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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의 현실과 하늘의 영광 (계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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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현실과 하늘의 영광 (계 4:1-11)

천자문이 하늘 天 땅 地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심오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 땅의 현실은 어렵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성령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일곱 교회 중에 칭찬을 받는 교회는 두 곳밖에 없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 나머지 다섯 교회는 꾸중을 받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처럼 형편없다면 기독교는 위기를 맞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하는 교회는 별로 없고 못하는 교회 천지니까.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시작하지만 요한은 땅의 현실과는 또 다른 미래를 봅니다. 요한계시록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이다,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 설정은 100 흡족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의 현실과 그리고 요한이 보는 미래의 환상의 전환점이 되는 이 4장을 읽는 것입니다. 사실은 전체를 읽어야 이해가 되는데 현재 땅에 있는 교회 상황은 좋지 못하지만 장차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이다, 이것을 보는 요한의 환상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아편이라느니 현실도피를 위한 것이라느니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 세상의 괴로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미래의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서 천상과 미래의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실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많은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미래가 녹록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인데도 불구하고 미래에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미칠 것입니다. 그걸 다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량초과가 발생할 것입니다. 

컴퓨터가 다운되는 것처럼 미래를 다 보려고 한다면 정신을 잃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고린도후서에 사도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온 후에 육체에 가시가 생겼다고 하겠습니까. 미치지 않으면 죽을 것인데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은 미치지 않고 죽지도 않고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소설책을 읽을 때 미리 소설의 끝을 보는 것처럼, 아니면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 fast forward를 해서 미리 끝을 볼 수는 있지만 요한은 끝만 본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끝까지 가는 과정을 다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다 본 후에 요한이 하는 말은 예수님이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악이 패배한다, 모든 것이 잘 된다, 결국 이루어진다, 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했을 때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냐. 

과거에 어느 젊은이가 저에게 자기가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유를 말한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 젊은이가 말하기를 교회에 가면 현실 삶과는 상관이 없는 추상적인 말만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장차 내가 목회를 할 때 현실과 상관이 없는 추상적인 말만을 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씀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과연 우리 실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너희 오른손이 너희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건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이 아니고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은 얼마든지 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궁극적인 이유는 믿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죄 사함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영화 대부가 하도 좋아서 그 원작 소설까지 읽었습니다. 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케이는 마이클 콜리온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이런 문장으로 끝납니다. 주인공의 아내가 매일 성당에 가서 마피아 보스인 자기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교회에 갔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너무 현실적이에요.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너무 현실적입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너무 현실적이에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목은 공부하려하지 않습니다. 역사학 · 문학 · 철학 · 고대 언어 이런 것은 자체적인 전공으로 존재하지 않고 교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추세입니다. 왜냐하면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현실 위주의 신앙으로 가르치고 또 그렇게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냐, 이런 말씀하시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냐, 이런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어떻게 하면 사람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느냐,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어떻게 하면 자녀를 더 잘 키울 것이냐, 어떻게 그들을 교육할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주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성경의 주제에요.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본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러면 이것이 나와 오늘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상관이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현실을 말하자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같습니다. 평균적으로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라고 해서 이상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다 초대교회입니다. 당시 존재했던 교회니까. 소위 말하는 early church - 초대교회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라고 해서 그들이 이상적이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그 당시 그들도 갖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죄, 게으름, 미지근함, 이단, 핍박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똑같은 문제들을 초대교회 성도들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묻게 되는 질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의 교회에 의해 좌우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큰일 났다는 거예요.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이 세상의 사람에 좌우된다면 문제가 많아요. 앞날이 염려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하신 후에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장차 일어날 일과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 예언의 은사가 있지요. 예언이 무엇이냐? 무엇을 예언이라고 정의하느냐? 예언이란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현실을 보면 실망스러운 것 · 낙심되는 것 · 부족한 것 · 모자란 것 · 마음에 들지 않는 것 · 불만스러운 것 · 걱정되는 것 천지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다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셔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하늘나라에는 찬양과 경배와 경건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하나님은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좌정하고 계십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그 주위에 신비한 생물들과 이십 사명의 장로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서 6장에 나오는 말씀과 똑같지요. ‘거룩하다’를 세 번 반복하는 데에서 거룩하신 아버지 · 거룩하신 아들 · 거룩하신 성령 삼위일체를 뜻하는 언급이 나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늘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들이 세상의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한다든가 낙심한다든가 두려워한다든가 또 원망한다든가 이런 것이 없이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요한에게 보여주고 요한이 이것을 기록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냐. 세상염려 좀 그만하도 이들을 본받을 수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염려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장로들을 보세요. 

10절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면류관을 던졌다. 찬송가 가사 중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 드리네’ 라는 구절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면류관을 벗는다는 말은 허영을 벗는다는 뜻입니다. 나의 허영심을 벗는다는 뜻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성도님들을 상담하면서 오랫동안 생각하지 못했다가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깨달은 것은 성도님들의 문제에 대해서 듣고 상담을 할 때 그들이 갖고 있는 허영심을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왜 그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는지, 왜 그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낙심하는지, 왜 그 문제가 그렇게 부각되는지, 왜 그렇게 불만족스러운지, 그들의 기본적인 허영심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나는 이만큼을 얻었고 나는 이만큼을 성취했기 때문에 인생은 나에게 이만큼을 빚지고 적어도 나는 이만큼을 얻어야 되고 이래야 된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요.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왜 이런 것을 가지고 저렇게 낙심할까, 왜 이 일이 저렇게 염려될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굳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만큼 없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지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건 결코 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그 생각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들의 염려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 스물 네 명의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드린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의 임금이 아니라는 표시에요. 내 삶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으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면류관을 쓰고 계시는 한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기가 어려워요. 우리의 허영심, 나의 거대한 자존심을 던져버려야 됩니다. 

이것은 던져버리지 않으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면류관을 곱게 벗어서 바친 게 아니고 던졌다고 했어요. 사실 보기에는 건방진 일이지요. 하나님에게 면류관을 던져요? 그러나 던졌다고 했어요.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이건 아주 과감한 행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 · 신앙의 문제 · 땅의 문제 모두 면류관을 벗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것이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는 도중에 우리의 마음에 근심이 사라지고 예배를 하는 도중에 우리의 소원이 변화되고 예배를 하는 도중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어떤 곳이냐? 요한계시록이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일들을 말하고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이 땅에 사는 사람이 하늘 문이 열려서 보는 하늘의 모습은 천군과 천사와 기이한 생물들과 이십 사명의 장로들이 전부다 보좌에 계신 이에게 경배하고 찬양하는 그 모습입니다. 왜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제일 먼저 예배를 드리느냐? 교회는 이 땅에 있는 하늘의 모형이기 때문이고 성도들의 예배는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후에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에요. 그때 가면 경배할 일이 또 있겠지요. 그럼 왜 이 땅에서 경배하느냐? 이 땅의 문제만을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걸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사람이고 사람의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연약함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라고 우리보다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라고 우리보다 믿음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라고 우리보다 시험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에요. 그 사실을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의 이름이 승리하더라는 것입니다. 미래가 이미 보장됐어요. 미래는 이미 정해졌어요. 다만 그 가는 길에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지만 이건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에요. 우리를 포함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 천성을 향하여 가는 백성으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리고 결국은 그 길을 다 가게 될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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