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정의달] 행복한 결혼 (창 2:18-25)

첨부 1


행복한 결혼 (창 2:18-25)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복은 남자 혼자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반드시 여자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에덴동산은 너무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그래서 아담은 살아가는데, 어떤 부족도 느끼지 못했다. 아담은 자기를 돕는, 배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또 에덴동산의 식물들만 봤기에, 암수의 세계가 있음을 인식하기 못했다.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지으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가셨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암수 한 쌍으로 되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아담은 자기만, 혼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혼자 있는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한 후에,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고, 만드신 그 여자를, 아담에게 이끌어오셨다. 아담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여자를 만들어 주신 일을 알았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를 위해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신 여자를 보며, 짧은 사랑의 시를 하나 지었다. 

(2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고 했다. ‘∼중의 ∼이다’라는 말은, 최상급을 말한다. 즉 최고라는 말이다. 이로서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끝을 맺었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 따라, 사람은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야말로 내게 있어서, 최고다. 내 생명과도 같은 존재, 더 한 존재라는 기막힌 사랑의 표현을 했다. 이런 고백을 하려면,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아담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이런 믿음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참 감사해요, 내게 가장 좋은 아내를 주심을 감사히요, 내게 가장 좋은 남편을 주시니 감사해요.” 이런 믿음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결혼의 정의(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결혼을,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일이라 하셨다. 우리를 결혼으로 이끄신, 하나님이 직접 하신 정의다. (말3:6上)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리신, 결혼에 대한 정의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가 없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일이다. 따라서 두 남자가 합하거나, 두 여자가 합한다고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법은 그것을, 결혼으로 인정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결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들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짝을 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다. 

그런데 두 남자가 합하거나, 두 여자가 합한다고, 사람들이 충만할 수 없다. 동성연합은 사람들을 충만하게 만들 수 없다. 이는 죄로 인한, 타락한 결과일 뿐이다. (전7: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전도자의 말씀은, 결혼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하자, 그 결과 남녀 사이에는, 이런저런 온당하지 못한 관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세기에 나타난,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창4:19)에서 라멕은 아다와 씰라, 두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으로는 일부일처였다. 그런데 라멕은 일부다처를 취했다. (창19:5)에는, 소돔 사람들이 롯을 찾아온, 자들과 관계를 갖기 위하여, 롯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동성애, 남색을 즐기려했다. 
(창347)에는, 강간이 등장한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마을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 그때 하몰의 아들, 그 마을의 추장 세겜이, 디나를 강간하여 욕되게 했다. 세겜은 폭력으로 디나의 몸을 짓밟았다. (창38“18)에는 유다와 그의 자부, 다말의 매춘이 나온다. 이는 성 매매만 아니라, 근친상간이었다. 

온당하지 못한 예들은, 모두 부끄러운 짓이다. 이는 전적으로 타락한 결과였다. 우리는 결혼으로 이끄신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한다. (히13: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만일 우리가 잘못해서, 찔림이 있다면 회개하자. 하나님은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부끄러운 죄들을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결혼을, 귀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2. 결혼의 요소(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례사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에는, 3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1) 남자가 부모를 떠나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했다. 그러면 ‘떠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남자가 결혼하면, 부모님을 더 이상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가? 아니다. 
사람은 결혼에 상관이 없이, 부모님을 언제나 공경해야 한다. 남자가 결혼하면,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따로 살림 차리라는 말이 아니다. 또 부모님을 떠나, 처갓집에서 의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여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 남자에게로 왔다. 

(창24장)을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부모를 떠나 남편에게 왔다. 이는 하나님이 아내 하와를, 남편 아담에게, 이끌어 오심과 같은 맥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가 결혼하더라도, 그 부모를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았다. 야곱의 아들들은 결혼했지만, 아버지 야곱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생업을 하며, 다 함께 모여 살았다. 따라서 ‘떠난다’(아자브)는 말은, 이처럼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다. 도움 없이, 홀로 서라는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려면, 결혼의 다른 요소와 연결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유와 목적은, 아내와 연합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결혼해서, 남편과 아내가 합해야만,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그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아울러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복을, 누릴 수가 있다. 

따라서 ‘떠나다’는 말은, 부모님에게 묶이지 말고, 벗어나라는 의미다. 홀로서기를 하라는 말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님이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결혼한 후에는 홀로서기를 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남편이 홀로서기를 해야, 가정이 평안하다. 

(2) 남자가 그 아내와 합하라.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일은, 그 아내와 합하기 위해서다. ‘합하다’는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달라붙었다.”는 의미다.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가장 가까운 관계가, 자기와 부모와의 관계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그보다 더 강하고, 더 긴밀한, 부부관계가 새롭게 생긴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는 촌수로 따져서 일촌이라면, 부부는 무촌이 된다. 따라서 부모는 자기 자녀들의 결혼을,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일단 결혼하면, 부모와 자녀관계보다, 더 강한 부부관계가, 새롭게 정립된다. 

따라서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에, 부모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도해주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종을, 고향 땅으로 보내서,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여자, 리브가를 데리고 와서, 이삭의 아내로 삼게 했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무조건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일단 결혼하면 뗄 수 없는, 강한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중에, 잘못 결혼했다고 후회하지 말고, 부모님의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은, 많이 기도하기 바란다. 

이미 결혼을 하셨는가? 남편은 슬기로운 아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 아내는 믿음직한 남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우리에게 귀한 배필을 허락하시고,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3) 둘이 한 몸을 이루라.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으나, 하와는 흙으로 만들지 않고,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하와는 아담과 별개가 아니고, 아담의 몸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아담은 하와와 한 몸이었는데, 둘이 되었다. 
따라서 아담은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뼈와 살을 되찾은 일이다. 그러기에 아담은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결혼은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갈빗대, 곧 자신의 뼈와 살을 되찾는 것이다. 

둘로 나뉘어졌던 몸이, 본래의 하나로 되돌아감이 결혼이다. 아담은 ‘인류, 인간’을 말한다. 하와는 말은 ‘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될 때, 산인간이 된다. 히브리 사람들은 결혼 전의 인간은, 반쪽 인간이요, 제 구실을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혼을 통해서, 비로소 번성하는,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반쪽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과정은,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 히브리어로 신부를 칼라(ה󰗢󰗐)라 한다. 칼라는 2가지 뜻이 있다. ① “완성”이다. ② “끝, 종말”도 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올바른 결혼은 하나님의 신부로서,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이지만, 잘못된 결혼은, 종말을 행해 간다.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결혼이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 속담에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한 번 기도하고,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을 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하라!’고 했다. 
그만큼 결혼은, 힘들고 어렵다. 예수님은 (마19:6上)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말씀하셨다. 결혼하면 더 이상, 두 사람이 아니다.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한 몸이다. 육체만 아니라, 삶의 목표와 방향, 생각과 마음까지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제 부부는 둘이 아니다. 하나다. 

따라서 부부는 나누어질 수 없다. 부부가 나누어지면 자기 몸을, 둘로 쪼개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19:6下)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기서 둘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1) 하나님과 사람이다. (2) 짝짓는 것과 나누는 것, 곧 결혼과 이혼이다. 
예수님의 요점은, 결혼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혼은 언제나 사람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어떤 이유든지, 하나님이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심을, 스스로 나눌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모든 결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모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이다. (마19:7-8)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오늘날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마치 모세가 이혼을 명했던 것처럼 생각하고, 이혼을 정당화시켰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혼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혼을 단 한번도, 권장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악하기에, 예외적인 경우에는, 이혼을 허락하셨다. 예컨대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음행행할 경우,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그런 경우 죽이지 않고, 이혼을 허락하셨다. 죽이는 것보다는, 헤어지는 것이 낫다. 
또 남자나 여자가 바람이 나서, 도무지 남편과 아내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혼을 간접 허락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하셨다. 이혼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미래에도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종신토록 함께 사는 것이다. 이혼의 아픔을 겪으신 적이 있다면, 한번 죽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게 되었으니, 한번 죽은 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다시 죽지 말라. 
과거의 아픔을 경험 삼아, 남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부부가 됐는가? 결혼을 주관하신 분은, 하나님임을 잊지 말라. 따라서 좋은 배필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라. 이제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잊지 말라. 자기 몸을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라. 

부모님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가? 많이 기도하라. 하나님은 짝지어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가정에 감사가 넘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결혼생활의 행복의 비결(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즉 부끄러움 없이, 친밀하게 살라는 말이다. 약점이나 허물이, 결코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허물을 약점을 감싸줘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알몸으로 태어난다. 아담과 하와도 창조될 때, 알몸으로 창조되었다. 짝을 이루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살았다. 에덴동산은 기후가 덥거나 추워서, 옷을 벗고 입을 필요가 없는, 최상의 상태였다. 짐승들도 벌거벗고 살았다. 아담과 하와는, 몸을 치장할 필요가 없었다. 

창조하신 그대로 완벽했다. 두 사람은 벌거벗었지만, 전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서도, 서로를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악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는, 아직 악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이 벌거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를 않았다. 서로를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숨길 것이 전혀 없었다. 얼굴을 붉힐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이전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통했다. 자기 짝을 사랑했고,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그것을 먹었다. 그 때부터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창3:7-8)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고 난 뒤, 눈이 밝아졌다. 자기들 몸이, 벗은 줄을 알아,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 죄를 짓게 되자, 그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서, 수치를 스스로 가리려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숨으려고 했다. 우리도 우리에게 떳떳하지 못한 감정, 죄악 된 일이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다른 사람에게도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살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렵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돌이키고, 허물을 서로 덮어줌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바란다. 
가정에서는 자존심과 가식, 체면을 벗어버리고, 다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이런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윙크하는 이유를 아는가? “내가 당신의 장점만 보고, 단점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다. 

또한 양손을 보기 바란다. 오른손은 남편을 상징하고, 왼손은 아내를 상징한다. 양손 다 손가락이 있고, 골짜기가 있다. 손가락은 장점이고, 골짜기는 단점이다. 남편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아내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부부가 한 몸이 됨은, 남편의 장점으로, 아내의 단점을 메워주고, 또 아내의 강점으로, 남편의 약점을 메워주라는 말이다. 이것이 한 몸이 되고, 합하는 모습이다. 그때 우리 자녀들은, 안정감 있게 자랄 수 있다. 덮어주려면, 아담이 죽을 때 아내가 태어나고, 그의 가정이 행복해진다. 

내가 죽을 때, 아내와 남편이 살아나게 된다. 내 주장을 죽이고,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가 흐르기 바란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