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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남편의 도리 (엡 5: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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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도리 (엡 5:25-33)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가정의 달 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5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은 위로 하나님 잘 공경하고, 아래로 부모 공경을 잘하며,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 곧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하고,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택하도록 양육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은이나 금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5월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서 “잘되고 장수하는 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라고 복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5월 셋째 주일은 부부의 날을 앞두고 “아내의 도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시대사조가 변해서 여권이 신장되고 영향력이 강해졌을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아내의 도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경이 말씀하는 “남편의 도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아내에 대한 교훈에 이어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주심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여기서 우리는 남편들에 대하여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이 사랑임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에 관한 주도적인 명령은 사랑입니다. 아내에 관한 주도적인 명령은 복종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러니까 아내는 복종이요, 남편은 사랑입니다. 남편들이 아내와의 관계성을 풀어나가기 위한 해독의 코드는 사랑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이 아내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아내의 머리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편의 다스림은 사랑의 다스림이며, 사랑의 통치여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지도력입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라” 그러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헬라어에는 영어의 ‘Love’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넷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단어는 언제나 ‘아가페’ 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들이 아내를 향해 가지는 사랑은 반드시 이 아가페이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부부간의 사랑에 ‘에로스’의 요소가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을 포함한 이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로틱한 요소에다, 서로 좋아함의 요소를 더하게 되면, 어느 정도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는 오를 수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가 오르기를 원하는 수준은, 그보다 훨씬 고상하고 더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왜 남편에 관한 교훈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말씀합니까?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에 대하여 진정으로 인식할 때만이,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자기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대하시는 태도의 특징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같이”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교회가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교회의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 교리의 위대한 핵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이유 때문이 아니고, 교회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아내의 많은 허물이나 어리석음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애송시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아,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시지요? 다음은 그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나처럼 아내의 자격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도 그리 흔하지는 않으리라.”는 고백입니다. 

<첫째, 나는 성격이 너무 털털하다.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는 코트를 벗고 모자와 목도리를 벗는데, 그것들을 항상 제자리에 단정하게 놓은 적이 없다. 모자는 의자 위에, 코트는 이층 서재에, 그리고 목도리는 어디에 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나는 밖에서 돌아오면 어서 빨리 남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무엇을 어디에 벗어 던지는지도 모르게 계단을 뛰어오르곤 한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생이 자기의 어머니에게 온갖 이야기를 쏟아놓듯이, 하고 싶은 말을 술술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코트도 모자도 벗긴 벗었는데, 어디다가 두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나는 고집이 너무 세다. 이 점이 가장 좋지 않은 것 같다. 결코 깔끔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손만큼은 아주 철저하게 씻는다. 그것이 나 혼자만 그러면 괜찮겠지만 남편에게도 강요를 한다. “손 씻는 것은 청결과 관련된 것이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아니냐?”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아직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나는 미닫이문을 열고나서도 손을 씻고, 머리에 손을 무심코 댔다가도 손을 씻는다. 특히 식사 중에는 밥공기와 젓가락 이외의 물건에 손을 대면 곧 손을 씻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 정도의 결벽증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강요하는 것이다. 게다가 씻은 손은 반드시 깨끗한 수건에 닦아야만 하고, 한 번 닦은 수건은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인 것이다. 이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일 년 내내 그러기 때문에, 나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셋째, 무슨 말이건 지나치게 딱 부러지게 한다.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살면 부담스럽고 피곤하리라는 것까지도 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개운하지 않으니 문제이다. 언젠가 교회의 모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는 남의 흉을 보지 맙시다.”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나, 말을 하는 나의 목소리가 크고 말끝이 하도 또렷해서, 그날 처음 나온 어떤 남자는 그런 나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말까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처럼 나의 말투는 남다르다. 이것은 다소곳해야 할 아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넷째, 건망증이 아주 심하다. 물건을 사러 가서는 물건만 집어 들고, 돈은 치르지 않고 새침한 표정으로 나오곤 한다. 또 어떤 때는 돈만 내고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물건도 그냥 놔두고 나오기가 일쑤이다. 우산, 손목시계, 장갑 등을 잃어버리는 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더욱 곤란한 일은 안면 있는 사람까지도 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꽤 오래 앉아서 이야기 나누던 사람을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라는 생각을 할 때의 쓰라림도 종종 있는 일이다.

다섯째, 예의범절이 철저하지 못하다. 그 이유가 요양 생활을 오래 한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난 본래부터 단정하게 앉아 있지를 못한다. 조금 앉아 있다가는 이내 다리를 쭉 뻗거나 옆으로 누워 버린다. 그것은 아마 서너 살 된 개구쟁이를 생각하면 대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가사 일에 서툴다. 특히 바느질은 전혀 손도 못 댄다. 단추를 달려고 바늘을 들기만 해도 어깨가 결리기 시작하니 말이다. 어린 시절에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그래 가지고 어디 남의 집에 가서 살림살이를 제대로 해낼 수가 있겠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결혼할 무렵에는 전기밥솥, 세탁기가 나왔다. 나의 살림 솜씨는 점수로 따지자면 틀림없이 낙제에 해당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구제불능인 것은 건강이 나쁘다는 점이다. 

13년의 요양 생활을 하고 난 터라, 조금만 무리를 해도 피곤해서 누어야만 한다. 아내로서 이처럼 자격 조건을 갖추지 못하기도 그리 쉽지는 않으리라. 만일 독자들 가운데서 남편이 “당신 같은 사람은...” 하고 아내의 흉을 보려 한다면, 얼른 나를 기억하고 이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자기 부인이 적어도 나보다는 얼마나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내를 사랑하면서 금실 좋게 사는 분도 있어요.”하고 말씀드려 보기 바란다.>

아내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희생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교회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것은, 주님처럼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원리인 것입니다. 아가페의 특징은, 자기를 생각지 않습니다. 희생이 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결혼의 진수는,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과 같습니다. 남편은 반드시 아내가 자신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으로, 자신의 일부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진 아담의 일부인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속해 있는 남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자기 몸의 일부분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의 온 몸이 함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의 일부인 아내를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는 곧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인생인 것입니다. 아내가 고통을 당하면, 남편도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고, 아내가 마음이 아프면 남편의 마음도 아프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절대로 아내를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지식으로 벧후 3:7에서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체질적으로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아내의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그러해야 하듯이, 남편 역시 한 아내만을 사랑하는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잠 5:18-19에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고린도 전서 13장을 패러디 한 글인데, 남자 성도들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 남자겠느냐? 다 남편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선물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한 몸에 받는다 할지라도, 아내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모든 사람에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탁월한 힘을 지녀 세계를 제패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진 모든 것으로 아내를 위해 제일 좋은 옷, 가장 훌륭한 저택을 제공하고, 심지어 가정부를 고용해 주며, 자가용을 사준다 할지라도, 아내의 마음을 헤아려 읽어 주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참된 사랑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당신에게 변화하라고 잔소리 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을 실족시킬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친절하게 당신을 대하겠소. 나는 당신의 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보다 더 나은 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 앞에서 나를 높이거나 자랑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을 빈정거리거나 잘못을 꼬집지 않겠소. 나는 나의 출세나 성공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거나, 나의 욕심을 위해 당신을 착취하지 않겠소. 나는 쉽게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폭발하지 않겠소. 나는 당신의 마음이 상했을 때 같이 아파하며, 당신이 불행할 때 당신을 위로할 것이오. 나는 내가 틀린 것은 언제라도 틀렸다고 인정하며, 결코 거짓을 꾸미지 않겠소. 나는 항상 당신 곁에서 당신과 더불어 살려 하오. 

부부관계의 최선은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내가 이전에는 당신을 위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이 나 중심적이었고, 당신의 필요와 요구를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이제는 그 모든 나의 잘못을 버리기로 결심하였소.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과 부부관계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어떤 남자가 병원에서 온갖 검진을 받은 후 마취에서 막 깨어났습니다. 그의 옆에는 부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떨리는 눈을 뜨면서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당신, 정말 아름답구려!” 아내는 기분이 좋아져서 남편이 잠들 때까지 계속 간호를 했습니다. 한 동안 시간이 지나고 다시 잠에서 깨어난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 화장 좀 해야겠어!” 부인은 놀라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아름답다고 하더니 말이 다르네요?” 남편이 대답을 했습니다. “약 기운이 떨어지고 있소” 여자들의 마음만 잘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남자들도 변덕이 심합니다. 이런 남편들도 있습니다.

문 안의 여자가 낭만이 있으면, 푼수가 되고/문 밖의 여자가 분위기 타면, 소녀가 된다./문 안의 여자와 의견이 틀리면, 도저히 무식하여 못살겠다고 하면서/문 밖의 여자와 이야기 하다 엇갈려도, 똑똑하고 당차다고 생각한다./문 안의 여자가 계절을 타면,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핀잔주면서/문 밖의 여자가 외롭다고 하면, 애처로워 마음이 아리다고 주접까지 떤다./문 안의 여자가 화장하고 있으면, 술집 여자 같다고 무안을 주면서/문 밖의 여자는 진한 화장까지 해도, 세련되고 우아하다면서 칭찬까지 한다./문 안의 여자가 생일이라면, 집구석에서 여편네가 뭔 놈의 생일이냐고 하고/문 밖의 여자가 생일이라고 전화하면, 꽃다발 들고 선물까지 준비하여 허겁지겁 달려가는 오지랖 넓은 남정네들/문 밖의 여자는 순간이지만, 문 안의 여자는 평생인 것을 어찌 모르는가?/남성들이여!/문 안의 여자의 소중함을 알고 서로 아껴가며 사시나요?

우리 교회 어떤 성도가 퍼온 글이라며 제게 보내준 글입니다. <부부 혹 여보와 당신이란 단어의 뜻을 아시나요? ‘여보’는 같을 여, 보배 보, 그래서 “보배와 같이 소중한 사람”이란 뜻이며, ‘당신’은 “당연히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할 사람”이라고 합니다. 최악의 남편과 사는 한 지혜로운 아내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뒤뜰 나무 아래로 이끌었지요. “당신이 술을 마시고 나를 때리며 욕을 할 때마다, 그리고 외도를 했을 때도, 나는 이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았답니다.” 그날 밤, 남편은 아내 몰래 크고 작은 못들이 수없이 박힌 그 나무를 안고 울었지요. 세월이 흐르고 아내가 또 남자를 나무 아래로 이끌었지요. “보세요.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뺏더니 이제는 다 없어졌네요.” 남편이 울면서 말했지요. “못은 없어졌지만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질 않소?” 아내는 그런 남편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 부부가 은혼, 금혼을 넘어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 식을 맞이하기까지는 그저 무심히 세월이 흐른 것이 아니지요. 사랑과 미움의 파도를 타고, 절망과 희망의 계곡을 넘어, 가난과 부요의 벽을 깨치며, 심지어는 그 어렵다는 권태의 늪을 함께 건너온 동지이자 전우라 말할 수 있지요. 오늘 밤, 잠든 남편과 아내의 손을 더듬어 찾아, 그대의 심장위에 살며시 얹어보세요. 삶이 힘겨울 때마다 서로의 마음에 머물러 쉬어가는 아름다운 그대들의 이름은 ‘부부’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러나 남의 남편에게까지 복종하지는 마십시오.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남의 아내까지 사랑하지는 마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해 아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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