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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을 찾는 사람 (창 2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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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는 사람 (창 27:1-29)

자기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어떤 학생이,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교회당에 가서 기도만 합니다. 그러다가 시험 때가 되었습니다. 막상 시험지를 받아 들고 보니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한참 궁리를 하다가 답안지에 “1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2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3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4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5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6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7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8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9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 10번 나는 모르고 하나님은 아신다.”라고 적었습니다. 이 학생이 나중에 채점된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선생님이 적어 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100점, 너는 빵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물에서 슝늉을 바라는 것이나,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얼마전 어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돈을 많이 모으면 행복할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건 부부간의 불신과 갈등의 골이 너무나 깊어졌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해의 물꼬를 터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데도, 그것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물질의 걱정이 없으니 부부 서로 간에, 그리고 자녀와의 관계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살고만 싶은데, 실상은 다툼만 일어나고, 조화로운 생활이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가족 간에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투자를 하고, 온 정열을 쏟았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를 하지 못했고, 투자를 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하게 노력을 기울이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행복해지려고 갈망은 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것입니다. 행복은 그냥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창27:1-29절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란 주제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행복은 반드시 얻기 위하여 합당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행복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댓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노력을 하지 않고 얻은 것은, 반드시 바람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자신의 마지막 때를 안 족장 이삭은 아들 장자 에서에게 본문 2-4절에서 말하기를, ‘얘야, 보아라, 너의 아버지가 이제는 이제는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이제 너는 나를 생각해서 사냥할 때에 쓰는 기구들, 곧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서 사냥을 해다가,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족장 이삭은 자기의 생애가 끝나감을 알고서, 장자의 축복을 큰아들 에서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족장이나 왕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큰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는 보통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족장 이삭은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물려주고자 한 것이고, 자신의 뒤를 이어서 족장이 될 장자 에서에게, 축복기도를 받기 전에 먼저 정성을 다하여 사냥을 해서, 아버지가 먹고 기뻐할 별식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명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에서처럼 축복기도를 받기 전에 먼저 사냥을 하는 수고와 아버지가 기뻐하는 별식을 만들어가지고 가야만 하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분별력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축복을 세상의 보통 사람이 하는 방식대로 그냥 장자에게 물려주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가문처럼 족장인 자기가 큰 아들 에서를 불러다가 그냥 머리에 손을 얹고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으로 장자의 복을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야훼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전적으로 무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족장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약속이, 자리를 잡고 있을 곳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순종적이고 이웃과 다투려고 하지 않는 평화적인 족장임에는 틀임이 없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루하신 뜻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사는 일에는 조금 무심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족장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물려주고자 하면서,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무관심했으나, 인간적인 면으로는 큰 아들 에서에게 요구하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하나님께 장자의 복을 주시라고, 복을 빌려고 하니까, 먼저 들에 나가서 들짐승을 잡아다가,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족장 이삭이 큰 아들 에서에게 이렇게 요구한 것은,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주시라고, 야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어렵거나 아까워서가 아닐 것입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그런 명을 내린 것은, ‘에서 네가 장자의 복을 얻기를 사모하고 있다는, 마음의 증표를, 아버지인 이삭에게 최선을 보일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들에게 복을 빌어주겠다는 족장 이삭의 뜻을 표현 한 것입니다.

족장 이삭의 이야기를 들은 에서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들판으로 나가서 최선을 다하여 가장 좋은 사냥감을 찾고, 사냥을 하고자 정성을 다하여 들판을 누빕니다. 사실 에서의 생애 가운데서,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복을 물려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만큼, 기쁘고 즐거운 날은 다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장자의 복을 받고자 정성을 다하여 땀을 흘려가면서 사냥터를 누볐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야훼 하나님은 장자의 복을 야곱에게 주시기로 이미 작정을 하셨습니다. 족장 이삭은 큰 아들 에서를 사랑하여, 에서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야훼 하나님은 그 복을 야곱에게 주시려고 이미 결정하셨습니다.그렇다면 장자의 복을 그냥 야곱에게 주면 되는 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냥 야곱에게 장자의 복을 떠 안겨 주시지 않고, 야곱이 장자의 복을 얻기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사모하고, 무진 애를 쓰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야곱이 이처럼 장자의 복을 얻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이 복을 받기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입으로는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하여, 전적으로 마음을 쏟지도 못하고, 사모하여 사는 생활도 없고, 뜨거운 관심도 표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람이 관심을 잃으면, 행복도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비록 형의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 이삭을 속여가면서 까지도, ‘반드시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하겠다.’라는 정열과 사모하는 마음과 생활이 있었습니다.

사실 야곱이 장자의 복을 탐하여, 형에게 여러 가지 술수를 쓰고, 단순한 형을 배반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인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간교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야곱이 형 에서 대신에,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은 사람으로, 형 에서를 대신하여 야훼 하나님께서 악속한, 약속의 가문의 족장을 이어간 사람으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기록은, 야곱이 형 에서를 배반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인 허물보다는, 오히려 야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것을 얻는데,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았다는 점을 더 귀중하게 평가했기 때문에, 본문 기자는 야곱이 지은 허물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본문 기자는 야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큰 에너지를 투자했는지를 높이 평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야곱이 야훼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이 어려운 일은, 결코 야곱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유념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길잡이 역할을 해 준, 어머니 리브가가 있었습니다.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가 아버지의 명을 듣고, 아버지를 위한 별미를 만들기 위하여, 들판으로 사냥감을 찾으러 나가자, 곧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다가, 야곱이 형 에서 대신에 장자의 복을 받도록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합니다.  

가만히 본문을 보세요, 장자의 축복기도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기 위해서, 에서는 혼자서 뛰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뛰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에서보다 빨리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 가지고 가고자, 들짐승을 구하지 읺고, 집 안에 있는 염소 두 마리를 끌어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에서처럼 분장을 시켜서 어머니 리브가가 만들어준 별미를 가지고 이삭에게 들어가서 아버지로부터 장자가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서, 형 에서가 받아야 하는 장자가 받는 축복의 기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고 해도, 사람의 애씀과 갈망과 수고가 있어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모하는 마음이 강렬해야만 하고,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애를 써가면서, 혼자서 어려우면 이웃과 협력하여, 바라는 일을 이루고자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믿으시면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먼저 야곱처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자 항상 가능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1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딘가에 침노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해야만 합니다. 다음에는 침노하기 위하여 온갖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침노하여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많은 노력과 희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점은 신앙의 문제에서도 그러하고, 가정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려면, 먼저 야곱처럼 믿음을 가지고, 침노하여 빼앗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가정이 행복하고자 한다면, 지혜를 떠올리고 노력과 이해와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런 마음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행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여러분이 원하는 복된 삶을 응답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먼저 하늘에 속한 고상한 것을 갈망하고,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열심히 그리스도 예수의 뜻만을 따라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준비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립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아버지 이삭이 큰아들 에서에게 베풀어주려는 복을, 받을 준비를 완벽하게 갖출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준비가 안된 사람은 아무리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눈 앞으로 다가와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를 못합니다. 

족장 이삭의 가정에, 에서와 야곱은 한날 한 시에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사이에서 출생한 쌍둥이 형제입니다. 한 가정에서, 같은 환경 아래서, 부모님의 편애함도 없이, 성장한 형제들인데도, 이상하게 에서와 야곱은, 삶의 목적과 관심이 서로 아주 다르게 성장을 했습니다. 둘째 야곱은 오로지 하나님의 축복, 장자가 받는 복에만 관심이 있었고, 집을 떠나지를 않고 어머니를 도와주면서 성장을 했고, 에서는 남자답고, 사냥을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성장을 했으며, 우선 보이는 것과 육적인 욕구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면 왜 야곱은 영적인 사람이고, 에서는 육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까? 한 가지 예로 어느 날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아주 배가 고파서 돌아왔을 때에, 마침 야곱은 집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만 달라고 하자, 야곱은 그 기회를 틈 타서 에서에게 그러면 형의 장자의 권리를 내게 양보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에서는 선뜻 장자의 권리를 야곱에게 양보를 하고, 팥죽 한 그릇을 받아 먹었다는 기사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이처럼 에서는 급하면 장자의 권리까지도 팥죽 한 그릇 때문에 팔아먹을 정도로 육적욕구를 따라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삭의 큰 아들 에서는 현재의 배고픔을 면하는 것에, 눈이 어두워져서, 장자의 축복 같은 것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이삭의 큰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장자의 권리를 빼앗을 존재가 없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실 것인가?는 전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육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에게는 눈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장자의 권리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팥죽 한 그릇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서는 생명의 주인이 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고, 인류 역사의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날마다 눈에 보이는 들짐승과 사냥감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삭의 큰 아들, 에서는 물질중심의 생각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에서에게는 짐승 몇 마리를 잡아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것이 행복이요,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에서의 관심은, 훌륭한 사냥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인 족장 이삭의 뒤를 이어서 감당하고 지켜야만 하는 가문의 전통과 신앙적 자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에서로서는 야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보다는, 그냥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육축들을 잘 기르고, 가끔씩 사냥에나가서 들짐승이나 많이 잡아서, 이웃들과 나누면서, 이웃에게 재산이 많고, 남자답고, 힘이 있는 훌륭한 사냥꾼이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에 동생 야곱은, 집에서 어머니 리브가의 일을 도우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듣고 또 듣습니다. 아마도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고 어머니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야곱은 그 말씀을 언제나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자신의 꿈을 키웠던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이러이러 했느니라.’고 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매,  드디어 사람의 방법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 어떤 것도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은 인간이 정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이르러야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골이 깊은 것일수록, 상처가 깊은 것일수록, 치유되는 시간이 길어지듯이,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완전하게 해결리 되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의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졌을 때에, 인내심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의선하신 섭리와 능하신 역사를 믿음을 가지고 침착하게 기다릴 수가 있는지, 한 번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겸손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40편에서는 다윗의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다리기를 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돼야만 하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음식도 10분이면 나와야 하며, 사진도 10여 분 안에 현상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화를 내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잠시라도 기다리는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특히 정보화 시대라고 해서, 정보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어떤 기업도 살아남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마찰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이라고 하면, 더 고집을 세게 부리고, 좌절감을 주려고 하기까지 하고, 안해도 될 모욕을 줍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기는 정말로 힘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기까지,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일부러 응답을 늦게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기다리지를 못해서, 믿음여정에서 낙심하는 사람이 왕왕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 삶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실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 편에서는 늦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조급해 해도,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서둘지 말고, 믿음 안에서 여유를 가지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맡긴 사람답게 느긋한 삶을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윗처럼 인내와 준비와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대하여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믿음여정을 달려 갈 때에,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들이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지고, 복되고 행복한 삶을 감당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세요,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자신의 피난처요, 산성으로 삼고, 어떤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야훼와 의논을 하고, 전적으로 맡기고,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할 일을 감당한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을 보세요. 그래서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패전한 적이 없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여김을 받은 적이 없으며,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았고, 야훼 하나님께로부터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을 보세요, 유다 땅에서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간 결과, 묵시문학가로 바빌론 왕에게 인정을 받았고,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사자굴에 던짐을 받고도 살아나서, 살아계신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세계만방에 분명하게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 왕이, 예언자 다니엘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간절하게 간구함으로써, 야훼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부터는 다윗처럼 다니엘처럼 어느 자리에서건 당한 환경을 핑계하거나 시비하지 말고, 오직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자 하는 담대한 생활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 이웃에게 증거하는 삶을 사는데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이제부터는 말마다 복을 비는 삶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바랍니다. 

본문 27:27 하반절에서 29절을 보면, 참으로 신비한 부분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아들 야곱에게 임했습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축복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늘로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족장 이삭의 입에서 나온 복을 비는 말이 그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되었다는 점을 이 시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7-29절을 보세요, 야곱이 가까이 가서, 아버지 이삭에게 입을 맞추었더니, 이삭이 야곱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서,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기를, "나의 아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주께 복받은 밭의 냄새로구나.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슬을 내려 주시고, 땅을 기름지게 하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가 너에게 넉넉하게 하실 것이다. 여러 민족이 너를 섬기고, 백성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는 너의 친척들을 다스리고, 너의 어머니의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마다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마다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결국 족장 이삭의 기도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지금도 아버지가 자식에게 축복을 해 줍니다. 아마도 그런 전통은 본문 사건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삭처럼 아버지가 자식을 축복해 주어야만 합니다.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복을 빌어주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축복만 축복인가요? 아닙니다, 복을 비는 사람이 누구가 되었든지 가족과 이웃을 위하여 복을 비는 기도는 귀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축복을 받는 아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축복하는 그대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 간에 서로 축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친구지간에도 많이 축복을 하고, 교우들 간에도 서로 축복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남을 위하여 복을 비는 기도 소리가 쉬지 않고 흘러나올 때에,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고, 그 고백을 따라 성령님께서 응답해주시면, 그 즉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웃 사랑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복을 비는 삶을 사는데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우리교회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이 이 나라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에 열심하시기 바랍니다.

브래드 크레독이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한번은 크레독 목사가 목사직을 은퇴하기 전에 휴가를 얻어서, 아내와 함께 아주 깊은 산골 마을에 가서 휴가를 지냈는데, 거기에 있는 조그마한 레스토랑에 가서 앉았는데, 손님이 많지도 않아 몇 사람이 없는데, 거기에 사람됨이 유달리 인자해 보이는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그 자리의 모든 손님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하는 것을보았습니다. 외견상으로만 보아도 덕망이 높아 보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크레독 목사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다기와서 자신을 소개하고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답니다. 

그 고상한 어른이 자신을 크레독 목사에게 소개하는데, “나는 어머니가 결혼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사실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는 모릅니다. 어머니는 창녀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제일 어려웠던 것은 ‘네 아버지가 누구냐?’라고, 남이 물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외톨박이가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을 때도 혼자서 먹고, 학교에서 소풍을 가서도 혼자 돌고. 그렇게 늘 따돌림을 받고 살았습니다.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애 아버지는 누구지?”하고 조롱하는, 그런 형편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어서 교회를 나갔지만, 사람들 만나는 것이 괴로워서, 언제나 예배 시작한 다음에 살그머니 들어가서, 뒤편 구석에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마치 도망을 치듯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 느 날 예배를 마치고, 막 돌아 나오는데, 누가 어깨를 탁 치기에 돌아보니, 교회 목사입니다. 목사님이 손을 딱 잡는데, 뿌리치지를 못했습니다. 목사님이 묻기를, “네 아버지가 누구냐?”, 가장 아픈 데를 찔린 것입니다. “네 아버지가 누구냐?”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소년은 당황을 해서, 그대로 눈물을 쏟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웃으면서 말씀하기를, “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네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겠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하셨답니다. 소년은 그 때부터 용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조롱을 하든, 상관없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기를 여기면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성실히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테네시주의 주지사를 두 번이나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경건하고 겸손한 정치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복을 빌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성장하는 모든 믿음의 후배들을 위하여 간절하게 복을 빌며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살면서 누구의 도움과 사랑도 받지 못해서 한이 맺히고 억울하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억을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기도하시고,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핍박을 받고 사람답지 못하게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복을 빌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사에 보면 황해도 재령 땅에서 아주 고약한 성품을 가지고 남을 못살게 굴면서 괴롭히던 김익두란 사람이 어느 날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은혜를 받은 후에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평양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난 후에 장로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불한당 같은 사람이 변하여 목사가 된 것도 기적인데, 그 후 김익두 목사는 일제 말기에 조산 땅에서 가장 신유의 역사를 많이 일으켜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역사를 감당했고, 조선에서 가장 성령의 역사를 사람의 눈에 보이게 홝실하게 보여준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얼마나 많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는지 모릅니다. 김익두 목사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전도를 했는지, 길을 지나는 개를 향해서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김익두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재령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여러 날 동안 김익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 안에서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그 기도의 힘을 믿고, 재령교회의 영수 한 분이 담대하게 김익두의 집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결과, 불한당 김익두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남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남을 축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거짓없는 사랑을 가지고, 먼저 마음으로 복을 빌어주고, 말로서 복을 빌고, 간절한 기도로 복을 빌어주는 것이 바로 축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이웃에게 아낌없이 축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축복을 따라서 하나님의 복이, 이웃과 세상에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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