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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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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 (엡 2:1-10)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그 이름과 같이 천지의 창조에 관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창조에 관한 내용은 1장과 2장이 전부이고, 3장에서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꾐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은 성경에서 가장 슬픈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에덴동산에서의 행복한 시기가 너무나 짧게 끝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4장으로 넘어가면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5장에서는 인류의 초기 조상들 곧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선조들의 간략한 이력이 나오고, 6장과 7장에는 노아 시대의 죄악상과 하나님께서 홍수로 인류를 멸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8장부터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해서 새로 번성한 인간들에 의해서 전개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는 아담의 후손이면서 또한 노아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홍수 심판 이후의 사람들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 비해서 다른 점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명이 발전하고, 생활방식이 개선되고, 사회 제도가 바뀌어도 인간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죄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조명 아래서 성경을 읽는다면 “아, 사람은 누구나 죄인일 수밖에 없구나. 나 역시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인 됨을 지적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로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느 성자에게 두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한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너무 큰 죄를 지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성자는 큰 죄를 지었다고 한 여자에게 “그대는 마당에서 큰 돌을 하나 가지고 오시오.” 하고, 또 한 여자에게는 “그대는 마당에서 작은 돌멩이를 한 아름 주워 오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여자가 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성자는 “다시 그 돌을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고 오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큰 돌을 가져온 여자는 금방 그 돌을 제자리에 두고 왔으나 작은 돌멩이들을 가져온 여자는 원래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성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지은 죄도 이와 같습니다. 큰 죄는 쉽게 기억하고 회개하지만, 작은 죄들은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지 죄를 범치 않은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살인이나 간음, 도적질 같은 것은 죄로 생각하나,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탐욕을 품는 것은 심각한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살인, 간음, 도둑질도 죄지만 남을 미워한 것이나 탐욕을 품은 것 역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3장 15절에 이르기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하였고,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지은 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제의 행위로 뿐 아니라 생각으로도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래도 사람은 죄만 짓는 것이 아니고 때로 착한 일도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구제 단체에 기부금도 내고, 사회봉사 활동도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보실 때 겉으로 드러난 선한 행위보다는 그 행위를 있게 만든 동기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만약에 착한 행위를 하되 자기 의로움을 나타내거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선행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선행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성경은 자연인의 실상에 대하여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태는 현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태일 뿐 아니라, 주님을 믿기 전에 저와 성도님들이 처해 있었던 상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르기를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영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 이미 영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태중에 있으면서 우리가 무슨 허물과 죄를 범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는 동안에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죄 가운데서 잉태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아담의 죄얼이 유전되어서 사람은 날 때부터 죄성 곧 타락한 본성을 타고 납니다. 따라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납니다. 이 타고난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일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하루는 낮잠을 자고 나서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웬 여자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시켜서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신하 우리아의 아내인 것을 알고서도 데려다가 동침했습니다. 얼마 후에 밧세바로부터 잉태하였다는 전갈을 받은 다윗은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최일선에 내세워 죽게 했습니다. 간음죄에다 살인죄를 더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내 자기의 죄를 자복하려 하지 않고 태연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습니다. 나단이 다윗을 찾아가서 대화하던 중에 근일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 사건에 관해서 말을 꺼냈습니다. “글세, 성중에 양과 소가 많은 한 부자가 있는데,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기 짐승을 잡지 않고 이웃에 사는 가난한 사람의 하나 뿐인 암양새끼를 빼앗아서 잡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다윗은 크게 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는데,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했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주어야 하리라” 때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솔직히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고 자백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쩌다가 실수로 범죄했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52편에 보니 그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범죄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본질상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꿩 새끼는 산으로 가고 오리 새끼는 물로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 본성에 따라서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그 영이 죽은 상태이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중심으로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온 우주만물에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해와 달과 별들과 산과 바다와 동식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떨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실상을 보십시오. 우상 앞에서 절하고 분향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면  반발하지 않습니까? 귀신 앞에다 상을 차려놓고 절하라 하면 서슴없이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절대 거부합니다. 이는 그들의 영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뿐 아니라, 허물과 죄로 영이 죽은 사람들은 타락한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본문에는 마귀를 일컬어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할까요?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악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이르기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세상의 신이며 또한 세상의 임금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상상속에서 지어낸 한갓 허깨비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마귀는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며 막강한 세력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나 판타지만화, 판타지소설 등을 통해서 도깨비나 귀신, 괴물, 외계인과 같은 따위와 친숙해져 있습니다. 그 내용도 기괴하고 비윤리적이고 끔직한 것 일색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이 악한 영인 마귀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하고픈 대로 사는 것을 가장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욕심 곧 타락한 본성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이 같은 인간의 실상에 관하여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상태를 말해 줍니다. 이전에 주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2장 3절에 이르기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저주받은 상태를 말해 줍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타락한 인간들에 대하여 진노하셔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한 사람들에게 진노하셔서 불과 유황불을 비처럼 내려서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되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으십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손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아울러 지옥에 멸하시는 분이십니다(마 10:28).

흑백이서(黑白二鼠)라는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잃고 넓은 광야를 헤매고 있는데, 난데없이 광폭한 코끼리가 나타나서 뒤쫓아 왔습니다. 이 사람이 놀라 한참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눈앞에 깊은 우물이 하나 보였습니다. 마침 우물 한복판에 칡넝쿨이 드리워져 있는지라 나그네는 급한 김에 그 칡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에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면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발을 벽에 좀 붙일까 해서 옆을 보니 벽 사방으로 독사가 한 마리씩 붙어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물 위를 쳐다보면 코끼리가 내려다보고 있으니 올라갈 수 없고,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고, 옆으로 발을 붙일 수도 없는, 그야말로 죽음이 위아래 사방으로부터 그에게 임하려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빠지면 떨어져서 독사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다시 칡넝쿨을 쳐다보니 설상가상으로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번갈아가면서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래 버틴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칡넝쿨 위에 벌집이 있어서 거기서 꿀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그 같은 정황 중에도 그것을 입에 받아먹으니 그렇게 달고 맛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만 꿀맛을 즐기느라고 죽음의 공포도 잊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우화는 인간이 처해 있는 비참한 운명과 함께, 그것을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망각하고 사는 어리석음을 지적해 줍니다. 그러나 이 우화는 인생의 절망적인 운명이 그저 우연히 주어진 것으로 설정하고 있을 뿐 그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처한 절망적인 운명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며, 또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제시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죄인들에게 살 길을 제시해 줍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이 처해 있는 비극적인 운명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 주고 아울러 그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길은 어떤 것입니까? 에베소서 2장 4절 이하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씀은 죄인들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진노하십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주님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본디 저와 여러분이 달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어린양이 속죄 제물로 바쳐졌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이르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쳐 놓았던 크고 견고한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져서 두 조각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죄가 완전히 청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지난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으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마귀의 지배 아래 살았지만 이제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또한 지난날에는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복된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때로 육신이 약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그것은 죄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된 데 대하여 사도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개인의 공로는 터럭만큼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우리의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이 거듭난 것도 성령님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저 받은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고 귀한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같이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선물을 받은 것일까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기 원하시거든 지난날 우리의 죄인 된 실상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전에 우리가 처했던 소망 없고 비참했던 상태에 비하여 지금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 뿐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 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에 감격하여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며 생명의 주님을 전하는 데 힘쓰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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