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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 (눅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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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 (눅 4:1-4)
 
우리는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믿겠다고 고백을 하면서 성령 충만함에 대해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령 충만을 사모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것에 대한 주저함과 거부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성적인 존재인데, 성령 충만하게 되면 들쑥날쑥한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감정을 함부로 표출하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여겨왔던 저는, 이성적인 인간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초대교회 때에 사람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술 취한 사람들이라고 오해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나도 성령 충만하게 되면 엑스타시(Ecstasy) 즉, 황홀경에 빠져서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건전한 상식은 잃어버리고 오로지 한 곳을 향해서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광신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이러한 염려들이 모두 오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제가 생각했던 것들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자리가 성령 충만의 자리이고, 감성과 의지가 동행하는 자리가 성령 충만한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판단하는 이성은 살아있고, 따뜻함의 감성은 힘을 얻고, 결단하는 의지에는 용기가 주어지는 자리였습니다. 

또한, 나 자신만을 향해서 집중했던 자기 이기성을 탈피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어놓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내’가 더 분명하게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결코 만취 상태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판단력을 상실하는 비이성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열정을 얻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향하는 도전의 자리였습니다. 결국 성령 충만은, 옳은 것과 좋은 것을 향한 삶의 열정이고, 헌신을 돕는 힘이었습니다. 

나를 내려놓을 때 성령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도 성령 충만하셨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누가복음 4:1)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요단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성령 충만함을 받으신 걸까요? 바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인처럼 비천한 자리로 내려가시기로 결정하셨을 바로 그 때였습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기본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정하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기뻐하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셨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내 욕심과 내 생각, 내 꿈, 이 모든 것들을 결코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가진 것들을 붙잡고 있다면 성령님은 내려오실 수가 없습니다. 내 모든 것들을, 나 자신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아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포기와 드림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아를 맡기며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는 순간적인 존재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티끌처럼 작은 내 모습을, 연약하고 부족한 나의 본모습을 깨닫고 하나님께 맡길 때에 성령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다양한 검색 사이트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구글(google)’이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현재 이 구글에서 사원들의 교육을 주도하는 사람인 차드 멍탄(CHADE-MENG TAN)이『너의 내면을 검색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에서 그는, ‘자신감과 자기통제력 연습-자기 동기부여와 공감능력 연습-리더십과 사회성기술 연습’으로 이어지는 사원들의 명상연습 과정을 제시합니다. 주로 불교적인 명상훈련 방법인 이것의 핵심은, 얼마나 자기가 작아질 수 있는지, 반대로 얼마나 자기가 우주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자아를 축소시켜야 모든 것을 쉽게 수용할 수 있고, 자아를 확대시켜야 야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최고의 IT정보 기업에서 기독교의 핵심을 뽑아내어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글에서 행하는 이 훈련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격이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훈련하면 자아를 축소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명상하면 자아를 확장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 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한다 한들 피조물이고 죄인인 인간에게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작은 자요, 큰 자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자아의 축소와 자아의 팽창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아의 축소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믿음의 인물들은 모두가 예외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티끌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들에 핀 백합화처럼 어느 한 시절 반짝이다가 시들어 버리는 존재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작음을 깨닫고 확인하는 것이 곧 자아의 축소입니다. 기독교에서 자아 축소란, 처음부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아의 축소에 기독교의 핵심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아의 축소를 깨닫는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의 하늘과 땅,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게 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복된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주의 중심에 놓으시고 지켜보시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작음과 나의 위대함을 동시에 깨닫는 것,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작아져야 클 수 있고, 연약해야 강해질 수 있다는 이 역설의 비밀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배우게 됩니다. 

신앙이란, 나를 아주 작은 먼지처럼 여기는 겸손의 자리에서부터, 나를 우주와,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확장의 자리에까지 이끌어줍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존재인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함께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역사를 놓치면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작은 존재임을 기억하는 겸손함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출 줄도 알고, 세상에 나아가서 담대하고 용기 있게 부딪칠 줄 아는 능력까지 갖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만 알면 안 됩니다. 작은 줄로만 알면 우리는 늘 부끄럽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위대한 줄로만 알면 우리는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 때에 기도하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향한 사명의 사람이 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 성령 충만함의 역사입니다.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Jim Collins)가 쓴『GOOD TO GREAT(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는 세계 최대의 11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의 리더쉽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총 다섯 등급으로 각 기업가들의 지도력을 나누었는데, 마지막 레벨에 속한 경영자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자기분야에 대한 전문가적인 열정이고, 둘째는 퍼스널 휴밀리티(Personal Humility), 즉 인간적인 겸손함입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기업가들이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업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은 치열하게 하지만 자기 자신은 겸손하게 낮추는 인물들이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또한 그들은 개인의 자아 확대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속한 조직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이 구현되기를 열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가 이끄는 공동체는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성장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동일한 저자가 쓴『How The Might Fall(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들이 실패하는 핵심은 성공으로 인한 자만심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만심이 과도한 탐욕, 즉 자아의 확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을 헌신하는 것이 곧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기 전에 낮은 자의 자리에 내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으로 내려가셨고, 그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은 새로운 공생애를 시작하게 됩니다. 공생애가 무엇입니까? ‘나’라고 하는 차원에서 ‘우리’라고 하는 차원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넘어서는 ‘우리’라는 공동체가 예수님에게 새롭게 열려졌다는 의미입니다. 고통 받는 인간을 살리는 것, 억압받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는 사명이 예수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나만을 생각하다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를 생각할 때 사명이 생기게 됩니다. 그게 바로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내 욕심만을 채우고 내가 얼마나 잘났는가를 세상에 나타내려고 하는 이기적인 인간성에서부터 탈피해서 공동체를 위해 내 삶을 헌신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명의 사람으로 변모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첫 인간 때문에 받았던 인간의 문제들, 즉 인간의 죄악과 타락, 미혹 받고 억눌려 있는 삶의 모든 것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인간의 아픔을 깨달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에게 공동체의 아픔을, 인간의 슬픔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당하고 있는 억눌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마음으로부터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지고 있는 짐이 얼마나 무거우냐. 얼마나 괴로우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와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동체의 아픔을 깨닫게 하기 위한 성령님의 방법은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성령 충만한 예수님이 성령님께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마가복음에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쫓았다’라고 말합니다. 

이 ‘내쫓았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실 때에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광야행은 성령님께서 주도하신 것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동안 죄악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똑똑히 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의 문제와 고통에의 참여였습니다. 그리고 이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첫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실패했던 것을 극복하고 되돌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첫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곳, 부족할 것 없는 아름다움이 있던 곳. 어디 그 뿐입니까?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것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탄이 와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그들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자기욕심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본래적 뜻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에덴동산과는 전혀 다른, 아무것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벌판 가운데에서 홀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경험하시고 모든 유혹들을 이겨내셨습니다. 사탄이 주는 유혹을 넘어설 수 있어야,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나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저보다 더 큰 하나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저의 이 작은 자아를 큰 자이신 하나님께 넘기겠습니다. 저의 연약함, 부족함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얼마나 죄인인지 또한 압니다.”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작은 자가 아니라 큰 자다. 너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너는 할 수 없으나 내가 너와 함께 너를 돕겠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에게 담대함과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고 하는 좁은 사고의 틀이 ‘우리’라는 넓은 가치관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명감이 우리 안에 샘솟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축소하고 확대하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주님 앞에 머리 숙이는 작아짐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세계를 향해 나 자신을 열어두는 우주적 확장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을 쉴 때도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듯이 숨을 들이쉴 때, ‘하나님 내가 연약합니다. 

성령님이시어 내게 오시옵소서’ 하고, 숨을 뿜을 때 ‘성령님이시어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게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이러한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빼고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우리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공동체의 어려움과 아픔, 공동체의 슬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명자가 되는 시작인 것입니다. 

‘나’에서부터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가 새롭게 열려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성령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 나를 활짝 열어 놓으셔서 성령 충만의 역사를 모두 경험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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