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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주일] 청년의 날을 기뻐하라 (전 1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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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청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 5월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5월 달에 들어서면 마치 소년, 소녀가 된 것처럼 설레고 가슴이 마구 뜁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그저 기쁜 것입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5월을 예찬합니다. 

4월은 ‘찬란하다’라고 하기에 아직은 조금 춥습니다. 4월은 생명의 싹을 틔우기 위해 차가운 비를 맞고 바람을 이겨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제 봄인가 싶다가도 다시 매섭게 부는 바람 때문에, 누군가의 말처럼 ‘잔인한 달’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5월이 되면 사람들의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5월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명이 역동하는 기운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흑갈색으로 죽어있던 대지가 하루가 다르게 파릇파릇한 생명의 색으로 바뀌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들이 피어나고 아카시아 향기가 퍼져나갑니다. 

이렇듯 5월은 살아있음의 경이를 실감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든 시인들은 5월을 예찬합니다. 잔인한 4월을 지나보내고 짙푸른 6월을 만나기 전인 이 5월을 즐기라고 우리를 향해서 손짓합니다. 

이 아름다운 5월이 되면, 우리는 청년을 생각합니다. 젊음과 청춘을 마음껏 구가하는 20대, 30대 청년들.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그들의 건장하고 씩씩한 모습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런 젊음과 청춘이 꼭 젊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일까요?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우리는 참여할 수 없는 그들만의 잔치인가요? 때로 청년들은, 청년이면서도 청춘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잊은 채 그 시간을 감사하지 못하며 보내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청춘의 시간을 지나보내고 나서야 ‘아, 그때가 좋았지. 젊었던 그 때가 좋았지. 그때는 건강했고, 많은 것들을 누릴 수가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내 청춘이 다 지나가고 말았네.’ 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갖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닙니다. 

젊음을 아프리카에서 불태웠던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를 간직하라.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정신 상태를 뜻한다. 젊음은 의지의 도약이다. 상상력의 도발이다. 감정의 응축이다. 용기가 두려움을 이기는 일이며 모험심이 게으름을 제압하는 일이다. 일정한 햇수를 살았다고 해서 늙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이상과 꿈에 작별을 고할 때 늙는다. 살아온 햇수가 늘어나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지만 감동하기를 포기하면 영혼이 쭈글쭈글해진다.” 

사람은 이상과 꿈을 품은 만큼 젊어지고, 불신과 회의를 안은 만큼 늙어진다는 의미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젊어지고, 절망이 가득하면 늙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계절을 살아가고 있음이 설레십니까? 감동이 밀려오십니까? 그렇다면 청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 인생 다 살았구나. 이제 뭐 그럭저럭 살다가 끝나는 거지, 뭐.’ 이런 생각으로 삶이 주는 감동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나이가 어떠한가와 상관없이 더 이상 청년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 슬픈 것은 육체만 늙은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늙어버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오래 살아서 늙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버릴 때 늙는다.” 나이가 들면 몸이 쇠약해지고, 몸의 기능이 예전과 다름을 느낍니다. 관절들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변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몸이 변화하듯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정신 또한 쉬지 않고 변화합니다. 그것은 기능의 쇠퇴가 아니라 성숙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삶의 모든 날들을 청년처럼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자신의 젊음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처음부터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본래 돈과 재물을 좋아한 사람입니다. 돈을 물 쓰듯이 써도 괜찮은 큰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명예와 권력을 탐했던 인물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많은 것들을 소유했고, 또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 마구 호령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인 쾌락과 세상 잡기의 즐거움을 누린 것은 물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고 탐욕이 생기는 대로 다 즐겨보았던 인물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던 인생.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누린 후 그는 인생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인생이란 것, 지나보니 아무것도 없구나.’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이 전도자에게는 인생을 사는 기본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것들을 누리던 순간에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 공간을 느끼며 그곳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 변하는 세계 속에 과연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아무것도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이 인생 가운데 정말로 새로운 것이 있는가?’ 라는 끊임없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고뇌가 없었다면 전도서가 성경에 들어올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들에 그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전도서 1장 2절 앞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마 우리가 종종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볼 때 느끼는 마음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헛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구나. 무상이구나. 이 세상은 결국 빈껍데기구나.’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헛되다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애쓰며,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즐거움들을 맛보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헛것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새 것이 없다는 깨달음 안에는 세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젊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나이가 들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고통이 다가오고,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질병이 다가오는 것. 멋진 것도, 화려한 것도, 기막힌 쾌락도 결국에는 다 사라지고 마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라며 인생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둘째, 세상의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있었던 일이 오늘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그는 보았습니다. 어제 동쪽에서 뜬 태양은 오늘 다시 동쪽에서 뜨고, 계절도 시간도 인생의 어느 한 가지도 반복되지 않는 것은 없음을 그는 느꼈습니다. 결국 다 그렇고 그런 인생. 이러한 반복은 그에게 지루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싫증이자 고통이었고 짜증이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재물, 성찬의 음식,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수많은 궁녀와 보내는 시간들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빈 마음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반복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것이라 해도 이 땅에서 누리는 것들은 모두 흔들리는 터전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의 끝에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새로움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해 아래에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하늘 아래에는 새로움이 없지만, 저 하늘 위에는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찾고자 갈망했던 새로움이 해 위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이 땅을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지만, 하늘 위에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새로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이제 그는 인생의 무상과 낙담,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권면합니다. 헛되지 않은 것, 참된 새로움을 향해서 나아가야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움을 간직하고 맛봐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기억하라’는 것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새로움은 오직 하늘에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움을 경험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왜 인생을 사는 즐거움이 될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참다운 새로움을 겪는 인생의 축복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째서 젊은이와 같은 삶을 사는 비결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을 귀하고 즐겁게 여기게 해준다고 깨우쳐 줍니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전도서 11:7)

전도서 기자는 매일의 삶을 비추는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눈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들어가면 이 빛을 볼 수 없겠지. 매일 떠오르고 지는 저 태양을 볼 수 없을 테지.’ 그는 살아있다는 것의 감사와 기쁨을 새삼 느낍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 그 아름다움을 느끼며 하루의 삶 속에서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오색찬란한 아름다운 색깔들, 귀로 들리는 새소리, 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들을 마음껏 느끼라고. 그리고 직접 손으로 흙을 만지고, 발로 땅을 밟고 서 있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지 발견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소리치며 노래하며 살아가라고 그 기쁨의 자리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끝나기 전에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봤을 때는 반복되는 일들에 지루할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한 일들입니다. 나를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소중한 것입니다. 신기하고 재미있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제서야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축복이며,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다른 사람의 나이는 잘 몰라도 우리는 자기 나이는 한 살 한 살 잊지 않고 세며 살아갑니다. ‘아, 어느새 내가 이렇게 늙었구나. 좋은 청춘 시절 다 보냈네. 이제 세상 사는 재미가 뭐 있겠어. 다 사라졌지.’ 이렇게 낙심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실 것입니까? 나이 타령하면서, 건강 타령하면서 생의 여전한 아름다움을 외면한 채 포기의 마음으로 남은 날들을 억지로 살아가실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제게 주신 생명,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살아있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시며 살아가실 것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인생을 즐기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오늘이 내가 산 날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 우리는 그 젊은 날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밤 온 힘을 다해 애썼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어제를 생의 마지막으로 이 땅을 떠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호흡할 수 있다는 것, 따뜻한 가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게 주어진 삶, 그 자체를 즐거워하면서 기쁨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 하실 줄 알라(전도서 11:9)

인생에는 분명히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삶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삶이란 기쁘고 즐거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닙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내 소유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잠시 맡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치 내 것인냥 아등바등 붙잡고 집착하며 살아가지 말라고, 모든 탐욕을 내려놓고 주어진 삶을 그저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내게 허락하신 소유들과 이만큼의 건강에 감사하며 살아가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또한 감사하며 가는 것입니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명예와 권력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나 자신의 인격입니다.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내 삶의 소중함을 날마다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때 인생을 즐길 수 있고, 참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 사랑하면서 즐거워하면서 살아가다가, 주님께서 마지막에 심판자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설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인생을 바라보는 참된 마음일 것입니다.

성경은 유일한 인생 설명서입니다. 

우리가 상품을 사면 제일 먼저 보는 게 무엇입니까? 바로 상품 설명서입니다. 이 제품에는 어떤 기능이 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만약 고장이 나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부터 살펴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도 설명서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 설명서를 만들어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질문하고, 생각하고, 나름의 대답들을 찾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 서적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다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 즉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를 만드신 이의 ‘인생 설명서’가 필요합니다. 그 창조주만이 온전히 우리를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설명서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복을 받는지, 그리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자세히 적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유일한 인생 설명서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진정한 새 것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우리는 결코 새로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물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내가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을 즐거워하면서 기뻐하면서 평생 살겠습니다’ 라고 결심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을 내 인생의 가장 젊은 시절인 것처럼, 즐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모두가 이러한 결심으로 각자의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고, 다가오는 날들을 새롭게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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