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꼭대기 (고전 3:18-20)

첨부 1


꼭대기 (고전 3:18-20)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 삶의 전환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 회심 27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모든 회심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그 순간을 전환점으로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회심이란 마치 고치 속에 웅크리고 있던 번데기가 부화하여 나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사건입니다. 우리는 아주 유명한 회심 이야기들을 몇 개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압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이야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했지만 끝내 그 자리에 이르지 못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영혼의 심연에 있는 비참함과 직면한 후 무화과나무 밑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다가,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으라”(tolle lege, tolle lege). 그는 그 소리를 하늘의 계시로 알고 안으로 들어와 성경을 펼쳐 첫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13-14) 더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확실성의 빛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고,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주입되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의 회심이야기는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습니다. 아직 감리교 전통에 낯선 교우들을 위하여 그의 회심 이야기를 잠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북부의 링컨 주에 있는 작은 마을 엡웟(Epworth)에서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 사이에서 태어난 19남매 중 15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영민했던 그는 1720년에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을 읽고 완전한 성화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예비 목사가 되었고 옥스퍼드 대학 내에 신성회(Holy Club) 모임을 시작하여 경건과 학문과 사랑 실천이 조화를 이룬 삶을 추구했습니다. 1735년에는 북미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의 조지아로 떠나 3년 동안 애썼지만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한 채 1738년 2월 1일에 영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실패자라는 자책감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죄의 인력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에 늘 마음이 무거웠고, 자기의 선행과 의와 기도가 죄를 용서받을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던 그에게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1738년 5월 24일, 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리는 모라비아 신도회의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뭔가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일기에 그때 일어난 일을 적어놓았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제거하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소위 말하는 화끈한 체험이 아닙니다. 마음에 깃든 지긋한 감동입니다. 지성적으로는 이미 회심을 경험했었지만 심정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성령은 그의 영혼에 ‘구원의 확신’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 웨슬리는 흔들리면서도 지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791년 3월 2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또 복음을 살아내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형식주의적인 신앙에 물들어 있던 영국인들은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을 통해 깨어났고, 산업혁명 이후 피폐해졌던 시민 의식은 다시금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죄짓는 것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 하나가 등장하자, 역사에 드리웠던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웨슬리라는 사람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을 앞두고 그의 삶을 일별하면서 저는 웨슬리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말이 뭘까 생각하다가 딱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공부하는 사람, 그리고 공부한 만큼 살아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책으로 하는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진리 하나를 붙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는 의미에서 그는 ‘공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꼭대기’라는 말을 새롭게 해석한 바 있습니다. ‘제일 위쪽’을 가리키는 그 말을 그는 인간이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이라 해석했습니다. ‘조금도 틀림이 없이’를 뜻하는 ‘꼭’에 손으로 대보아야 한다는 뜻의 ‘대기’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말놀이’이기는 그래도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웨슬리는 꼭대기에 이를 때까지 허위단심으로 진리의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쳐서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영적 분별력을 얻기 위해 기도와 말씀 묵상에 힘썼습니다. 회심 사건은 그가 마침내 꼭대기에 손을 댄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노력을 통해 얻은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사건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결에 실려오는 꽃향기와 마주친 것과 같았습니다. 그의 일생은 향기의 뿌리인 꽃, 곧 하나님 혹은 진리를 향한 순례였습니다. 회심 이후에는 존 웨슬리의 공부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영혼이 지향을 잃고 허둥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회심 이후에도 길 찾기를 계속했습니다.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기 위해 독일의 할레(Halle)에 가서 경건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던 프랑케와 만나 그가 하고 있던 사역을 둘러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던 고아원과 학교는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헤른후트(Herrnhut, 하나님의 모자, 곧 보호하심)에 가서는 친첸도르프(Zinzendorf) 백작을 만나, 그들의 예배, 설교, 성찬, 성경공부, 경건회, 구역회, 반회 모임을 배웠습니다. 존 웨슬리는 그 공동체를 감싸고 있는 ‘마음의 뜨거움’(warm-heartedness)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웨슬리의 생애를 되짚어보면서 감리교회의 특색은 배움을 향한 개방성임을 재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배워가면서 진리를 향한 순례를 계속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감리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렇기에 감리교회는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가 아니라, 끝없이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입니다. 예수의 마음에까지 미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개혁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면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구별했습니다.

“알면서 모르는 것이 최상이요 모르면서 안다 함이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病)(도덕경, 71장)

조금 어렵지요?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마치 거울을 통해 보듯이 어렴풋이 아는 것이지, 속속들이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은 오랫동안 함께 살았기에 서로를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인간의 앎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가까운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요? 모르면서 안다 함이 병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2005년에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인용한 말이 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에 머물라, 어리석음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부족한 줄 알아야 뭔가를 바꿔볼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게 애플사의 정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Parker J. Palmer가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베레아 대학(Berea College)에서 행한 졸업식 연설문을 읽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있는 데 그 가운데 하나는 ‘실패를 길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삶은 실험의 연속이다. 그리고 실험은 종종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나는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웠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성공은 내가 이루어냈다는 생각을 불어넣지만, 실패는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은 나의 성장을 돕는다.”(연설문 중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자신의 죄성에 소스라치고,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에 놀라 지치고 상한 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존 웨슬리 영혼을 어루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영혼의 깊은 밤을 통과했기에 웨슬리는 새벽을 맞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환도뼈가 위골되는 고통을 체험했기에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 예수를 꼭 붙잡으라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어리석다’고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모로스moros는 ‘부적절한 행동, 생각 혹은 말’을 수식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는 말은 자칫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제멋대로 처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로 오독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우리는 바울 사도가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십자가’와 관련시킬 때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고전1:23)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1:25).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입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어리석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지나치게 약습니다. 재는 게 많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다’는 뜻의 ‘모로스moros’는 ‘정상이 아니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서 유추해 본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정상적입니다. 이 세대의 정신을 맥없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알지만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합니다. 

벌써 4년 째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는 감리교회의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똑똑한 사람들, 정치적 역학 관계를 자기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사람들, 돈이나 인적 자원이 넉넉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교권을 놓고 겨루고 있는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붙드는 겸허함’입니다. 꼭대기에 손을 대지 못한 이들이 벌이는 이전투구, 이제는 지겹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 편이니 아볼로 편이니 게바 편이니 하며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에게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욥기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허함, 그리고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으려는 검질김이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는 다니지만 예수와는 무관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자아라는 고집불통의 벽癖(굳어져서 고치기 어려운 버릇)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산정에 오르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단련하고 또 헌신했던 존 웨슬리에게 일어난 회심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꼭대기와 접속한 후 그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를 자신의 선교의 지평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게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성화는 물론이고, 사회적 성화도 이루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오늘 감리교회는 감리교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군가의 회심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순간은 진리의 산정,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한 기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꼭 붙드십시오. 그것이 해방의 길이고 자유의 길입니다. 주님은 지금 저 아픔의 땅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길을 향해 다만 한 걸음씩이라도 움직여 나가십시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다가오시는 성령께 마음을 열고 사십시오. 한 주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