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21)

첨부 1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21)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취하는 자세가 세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서서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서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는 보통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다른 하나는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할 때 드리는 기도 자세입니다. 또 하나는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간절함과 겸손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성경 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을 보면 죽는 순간에도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누가복음 22장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죽음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무릎 꿇고 기도함은 간절함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5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로마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노구의 몸은 질병과 고문과 박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 하나도 가누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차가운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드리는 그의 자세와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바울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두 가지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자세는 겸손한 자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부족할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으로서 당시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 신분인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세 약관에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 당당했고 자신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낮아졌습니다.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귀한 복음의 사역자이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인정하면 할수록 더 낮아지고 겸손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자신을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라고 고백합니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수록 겸손해지고 낮아집니다. 그런 겸손한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깨달을 수 있는 다른 하나는 간절함입니다. 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난주에도 잠언서 8장 17절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히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리고 성 안에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라고 소리 쳤습니다. 제자들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제지시킵니다. 

그러자 그는 더 소리를 높여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 라고 소리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해 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너의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의 눈이 떠졌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에는 우리의 간절함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는 기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십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바울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겸손함과 간절함을 배우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바울의 기도하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가 무릎을 꿇은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 가지의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오늘은 그 중에 한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6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의 기도는 이런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능력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바라옵기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는데 많은 시련과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저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셔서 믿음 안에서 이 어려움들을 잘 이기도록 도와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외에도 두 곳에서 속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여기에서 ‘속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라고 표현하면서 겉사람과 속사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사람을 치장하는데 집착하고, 정열을 쏟아 붓습니다. 집이라는 겉치장, 자동차라는 겉치장, 옷이라는 겉치장, 화장이라는 겉치장 여기에 돈과 시간, 관심, 열정을 쏟아 붓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겉사람을 보고 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비주얼을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니 그것에 맞춰 사람들은 겉사람을 가꾸는데 올인합니다. 옷이 멋있고 차가 멋있다고 해서 그 속사람 인격도 멋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속사람이 향기나지는 않습니다. 

겉사람을 치장하는 일에 몰입하는 사람을 보면 정작 속사람을 가꾸는 일에 소홀히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옷을 수 없이 사서 갈아입고 바르고 닦아 반짝거리게 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속사람의 갱신과 변화를 만드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삽니다. 사람의 진정한 멋은 겉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입니다. 속사람을 다이어트하고, 속사람을 꾸미고, 속사람을 화장해야 그 속에서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겉사람이 강건하여지고’ 라고 하지 않고 ‘속사람이 강건하여지고’ 라고 합니다. 참된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그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영이신 성령님’이라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라고 기도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명예, 권력과 재물 등은 겉사람을 세울 수는 있어도 속사람을 강건하게 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세계를 강건하게 세울 수 있는 힘, 능력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만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신실한 교인답게 행동하고 기능적인 교인으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세상적인 힘과 재능을 가지고 기능적인 교인이 되면 일은 하고 교회 직분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과 감동은 없습니다. 기능적인 교인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냄새가 납니다. 자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고 불평합니다. 겉사람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능력과 신실함을 가진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성령님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님이 임하실 때까지 기다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재물을 포기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주님이 죽으시면 저도 그곳에서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너도 예수와 같은 갈릴리 사람이지’라는 말 한 마디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다시 너희 겉사람의 모습으로 나가면 어김없이 또 실패하고 만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지키고 능력 있게 살 게 하는 힘을 공습하시는 성령님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임재 이후에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합니다. 신실한 믿음과 능력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거짓된 세상에서 진실 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이기주의적 세상에서 이타주의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칼 바르트입니다. 바르트 교수가 어느 날 손자가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면서 성령충만이 어떤 상태인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손자에게 말을 가르치는데 ‘예’부터 가르쳤다고 합니다. 한 번은 아이가 싫어서 고개를 흔들면서도 입으로는 ‘예’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여러 번 되풀이한 말이라 싫어도 ‘예’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 때 칼 바르트 교수의 머리 속에 성령충만한 자의 대답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생각이 성령으로 차 있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싫어도 ‘예’하는 고백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일어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성령충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성령으로 강건하게 세우는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겉사람의 욕구가 아닌 속사람의 욕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겉사람은 ‘아니요’라고 말을 해도 속사람이 ‘예’라고 말하는 순종의 길을 걸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