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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족도 자라갑니다 (엡 2:20-22) -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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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도 자라갑니다 (엡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영적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며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또한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얀 도화지 위에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린다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그리시겠습니까?

나무? 창문? 지붕? 벽? 사람? 땅바닥? … 

아파트 문화에서 사는 요즘 아이들은 다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릴 때 대부분 ‘지붕’부터 그렸다고 합니다. 지붕부터 그리고, 그 밑에 기둥을 아래로 그려서 세우고, 그 다음 기둥 밑에 옆으로 줄을 그어서 땅을 만들고, 그 다음에야 나무라든지 사람이라든지 동물들을 그렸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민족 정서와 연관을 지어 설명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가난한 시절을 겪으면서, 집이라면 우선 눈이나 비를 피할 지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분은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 지붕을 거는 것이야말로 창조성이 탁월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지붕부터 그리는 것을 기초공사 없이 공중에서부터 시작하니 그렇게 부실공사가 우리나라에 많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던, 기둥부터 그리던, 아니면 다른 그 무엇부터 그리던, 실제적으로 집을 지을 때는 터를 닦는 작업부터 합니다. 집을 짓는 데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영적 가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비유로 건물이라고도 합니다. 
  

I. 건물  

교회를 건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배당이라는 건축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는 것은 교회가 되는 과정이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처럼 지어지는 사람들입니다.

2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0a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교회, 영적 가족은 ‘세우심을 입은 자[ejpoikodomevw/에포이코도메오]’입니다.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말은 ‘건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건물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오늘 말씀은 어떤 건물이 되었느냐는 설명 보다 먼저 어떤 터 위에 세워졌는지 말씀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같은 터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1. 우리는 같은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한마디로 같은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터’는 사도들이 전하여 준 말씀으로 신약성경을 가리키고, ‘선지자들의 터’는 모세, 사무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전하여 준 말씀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기초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같은 터 위에 함께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한 가족으로 세운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 말씀을 듣고 읽고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구약과 신약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요?
2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0b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건물로 비유할 때,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건물의 기초가 되었고, 예수님은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모퉁잇돌은 기준점을 가리킵니다. 모퉁잇돌을 기준으로 옆으로 쌓아 벽을 늘리고 위로 쌓아 벽을 높힙니다. 

2. 우리는 같은 기준점에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성취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 되는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까워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을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교회는 오직 한 분, 예수님에게서 시작합니다.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김진홍목사님의 아침묵상(2012-5-25)에 ‘미국이 흔들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미국이란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미국국민들이 자존심도 상하려니와 자신들의 장래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이에 대한 평가와 대안을 찾자는 모임이 열렸다. 각 분야를 대표할 수 있는 인재들이 모여 긴 시간 토론을 한 결과가 보고서 형식으로 출간되었다. 그 보고서에 담긴 결론인즉 ‘미국이란 거대한 나라가 흔들리게 된 것은 미국의 건국정신인 기독교 정신, 특히 청교도정신을 잃은 데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미국의 정체성을 잃은 것이 치명적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기도문이나 십계명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미국 사회의 도덕성이 흔들리게 되고, 가치 기준이 없어지게 되면서 경제, 정치, 국민생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에 대한 대안은 “미국이 살아날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모두 흔들립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즐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니 재미있어 지르는 탄성과 두려워서 지르는 괴성이 뒤섞여 있습니다. 쾌락과 고통이 함께 버무려져 막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삶의 기준을 잃어버리고 휘청거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기초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세워진 건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초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는 영적 가족입니다. 같은 터, 같은 기준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라는 같은 터 위에, 예수님이라는 같은 기준으로 세워진 건물을 오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II. 성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터 위에 같은 기준으로 세워진 각각의 건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 신자(信者)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 그 이상입니다.

2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1a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예수님을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야 합니다. ‘서로 연결하여’[sunarmologevw/쉬날몰로게오]는 ‘밀접하게 연결시키다’, 즉 ‘치밀하게 조직하다’, ‘밀접하게 함께 연결하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함께 긴밀하게 어우러진 것입니다. 혼자서 교회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서 교회가 됩니다.

1.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생교회 예배당 건물을 보더라도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같은 기초 위에 있지만 각각 기둥도 있고, 벽도 있고, 창문도 있고, 지붕도 있습니다. 또, 기둥도 콘크리트와 철근이 사용되었습니다. 벽은 벽돌과 몰탈 그리고 마감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단단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자재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구조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빈틈없이 엮이지 않으면 건물이 될 수 없습니다. 각 부분이 잘 연결되지 않은 건물은 금방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건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에 기초하여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1890년 후반, 강화도 북단 홍의 마을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 때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름을 짓되 천주교식으로 ‘베네딕토’, ‘프란체스코’, ‘베로니카’처럼 지은 것이 아니고, 성경 이름을 따서 ‘모세’, ‘요한’, ‘마리아’하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작명법을 따라 그것도 ‘돌림자’로 개명을 했습니다. 

그 분들은 “우리가 비록 집안이 다르지만 한 날 한 시에 세례를 받아 한 형제가 되었다. 우리가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믿었으니 모두 한 일(一)자를 돌림으로 하여 이름을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성이야 조상에게 무려 받은 것이기에 바꿀 수 없고, 마지막 자는 한 일(一)자로 통일하고, 가운데 자만 정하면 되었습니다. 이들은 믿을 신(信), 사랑 애(愛), 능력 능(能), 은혜 은(恩), 거룩할 성(聖)과 같은 글자들을 적은 종이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기도한 후 한 사람씩 꺼내 ‘능’자가 뽑히면 ‘능일’, ‘신’자 뽑히면 ‘신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김봉일’, ‘박성일’, ‘최족일’, ‘정천일’, ‘노권일’ 등등으로 새로운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날 세례 받아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권신일의 아들이 권충일이 되었고, 조카는 권혜일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돌림자는 친족 간의 촌수와 항렬을 알려주는 단서여서 윗대의 돌림자를 아랫대에서 쓸 수가 없는데 그 질서가 교회에서 깨졌습니다. 이런 강화교인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검정 개’라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한 교인들의 의식 또한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으로 부자간, 숙질간이라 할지라도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같은 자녀일 뿐이다. 우리는 육적인 질서를 좇기보다는 영적인 질서를 좇기로 했다.”

그 분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의 표현으로 항렬을 뛰어넘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초기 강화 교인들을 따라 우리도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만은 닮아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익명성입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군중 속에 숨어 지내려고 합니다. 이런 시대적 특징이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나 예배당의 대중 속에 숨어 지내려고 합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고 소속감도 없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진 다른 사람들과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교회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교회가 되기 위한 필수 사항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초청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이는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속회와 남․여선교회 그리고 작은 모임에도 참석하여 주시기를 초청합니다. 우리는 같은 예배당 안에 모이는 군중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청합니다. 성도의 교제 자리에 나오십시오. 속회에, 선교회에, 전도대에, 기도모임에, 봉사모임에 격의 없이 참여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회임을 세상이 알게 하여야 합니다.

함께 연결되어 교제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함께 연결되어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2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1b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가는 목적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의 기초에 서서 예수님으로 기준으로 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성전입니다.


2. 우리는 성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분명하게 기억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집으로 사용하는 건물인 예배당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기초로, 예수님으로 기준으로,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강력하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기초로 예수님을 믿고 서로 연결된 사람들인 우리가 바로 성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성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성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전인 이유는 거기에 누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까?
  

III. 거처  

얼마짜리 집이냐 하는 것으로 집의 가치를 재는 경우들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의 가치를 누가 그곳에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집을 짓는 이유는 그 속에 사람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살면 좋은 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들여 호화롭게 지은 집이라도 도둑놈이 살면 ‘도둑놈의 집’이라고 합니다. 검소하게 지어졌더라도 창문으로 웃음이 넘쳐나는 집을 ‘행복한 집’이라고 합니다. 집의 품격은 어떤 재료로 지었느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을 기초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사람들이 함께 연결되어 지어진 성전에는 누가 사시는 것입니까?

22절 말씀입니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서 먼저 주목하려는 것은 ‘거하실 처소[katoikhthvrion/카토이케테리온]’입니다. 거하실 처소는 거처, 누군가 일정하게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누가 자리를 잡고 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전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이 사시는 집입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집이 되어 이 집에 모시고 살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또 다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전입니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지는 예배당이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는 개인적인 고백이 있다고 해도, 또 친교가 잘 이루어지는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자신들끼리 즐거움을 나누는 친교로 그친다면 죽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의 교회인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같은 터 위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모시고 사는 건물이 되었는데 많은 문제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는데 여전히 덜 성숙한 모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직 흔들거리고 덜그럭거리고 삐거덕거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22절 말씀입니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번에는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sunoikodomevw/쉬노이코도메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에서 이 말은 ‘지금 함께 세워져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완성된 집이 아니라 건축 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하여 계속하여 만들어 지고 있는 중입니다.

2.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는 집입니다.

우리는 아직 공사 중입니다. 분명한 설계에 의하여, 정확한 터 위에,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어 집을 이루어 가고 있는데 ‘아직은 공사 중’입니다. 그래서 먼지도 날리고, 때로는 잘못된 부분을 교체 작업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부수고 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집을 짓는데 공사 중이라고 짜증을 내시겠습니까? 오히려 흐뭇해하지 않으십니까!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하면 대부분 이해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도 공사 중입니다. 부부관계도 공사 중입니다. 어버이와 자녀의 관계도 공사 중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너무 공사가 느려서 기다리기가 화가 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이 있는 공사 중입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해 /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해 /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걸 /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해 /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걸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마는 조각 /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해 

김지평이 작사하고, 이진관이 작곡하고 노래한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대중가요입니다. 1980년대 중반의 인기가요였는데 가사가 의미 있어 옮겨보았습니다.

인생은 쓰다가 마는 편지일 수 있고, 그리다 마는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곱게 써가야 하고, 그래도 아름답게 그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고 날마다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것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여전히 지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 중’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문제가 많은 것도 역시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공사 중, 지어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결론을 대신하여 옆에 있는 분과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제가 공사 중입니다.”

“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조그만 더 참아 주십시오.”

“제가 열심히 공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초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가는 중에 있습니다. 아직 공사 중입니다. 결코 공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영혼에 대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십시오. 가족도 자라갑니다.  

성령님으로 도우심으로 완전을 향하여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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