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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부모와 자녀 사이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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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사이 (엡 6:1-4) 
 
 
❚제 동생을 살려주세요

지난 5월 16일 서울 송파구 한국체육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마련한 학교폭력 관련 토론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맨 앞줄에 앉은 교복차림의 한 여고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저는 경남 김해에서 온 유 아무개입니다. 장관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무대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이 갑작스러운 일에 단상에 앉아 있던 이주호 장관과 토론자들은 당황했고 객석은 술렁였습니다. 마이크를 손에 쥔 유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제 남동생이 2년 넘는 동안 학교 폭력을 당했습니다. 폭행을 당한 후 43일째 무서워서 학교를 못 가고 있습니다.” 유양의 중학교 3학년 동생은 학교친구가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아 코를 부러뜨려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때가 처음이 아니라 1년 전부터 가해학생이 동생을 왕따시키고 때리며 괴롭혀 왔다는 것입니다. 유양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저는 제 동생을 지키기 위해 경남교육청에 편지를 썼고, 청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경남교육감이 학교에 문제를 해결하라며 특별 지시를 내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학교는 학교 이미지가 나빠진다며 명확한 처리 대신 합의만 강요했습니다. 가해학생을 전학 보내거나 징계하지 않아 도리어 가해학생이 ‘나도 피해자’라며 동생을 폭행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눈물을 훔친 유양은 꿋꿋이 말을 이었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믿고 따르듯 학생은 교장을 믿고 따릅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이 제 동생에게 보여준 태도에서 우리 가족은 희망을 잃었습니다.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제 동생이 43일째 학교를 못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장관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유양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참 용기 있는 학생이지요? 그런데 이 소녀의 용기 있는 발언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관의 지시로 교과부가 현지 중학교에 학교폭력 조사팀을 파견했습니다. 교과부가 학교폭력과 관련해서 조사팀을 학교에 직접 보낸 것은 이례적인 경우입니다. 학교 측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고 했는지 철저하게 조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사결과에 따라 학교 측 몇 사람이 책임을 지고 징계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또 유양의 동생을 때린 학생도 처벌을 받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 사건은 과연 잘 해결이 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최근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 문제를 뿌리 뽑겠다며 어른들이 생각해낸 방법이 이것입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뿌리 뽑겠다. 각 학교의 일진들을 다 찾아내서 학교폭력을 일벌백계로 엄중하게 다스리겠다. 여차 하면 가해자 아이들을 붙잡아 폭력죄로 구속하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천만에요. 요즘 청소년과 학교 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왕따(집단 괴롭힘) 문제, 학교 폭력문제, 청소년 범죄 등 정말 큰일 났지요? 우리나라, 우리 애들 정말 큰일이지요? 그런데 그간의 해결 방법은 문제를 쉬쉬 하며 덮기에 급급했습니다. 기껏해야 문제를 일으킨 애들을 정학이나 퇴학,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기, 요즘은 일벌백계로 다스린다며 형사처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해결이 되나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오직 대학입시만을 위한 교육을 시키고, 우리 자녀들을 입시를 위한 입시기계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인격이니 도덕이니, 남을 배려한다던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개념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진짜 원인인 것입니다. 네 친구도 경쟁자니 눌러 이기라고만 가르쳤지 친구들과 좋은 교우관계를 가지라든가, 약하고 어려운 친구에게 배려하라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러운 친구들, 자랑스러운 부모들

저는 이런 문제를 보면 오래 전 읽은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이 책을 쓴 일본 청년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1976년 도쿄에서 두 팔과 두 다리가 다 없는, 그야말로 아예 몸뚱이만 있는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헌데 오토다케의 부모는 이 아이를 키우면서 아들을 장애인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너무나 밝고 명랑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팔, 다리가 없는 몸으로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그의 자라온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오체불만족>이 일본에서 발간되어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이 오토다케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40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집안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바깥구경도 못하고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와 가까운 선배목사님이 경기도 일산에서 장애인교회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분 말을 들어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의 장애아를 가진 상당수 부모들은 아이가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고 집안에서만 살게 한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유일한 낙은 주일날 교회 한 번 오는 일이고, 평생소원은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는 일이랍니다. 그래서 한 7~8년 됐나요? 포항에 이 아이들이 수련회를 와서 바다를 보고 간 적이 있지요. 우리 교회도 작지만 도와주었고요. 그러면 오토다케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선 한국에서 오토다케 같은 아이가 일반학교에 가면 일단 안 받아줄 테고, 받아준다 해도 금세 아이들의 놀림감과 왕따 감이 되어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을 것이고, 또 참고 다닌다고 해도 일진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과 폭력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오토다케는 달랐습니다. 물론 이 아이를 키울 때 부모님이 너무 밝게 건강하게 키운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곤란하다고 거절했지만 결국 이 아이를 받아준 일반학교가 있었고, 그 다음에 무엇보다 오토다케를 친구로 받아주고 함께 어울려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오토다케를 놀리거나 왕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불쌍하다고 동정하지만도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오토다케를 위해 ‘오토의 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오토의 철봉은 정글짐, 오토가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오토의 출발점은 남들보다 이만큼 앞, 오토가 야구를 함께 하면서 공을 때리면 친구가 대신 1루까지 뛰기 등”의 룰을 만들어 오토와 함께 놀고 뛰고 어울렸던 것입니다. 

불쌍하다고 동정하거나 넌 몸이 그러니 뛰지 마, 야구도 안 돼가 아니라 나름의 룰을 만들어 똑같은 친구로 받아주고 그러면서도 오토의 상황에 맞게 배려하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지요. 차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조건 동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룰을 만들어 오토를 배려해 준 친구들도 정말 훌륭하지만 그 아이들 뒤에는 자녀들에게 오토다케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가르친 부모가 있다고 말입니다.

부모 여러분, 어른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녀는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문제 자녀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훌륭한 자녀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부모가 있습니다. 저도 부모입니다. 제 두 아들이 장성하여 어느새 큰 아들은 곧 군대를 갑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느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됩니까? 쉽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도 자녀에 대해 큰소리 못 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아이들도 부족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도 때론 속상하고, 때론 안타깝고, 속이 터지도록 답답합니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자녀는 부모를 닮게 마련이고, 자녀의 모습 뒤에는 반드시 부모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부모로서, 한 사람의 아비로서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물론 저 자신이 자녀들을 잘 키우고, 바르게 키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한계가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자식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하겠다는 것을 말입니다.

❚상호 책임, 부모의 책임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6장 1~4절 말씀만 읽었지만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앞에 나오는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6장 9절까지 읽어야 합니다. 제가 간단히 설명할 테니 성경을 눈으로 따라보세요.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지침’이 나옵니다. 먼저 5장 22절에는 아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 다음으로 5장 25절에는 남편들에게 권면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 다음이 바로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6장 1~4절인데 여기에서 먼저 자녀들에게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또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지난주 어버이주일 말씀을 통해 나눈 내용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4절에 아비들에게, 부모들에게도 뭐라고 권면합니까?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5절에서는 종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고, 상전들에게는 9절에서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지침’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 몇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바로 잘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해도 그 가정이 화평하고 믿음으로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이렇게 우리 가정을 바로 세우려면 가족들 간에 반드시 필요한 자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상호책임’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부부관계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한 후에 남편에게도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면하지요? 그러니 부부 사이가 화평하려면 아내만 잘 해도 안 되고, 남편만 잘 해도 안 되고 둘이 서로 상호책임을 지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줘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부모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뒤 부모들에게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 자녀 사이도 자녀만 잘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부모만 잘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서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과 상전도 마찬가지지요.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가정의 행복은 누구 한 사람의 일방적인 책임이 아니라 상호 책임입니다. 이 사실이 망각되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가장 때문이다, 부모 탓이다, 자식 탓이다 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추궁하면 그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책임을 져줄 때 행복한 가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이 가운데 특히 부모의 책임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주에도 나눈 말씀이지만 에베소서는 자녀들에게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며 또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라고 권면한 후 부모들에게는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세상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청소년 문제나 우리 아이들의 범죄와 일탈로 인해 어른들이 분노하고 있지만 실은 그 원인이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어른들을 화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아이들을 화나게 하는 세상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우리 자녀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오직 부모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아이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돌아봐야 합니다. 

어른들의 욕심이 자녀들을 멍들게 하고, 어른들이 본을 보여주지 못하기에 어설프게 우리 자녀들이 어른들의 못난 모습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성적으로 타락하니 자녀들도 어설프게 따라 하고, 부모들이 돈과 물질과 명예만을 좇으니 자녀들도 그런 줄 알고 따라 오고, 어른들이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약자를 무시하니 자식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두 번째 권면은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교훈과 훈계’가 아닙니다. ‘부모의 교훈과 훈계’가 아닙니다. 부모 공경이 세상의 계명이나 사람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부모도 자녀를 양육할 때 자신의 교훈과 훈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주님의 교훈과 훈계도 참고하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바뀝니다. 

1, 2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세대차이가 난다고 하는 세상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얼마나 큰 세대차이가 나겠습니까? 가치관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정말 다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녀의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조건 자기 생각이나 경험만 고집하며, 자녀의 의견이나 생각을 무시할 때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무슨 수로 부모가 자녀를 교훈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바로 주의 교훈과 훈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키울 때 부모의 생각과 경험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도 자녀를 키우는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여러분도 다 경험해 보지 않습니까? 절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예수님만이 우리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키워주실 분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 자녀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일 뿐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온전히 주님께 달린 줄 알고 그 분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임종 직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을 읽어드립니다. 이 유언 속에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아들 솔로몬을 키웠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 진리를 우리 자녀와 자녀손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는 좋은 부모, 좋은 어른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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