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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세상 만들기(5) : 믿음에 뿌리 내린 세상 (히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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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 만들기(5) : 믿음에 뿌리 내린 세상 (히 11:1-7)

아주 오래전 신학대학원에 다녔을 때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가르치던 교수님 한 분이 강의하시기 전에 유머 하나씩을 이야기해 주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때 그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에 갔답니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욕탕에 몸을 담군 아버지가 "아, 시원하다. 아들아 어서 들어와라"라고 했답니다. 

아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탕을 보며 못내 의심의 눈초리로 아버지를 보면서 “아빠, 정말 시원해?”라고 물었답니다. “그래, 잔말 말고 들어와.”라는 아버지의 말에 탕에 들어간 아들은 들어가자마자 "앗 뜨거!"하며 밖으로 튀어 나왔답니다. 뛰어 나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뭐라고 했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답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불신 풍조를 풍자한 유머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는 여전합니다.
 
에델만 보고서의하면 우리나라 정부 신뢰도 3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언론의 신뢰도 44%에 그쳤고 합니다. 뉴스도 연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근간이 되는 신뢰 수준이 낮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정부나 언론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사회적 자본 실태 종합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공공기관뿐 아니라 불특정 타인에 대한 신뢰도도 낮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0점(불신), ‘대부분의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10점(신뢰)으로 답변하라고 요구했더니 4.8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어제 신문보니까 여대생이 과외선생님 구한다고 갔는데 성폭행당한 것입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사장은 노조를 믿지 못하고, 노조는 사장을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믿지 못합니다. 학생이 스승을 스승이 학생을 믿지 못합니다. 법원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겠다고 증인을 세우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제수씨를 성폭행하려고 했느니, 논문을 표절했느니” 불신 문제가 끊임없이 언론 1면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고가 사회를 경험하는 모두에게 만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은행이라고 신용카드 전자칩으로 바꾸어한다고 두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사기가 많아 거절했습니다. 누가 말할 때 곧이곧대로 믿으면 순진하다고 합니다. 어떤 말을 할 때는 뒤에 숨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불신으로 인하여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불신이 크면 클수록 불신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 많아지게 됩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수돗물 불신에 따른 사회비용 매년 2조 여 원쯤 된다고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불신으로 발생되는 각종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300조에 달한다고 합니다. 1년 국가예산에 맞먹는 비용입니다. 쇠고기 수입문제로 정부의 정책을 불신하여 촛불집회가 열린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 불신비용을 한국경제연구원이 5월부터 8월 15일까지 피해액을 계산해서 내 놓았습니다. 직접 피해액이 1조 574억 원, 사회 불안정으로 발생한 국가적 손실액은 2조 6,938억 원으로, 불신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비용이 총 3조 7천억 원이라고 했습니다. 공교육을 불신하여 발생되는 사교육비가 20조 9천억 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불신에 따른 갈등이나 불신 해소를 위한 견제장치에 필요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우리 국민들이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적 비용도 문제이지만 결코 선진국 사회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선진국과 선진국이 아닌 나라의 차이점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작동하고, 승부가 났을 때 패자가 흔쾌히 승복하는 문화,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자부심이 강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기초적인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나라에서는 본인이 진술하고 서명한 내용은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일을 하게 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오래도록 턱걸이 하면서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 곳곳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불신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UN산하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매년 발표하는 반부패지수(CPI)에서 우리나라는 5.4점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의 선진국 모두 CPI 순위 20위 이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CPI가 최소 7점 이상인 청렴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의 로스타인 교수는“ 좋은 정부의 관건의 사회적 신뢰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사회의 불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선진국으로의 진입은 요원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세상은 불신문제가 해결되어야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부산물로 더욱 가속화된 불신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Trust)’라는 책에서 ‘신뢰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말합니다.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야말로 경제 효율성을 높이고 국가 경쟁력을 높여 나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입니다. 21세기 국가경쟁력의 원천을 신뢰라고 말합니다. 

21세기에는 사회가 산업화만으로 발전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개인적 신뢰도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도가 사회발전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신뢰는 사회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귀중한 자본이라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사회나 시장에서 신뢰가 형성되어 있어서 거래 비용과 분쟁이 줄어들어 저비용, 고효율 경제가 가능한 반면 후진국에서는 사회나 시장에서 신뢰가 형성되어 있지 아니한 관계로 거래비용과 분쟁이 늘어나서 고비용, 저효율 경제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신뢰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이 급격하게 커져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표적인 저 신뢰 국가가 한국과 중국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법제도나 절차상에서는 객관성을 띠고 있어 외형상 신뢰성을 지니고 있지만, 내용을 가만히 들어다 보면 편법과 탈법이 판을 치고 있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을 나타내는 진정한 지표는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종적인 신뢰와, 시민사회에 형성된 국민 상호 간의 횡적인 신뢰를 아우르는 국민 총신뢰지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국회의원을 뽑고 좀 더 좋은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좀 더 좋은 사회가 되려면 어떤 세상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좋은 세상 만들기 다섯 번째로 “믿음에 뿌리 내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함으로 믿음에 뿌리 내린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1-3).

누구나 서로 믿을 수 있는 신뢰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이웃 사랑 바자회를 가졌습니다. 여러분들이 협력해 주었습니다. 김정문 알로에서 알로에 제품을 기증해 주었고, 매실을 손수 담아 기증해 주었고, 각종 음식과 옷 책들을 기증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침 7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어 잘 마쳤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이웃을 돕겠다는 제 말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건이 꼭 필요하지 않는데도 이웃을 돕겠다는 말을 믿기 때문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을 속여 착복하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동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문이 납니다. ‘목사님이 일부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일부는 사적으로 사용한데.’라는 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소문만 있을 뿐이지 아직 사실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때입니다. 이때는 대부분 세 파로 나눠집니다. 첫 째는 불신파입니다. 둘째는 그래도 신뢰파입니다. 셋째는 무관심파입니다. 

우리 성도님 같으면 어느 파에 속하겠습니까? 이것은 평소 저와의 관계를 통해서 대부분 구별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를 알고지낸 사람일 경우 저의 인격을 안 사람들이나 저와 이해관계에 있어 저를 지지하는 쪽이 유익한 사람은 저를 그대로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좋지 않게 보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저를 불신하는 쪽이 유익한 사람은 저를 불신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은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뢰라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신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신뢰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학계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관점을 찾기란 쉽지 않는 것입니다. 신뢰의 정의는 "이를 논의하는 학자의 수만큼"다양하다고 말합니다. 경제학적 관점은 신뢰를 '계산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사회학자들은 신뢰를 '사회에 배태된 사람들 간의 관계적 속성'이나, '사람들이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는 규범이나 제도’를 통해 정의합니다. 심리적 도덕적 정의는 또 다릅니다. 학문적으로 이렇게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뢰란 "타인의 의도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에 기초해서 취약성을 수용하려는 심리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더 어렵지요. 신뢰할 때는 신뢰의 대상이 있습니다. 저와의 사회적 관계에서 대상(저)에 대한 지식이나 신념을 근거로 어떤 대상은 믿고 어떤 대상은 믿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인지적 선택 과정). 그런데 대상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반드시 전제로 하지 않고 신뢰의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은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좋았지만 문제가 불거진 일정시점에서 나타나는 자극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 간의 감정적 연대감 또는 공동체 의식으로 나타나 신뢰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 저것 따지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우도 믿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경우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근원적 관계, 결정적 관계 때문입니다. 자식의 미래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아들을 어떤 경우도 믿어주겠다고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관계를 가지고 불신사회를 신뢰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회는 불신사회입니다. 에덴에서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사는 세상을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품어 주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좋은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고전13:13)”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소망으로 희망이 있고, 사랑으로 풍성한 나라가 사람들이 살만한 좋은 세상입니다. 특히 오늘 11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믿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할 믿음을 오늘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고 현존하도록 만들어 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아직 현실 세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가면 실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천국하고 싶은 구원에 대한 소망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실제적으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믿음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고 나가면 실상으로 나타납니다. 지도에 나타난 대로 서울역이 있다고 믿고 나아가다 보면 실제로 서울역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입니다(히11:27). 수많은 별들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망원경을 통해 보면 볼 수 있습니다. 미세한 미생물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현미경을 통해 보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볼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믿음이란 감각과 이성이 도저히 믿어지지 아니하는 일들을 이해하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업을 해도, 가정생활을 해도, 공부를 해도, 봉사를 해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때도, 슬플 때도, 손해 볼 때도, 실패할 때도, 승리할 때도, 결혼할 때도, 아이를 양육할 때도, 공부할 때도, 취업할 때도, 승진할 때도, 이사할 때도, 죽을 때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우리가 살면 세상을 신뢰가 뿌리내린 좋은 세상이 됩니다.


2.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으로 믿음에 뿌리는 내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5-6). 

그러면 이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가 천국에 간 에녹의 삶을 소개하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우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권력을 얻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천지를 지배하사는 분이십니다. 지식을 얻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있겠지만 믿음이 없이 하는 것은 죄일 뿐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대단한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민족 지도자로서 민족을 해방시킨 지도자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식을 바칠 만한 믿음을 보여준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선교사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윗처럼 민족의 추앙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산 사람입니다. 대단한 기록이 없습니다.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업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을 보십시오. 

창4:16절 이하는 보십시오. 대단한 업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에녹성을 쌓았고(창4:16), 야발은(20절)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 되었고, 유발은(21절) 수금을 치고 퉁소를 부는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고, 두발가인은(22절) 동과 철로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렇다 할만한 재주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300년 동안 그저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산 것입니다. 

창세기 5장 22절을 보십시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고 믿음으로 일상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아버지에게 잘해 준다 해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아저씨라고 하면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고 기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영적인 아버지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셋의 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녹이 아담의 7대 손입니다. 그 때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입니다. 힘센 자가 여인을 차지합니다. 악한 자가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잔인합니다. 교만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십니다. 

둘째는 우리는 심판하시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심판하는 하나님과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 시대에도 인본주의가 팽배합니다. 하나님은 없고 인간끼리 산다는 것입니다. 향락주의가 판을 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좋은 세상에 무슨 심판이 오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심판을 선언합니다. 언젠가는 멸망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노아 홍수의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개인 종말도 역사의 종말도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날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상 받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심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상급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전도자에게는 기쁨의 면류관(살전 12:19), 선한 싸움을 싸운 자에겐 의의면류관(딤후 4:8),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한 자에겐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고난 받고 순교한 자에겐 생명의 면류관(계 2:10),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부정한 자에겐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25)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판하시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면 세상은 참으로 신뢰받는 좋은 세상으로 바뀌어 집니다. 신앙인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어도 억울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영국의 크리스천 문필가인 C.S 루이스는「기독교인 행위론」에서 '역사를 읽어보면 현세를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이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이들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한 후배가 와서 '목사님의 일생에 있어서 마음을 움직이게 한 삶의 동기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나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일생동안 살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신학자 나인홀더 니버 박사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이 심각하게 부도덕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심판대 아래 서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밀물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굶주리고 주를 위하여 고생하고 주를 위하여 죽음까지 당한다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기뻐하시고 큰 상급을 주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렸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도전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전의식으로 믿음에 뿌리는 내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믿음의 삶의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 믿음에 뿌리는 내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2,4,7). 

사람들이 불신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믿어야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분당에 사시는 우리 교회 권사님이 단독 택지 지역에 집을 지었습니다. 법 규정에 따라 3세대만 살 수 있도록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법을 어기고 다세대 주택을 지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법이 풀리게 되었고 결국 권사님은 1억 정도 손해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부를 믿고 법대로 했더니 손해라는 이야기입니다. 신뢰가 이익이고 불신이 손해라는 공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사회 전반에 그런 인식이 쌓이게 되면 이 세상을 불신 사회에서 신뢰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들은 믿음으로 살아서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분이 아벨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예배 문제입니다. 믿는 예배와 불신의 예배입니다. 무엇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기쁘하시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예배냐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내가 복음 예배입니다. 불신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동생을 죽입니다. 이것은 재물의 문제이기보다는 예배드리는 자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카이퍼(R. B. Kuyper)는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 더불어"(with God) "하나님의"(of God) "하나님에게"(unto God)라고 말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실이나 정직으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믿지 않는 자보다 믿는 자가 참으로 복 받는다는 실증을 보여 주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예배만 회복되어도 세상을 참으로 신뢰할 만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배는 삶의 중심에 있습니다. 영국 'The Times'에 의하면 최소한 매주 한 차례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특히 흑인들은 14년이나 더 장수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습니까? 이런 사실을 믿으면 주일날 등산 가는 것보다 예배에 더 치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시고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토저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는 표를 얻기 위해서 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답니다. 그 바쁜 일정에도 자신이 23년 동안을 개근하여 아이들을 가르쳐 왔던 작은 교회에 나가 20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답니다. 7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왔답니다.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은 다음 주일부터 다 당신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부탁했답니다. 

또 노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미래를 어떻게 믿음으로 준비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미래가 믿는 것보다는 불신하고 자기 꾀대로 하면 더 잘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속이고 속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뢰하여야 유익과 편리와 쾌락이 주어진다면 신뢰하지요. 그러나 신뢰했다가는 그것들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가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노아는 어떤 믿음을 가졌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고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말입니다. 듣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은 때는 480세입니다. 살만큼 살았고 많은 경험을 쌓은 때입니다. 배를 만드는 기간은 120년입니다. 홍수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각 카메라가 있습니다. 이 지각 카메라에 잡혀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믿었습니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보지 못한 일"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었습니다. 홍수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120년이란 아주 긴 기간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꼭 자신이 경험하는 것처럼 믿었습니다.

셋째는 자신이 믿는 바를 실제로 행동했습니다.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 하였다" 실행하였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뿐 아니라 그 집을 구원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 하였습니다. 노아 시대는 악한 자가 그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사악함으로 가장 추앙을 받는 사회였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도덕적 규범을 잃어버린 사회였습니다. 마음속의 계획과 생각들이 모두 정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과 기쁨만을 추구하는 사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정도로 죄악이 만연한 불신 사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노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좋은 세상 믿음에 뿌리 내린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가 있었습니다. 1860년 경, 태어날 때는 자신의 생년월일조차 모르는 미천한 흑인 노예로 태어났지만, 그러나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1943년 죽을 때는, 흑인과 백인을 총망라하여 전 미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미국 최초의 위대한 흑인, 미국 제1의 농학자이자 과학자요, 동시에 계몽가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한 때 미국의 남부지방은 면화재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면화는 땅의 질소를 빼앗기에 면화재배가 성하는 만큼 비옥했던 땅은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부의 사람들은 면화재배를 계속하기 위해 계속 새로운 땅을 일구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질소를 잃은 미국 남부의 거의 모든 땅이 못쓰게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남부의 경제가 일대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미국 경제 자체의 위기였습니다. 그때 죠지 워싱톤 카버 박사는 질소를 잃은 황폐한 땅에 땅콩을 심으면 땅콩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땅콩이 땅에 질소를 공급해주어 황폐한 땅이 도리어 비옥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안에 따라 미국 남부는 거대한 땅콩 농장이 되었습니다. 정말 땅콩 수확도 풍년이었고 땅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 남부의 농장마다 거두어들인 거대한 양의 땅콩을 소화할 길이 없었습니다. 농장마다 산더미처럼 쌓인 땅콩으로 인해 농부들은 오히려 살길이 막연해지고 말았습니다. 땅콩 심기를 권유했던 카버 박사로서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신을 받았겠습니까? 

요즈음 세상은 모든 분야에 기업에 적용되는 경영원리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하면 신뢰하지만 불리하면 어떤 말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카버 박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괴로운 마음으로 10월 어느 날 새벽, 산속으로 들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창조주시여! 당신은 무엇을 하시려고 이 우주를 창조하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의 작은 소견으로 너무 큰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네게 알맞는 것을 물어 보아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그는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시려는지 말씀해 달라”고 했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아직도 네가 감당치 못할 큰 것을 묻고 있구나. 그런 쓸데없는 것은 묻지 말고 네가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해보라”고 하셨답니다. 한참 만에 그는 마지막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무엇을 하시려고 땅콩을 심게 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옳지 이제 됐다. 너는 땅콩을 한 줌 들고 실험실로 들어가서 연구를 계속하여라”라고 말씀해 주셨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길로 땅콩을 들고 연구실에 들어간 카버 박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한 결과, 땅콩을 이용하여 마가린, 비누, 요리용 기름, 화장품용 기름, 인조사탕, 인조 밀가루, 땅콩버터, 잉크, 물감, 구두약, 연고, 크림 등 무려 105가지의 음식과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발명해 내었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산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실패할 때도, 병들 때도, 괴로울 때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따라 여기 성경에 나온 믿음의 산 증인들처럼 믿음으로 살면 좋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의 덕분에 미국 남부 주민들은 땅콩 재배로 해마다 돈을 벌었고 미국의 경제가 견실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푼의 로얄티도 받지 않았답니다. 그 모든 지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부의 농부를 구하기 위해 자기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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