음을 위하여’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보기를 심히 원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저희에게 나눠 주어 저희를 견고케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11). 

믿음을 위하여 위로함은 단순한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성장케 하기 위한 강력한 격려나 권면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른 정원에 물을 주어 초목이 새 힘을 얻어 자라게 함과 같은 것입니다.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살전 3: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흔들리다라는 말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살랑거리다’라는 뜻인데, 이는 데살로니가 교인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서 사탄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저들에게 거짓으로 아첨하고 회유하고 희롱하는 내용을 말함입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 3:5)라고 함도 같은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 무서운 유대주의자들일 것입니다.
결코 믿음으로만 구원받음이 아니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꼬리를 흔드는 작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중에도 여러 유형의 시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을 위시하여 성경의 영감을 불신하는 온갖 유의 자유주의, 감각을 왕으로 섬기는 신비주의, 

또한 교회 안에 들어오는 온갖 유의 미신적 무속신앙, 그리고 교회 밖의 권력의 박해, 세속의 유혹, 발달된 첨단과학문명… 등 실로 우리 앞에서 개처럼 꼬리치면서 알랑거리는 사탄의 주구들이 형용키 힘들 정도로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환난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알리라고 합니다. 

(살전 3:3)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그때부터 여러 유의 환난을 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뜻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이것을 당하게 세웠다」는 것입니다.
곧 여러 유의 환난과 핍박, 고난, 세상의 냉대와 조소, 그리고 시련 등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데살로니가에서 예수 믿는 신자인 너희들이 친히 알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너희가 예수 믿으면 환난을 당하게 된다고 미리 말(예언)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 3:4)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 3:5)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환난은 예정된 것입니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 세상의 임금'은 공중 권세 잡은 마귀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환난을 통하여 믿음의 연단이 생기며 보다 깊은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난은 성도에게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성도들에게 '장차 받을 환난'을 미리 일러줌으로써 준비케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고 기쁨이 충만하여 세상에서 빛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에게 갑자기 환난이 닥친다면 시험에 들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편하고 안전하게 살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성도에게 있어서, 오히려 믿기 전보다 더 가정에 환난이 많고 개인의 사업이나 신상에 어려움이 많게 되면 내가 왜 예수를 믿는가라는 회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은 자는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으나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소망은 이 세상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에 있습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성도의 환난은 믿음을 더욱 굳게 합니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세상 속에 있는 성도의 환난은 필연적이고, 또 환난을 통하여 신앙의 깊은 데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믿음 생활의 기초적 상식입니다.

사실 행복은 기쁨을 가져오고, 고통은 번민을 가져오는 것이 정상이지만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할 줄 아는 비밀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환난 자체를 즐기는 이상 증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환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확신과 또한 환난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큰 소망의 확신을 가져다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폭풍의 언덕에서 자주 시달리는 나무가 그 뿌리를 깊게 내림으로써 태풍이 휘몰아치더라도 견디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평지에서 조용히 자란 나무는 한 번의 태풍에 넘어져 그 뿌리를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난은 성도에게 정해진 불가피한 것이요, 또한 성도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에게 닥치는 외적이며 육적인 환난과, 내적이며 정신적인 모든 환난을 이기는 데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환난은 복을 가져옵니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기쁨이요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된 자리에 앉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모든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실 성도의 고난과 환난은 시험하는 자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 시험에 성도의 신앙이 위협받거나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고 굳어진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환난 받는 성도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사탄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겠지만, 성령이 붙들고 있는 한 사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고난은 하늘나라의 영광과 상급의 전조임을 알아야 합니다.
   
'조지 뮐러' 목사님은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 근심을 끝나고, 근심이 시작되는 곳에 신앙은 끝난다.'고 말했습니다.

지나친 염려는 신앙 없는 행위요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암은 아닌가? 나의 자신이 혹시 교통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와 공포에 시달리며 삽니다. 그러나 성도 된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을 은혜 깊으신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모범된 성도는 자신에게 닥칠 환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환란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을 근심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되되 복음을 전하는 사명 감당하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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