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금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요일 4:7-12)

첨부 1


지금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요일 4:7-12)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처한 환경이 아무리 실망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삼키지 못하도록 하늘의 능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환경적인 실망 앞에서 쉽게 넘어지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는 실망과 분노가 파도처럼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내 눈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는 하나님의 믿음의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때일수록 더욱 내 영혼에 생기를 채워야 합니다.  성령을 채워야 합니다.  이 시간 주의 성령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이란 모든 삶의 미완성을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은 소꿉장난과 같은 종교 놀이가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사상도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견해도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동의도 아니고, 감상도 아니고, 명상도 아닙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보람입니다.  믿음은 생기입니다.  믿음은 감격입니다.  믿음은 힘입니다.  그것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없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생기였고, 능력이었습니다.  때때로 살다보면 내 눈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내 삶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전개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그 모든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긴다는 강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상황도 정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믿음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힘차고 당당하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 재단을 찾아오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가장 핵심적인 요구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우리들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허물을 용납해주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다 덮어주십니다.  다 용납해 주십니다.  부모가 자식들의 실수를 감싸안아 주시듯이 감싸주십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알아야 할 그런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다급한 시기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탐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파고들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생에 사랑을 뺀다고 하면 무엇이 남을까?  비극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요,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비극입니다.

남미에 가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혹독한 무더위로 인해서 많은 풀들이 시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루에 한번씩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것도 갑자기 짧은 시간에 와서 금방 흘러가기 때문에 많은 식물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유난히 한 종류의 꽃만은 대단히 싱싱하게 그 삭막한 벌판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이 희귀한 꽃이 싱싱한 이유는 꽃 위에 잎으로 물받이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꽃 스스로가 물받이를 만들어서 바람이 휘몰아 칠 때는 부서지고 넘어지고 어쩔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빨리 복원을 해서 잎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풀들은 비바람에 다 쓰러지고 넘어졌는데 이 꽃만은 빨리 물받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물이 고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 자신이 받아놓은 그 물을 가지고 사막 한 가운데서 싱싱하게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입니다.  우리도 얻어맞습니다.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얻어맞고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의 물받이를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물받이를 만들었습니다.  은혜의 물받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실패와 고난의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그릇들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꿈과 비전을 향하여 달려나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19세기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은 왕정이 무너지고 수많은 기존의 세력들이 무너지면서 자유를 위한 투쟁의 한 세기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는 평등의 투쟁이었습니다.  수많은 투쟁이 일어나면서 평등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21세기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박애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떡만 먹고 못 삽니다.  사랑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격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적인 화장을 다 지워버렸을 때에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인격의 핵은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사랑의 건강한 반응입니다.  어떤 여건이나 환경, 어떤 사람 앞에서도 건강한 사랑의 반응이 나올 때 그 사람은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랑의 반응이 있는 자가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건들을 은혜로 반응하십시오.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소망으로 반응하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사랑으로 반응하고, 내가 아픔을 준 그 일들 앞에 사랑을 반응해 보십시오.  반드시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자기 파멸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들도 자기 파멸의 씨앗이 있습니다.  근심도 있고 걱정도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고 시기도 있습니다.  이런 자기 파멸의 씨앗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몰아내십시오.  이것을 몰아내지 않으면 이것들이 지경을 넓혀갑니다.  정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이고 영적 분별력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갈 때에 내 속에 있는 모든 자기 파멸의 씨앗이 나가고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믿음과 소망으로 가득한 기쁨을 품고 나가면 그 예배는 성공한 것입니다.  반면에 찜찜하게 나가면 이 사람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올 때의 발걸음과 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기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낭비일 뿐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 제일 위대한 자유는 사랑의 자유입니다.  성경에는 사랑과 용서를 같은 언어로 썼습니다.  용서가 사랑이고, 사랑이 용서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습관 중에 가장 좋은 습관은 사랑의 습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습관으로 인격화되어 보십시오.  무엇이 살기가 그렇게 힘이 드십니까?  용서의 습관으로 인격화되어 보십시오.  왜 그렇게 살기가 짜증스럽습니까?  왜 그렇게 고통스럽습니까?  사랑의 습관으로 인격화되어 보십시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쁨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사랑하면서 오는 기쁨입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결국 사랑의 나무가 아닙니까?  사람이 사랑의 나무입니다.  사랑의 나무이기 때문에 정말 살아있는 나무에는 사랑의 꽃이 핍니다.  사랑의 나무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나무에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죽으면 꽃이 핍니까?  열매가 있습니까?  그 생명에 사랑이 살아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비극은 사랑의 고갈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의 단절처럼 어마어마한 슬픔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를 사랑한 자가 내 사랑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어린아이도 계속해서 부모에게 사랑만 해 달라고 하면 얄미워집니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면 그 부모님은 자식이 이야기를 안 해도 사랑합니다.  너무 쉬운 신앙의 공식을 우리는 늘 어린아이처럼 보채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어려울 때일수록 사랑하십시오.  안될 때일수록 더 사랑하십시오.  힘들 때일수록 더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실수와 실패의 중심에서 사랑을 하십시오.  우리는 실패와 실수의 공포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실패와 실수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실패를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이 물입니다.  온 천지가 물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장 귀한 것은 물입니다.  마실 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TV를 켜도, 음악 앨범을 들어도, 영화를 보아도 사랑이라는 주제가 넘쳐흐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아직도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 참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그 당시 헬라문화권 안에서는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에로스라든지 필리아, 스토르게 라는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에 에로스라는 단어는 한 번도 쓰여지지 않습니다.  필리아는 좀 나옵니다.  스토르게도 가끔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싶어하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단어 하나를 끄집어냅니다.  그 단어가 바로 아가페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요한일서에 보면 아가페라는 단어가 동사로 28번, 명사로 18번이나 등장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는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요, 조건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타산이 없는 따지지 않는 사랑이요, 철저하게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을 때 우리는 모두가 이 사랑을 접했습니다.  처음으로 가장 순결하고 고귀한 그런 사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했던 이 사랑은 그냥 정지된 사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뜨겁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유일한 일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은 인격적 관계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이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 가운데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지극히 너무나도 당연히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의 계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온 몸으로 나타내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본문의 9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의 사건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참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진해서 스스로 그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성은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주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우리 모두가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뜨겁게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관계가 저와 여러분에게서 찾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이웃과 세상 속에 보여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성령님이 사랑의 중매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사랑의 중매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맺어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케 하신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 13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케 하시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 가게 한 사랑의 중매자였습니다.  중매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중매를 잘 만나서 일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중매를 잘못 만나서 굉장히 어려운 일들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이 사랑의 중매자가 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습니다.  그 성령님은 지금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성령 충만함의 증거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라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 고백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 사랑은 구체적인 어떤 이웃을 향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일서 4장의 결론을 아십니까?  결론은 마지막 21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제일 잘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이제 그 사랑은 이웃과 형제에게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웃과 형제에게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땅히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수고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믿는다면,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할 때 그들에게 사랑의 수고가 있다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우리가 진솔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은 원하지만 수고라는 과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귀찮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저런 핑개로 사랑의 수고를 외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또 사랑을 표현해야 할 여러 가지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사랑을 표현 할 수 있는 방법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복음을 전해서 내 주변의 이웃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이웃 사랑의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면 수고를 좀 하셔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결과를 볼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먼저 하나님을 크게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닫혀진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을 다시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지 않습니까?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동물입니다.  밥은 육체의 양식이지만 사랑은 내 영혼의 양식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밥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화초가 햇볕을 받지 못하면 시들시들하여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시들시들하다가 죽습니다.

오늘 이 시간 사랑의 큰 능력이 여러분 속에 철철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힘써 보십시오.  우리는 사랑의 영양실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을 해 보고 사랑을 주어야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생명을 낳아 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키워봐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6월 3일 첫째 주일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 생명을 잉태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감동적인 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Sunday School Times라는 교회 학교 교사들을 위한 잡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Miss Thomson 이라는 여자 교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교회에 와서도 교사를 했고, 사회에서는 중학교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학생 가운데 Teddy Stellad라는 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여러 주간 동안 무단 결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왔습니다.  전화를 했지만 집에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분이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에 그냥 제적을 시킬 수가 없어서 학교가 끝난 후에 집으로 찾아 가 보았습니다.  가 보았더니 짐작한 것처럼 가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출하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고, 아버지의 술을 아들도 마시고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날부터 선생님은 학교가 끝나면 이 학생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찾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Teddy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Teddy야, 선생님에게는 소원이 꼭 하나 있어.  선생님이 반에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를 때, Teddy라고 네 이름을 부를 때 네가 교실에서 말이야 '선생님, 나 여기에 왔어요'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선생님의 소원이란다.  학교에 올 수 없겠니?"

드디어 어느 날 Teddy가 교실에 나타났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신바람 나게 학생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러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순서가 되어 'Teddy'라고 불렀더니 Teddy가 뒤에 있다가 겸연쩍은 모습으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나 여기 왔어요.  나 여기 왔어요'  선생님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

그런데 몇 일 계속해서 나오던 Teddy가 또 눈에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다시 찾아갔습니다.  집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야기해주기를 병원에 실려갔다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이 학생에게 뇌 암이 판정되었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선생님의 일과는 또 바뀌었습니다.  학교를 끝나면 이제는 병원에 가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이 학생을 만나고 그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병원을 그쳐서 자기의 집으로 갔습니다.

어느 날 Teddy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이제 저는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제 병은 낫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저는 학교에 갈 수가 없잖아요."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Teddy야, 학교는 네가 올 수 없을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너는 천국에는 꼭 와야 돼.  천국에도 이름을 부른단다.  천국에 가면 예수님이 이름을 부를 때, Teddy야 선생님에게 소원이 있는데 예수님이 이름을 부를 때 네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래.  네가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학교에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이 네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 나 여기 왔어요.'  이렇게 네가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선생님, 나 예수 잘 모르는데요."

그래서 선생님은 그 옆에 앉아서 Teddy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고,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는지.  그리고 그가 흘리신 피가 그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그가 영접될 수 있다는 사실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날 Teddy는 선생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건 전화입니다.
"선생님, 우리 Teddy가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빨리 와 주시겠어요?"

선생님은 일을 서둘러 마무리짓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 집 나갔던 어머니, 형제들, 다 와 있었습니다.  빙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Teddy의 손을 잡았습니다.  갑자기 한 순간 Teddy가 눈을 뜨고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Teddy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 사랑하는 예수님, 나 여기 왔어요.  나 여기 왔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존재는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지도 못하고, 사랑 받지도 못해서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음 때문에 영혼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에 대한 사랑의 수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없이 사랑의 대가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슴도치처럼 가까이 하면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십시다.  우리 주님의 자신을 던져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 보십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말로 시를 읊듯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그런 진실된 사랑을 해 보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수고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랑함으로써 오는 수고의 기쁨을 영혼 깊은 곳에서 경험되어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