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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멀리 보라! (롬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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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라!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사도 바울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옥중서신'

그는 복음을 전하는데도 전력을 다했지만, 감옥에 있으면서 복음을 기록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고, 감옥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오늘 빌립보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볼까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빌립보는, 성경에서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행 16:12)이라고 소개되는 곳으로 서쪽으로는 스트림몬 강과 동쪽으로는 네스토스 강을 경계로 하는 마게도냐 동쪽에 소재합니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였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16장 16-34절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의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히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인이 얼마나 점을 잘 쳤는지 주인에게 돈벌이를 해주었는데, 사도 바울이 귀신을 쫓아냄으로 인해 돈을 못 벌게 된 것이죠.

그런데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합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던 곳이죠.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여졌습니다.


고난당할 때. . .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위대한 것은 “십자가”를 수치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고, 승리와 사랑의 상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인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하면서 “핍박하는 사람”에서 “핍박받는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삶에는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의 삶에 놀라운 열정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상상하며 묵상해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해보니까,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빌립보의 감옥에서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마나 억울하게 고난을 겪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16장 16-18절을 보세요.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우리가 고난 겪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난을 받아야 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마땅한 고난보다는 억울한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의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많습니다. 

나 하나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이,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 때문에 감내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을, 그렇게 할 수 없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우리에게 가슴 벅차오르는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사명자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보기 때문입니다. “장차 드러나게 될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 당하는 고통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보면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소망”입니다. 

한 번도 그의 사역에서 고난이 떠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가 소명을 받은 이후에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린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불림을 받았지만, 그의 ‘사도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뜨거웠으나 환경은 차가웠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믿고 변화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참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곳에도 하나님은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그를 감옥에 가둬두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때를 지나며 실족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견뎌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입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참으로 신기하게 환난을 겪으면 당할수록 단단해졌고 소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소망은 환난이나 연단이라는 말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걱정할 일이 없는데 소망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수없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픔”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그의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픈 마음 때문에 이 세으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아픔이 우리의 소망과 하나님의 목적을 앞서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로 끝나는 고난이 있고, 영광으로 가는 고난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좌절케 하는 고난은 패배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멀리 보며 인내하는 고난은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보면 보이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은 믿음의 경험을 통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하신 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공평과 은혜는 현실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참 멋지지 않습니까?
영광은 장차 받는 것이지 지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속담에 “누군가 침을 뱉어도 닦지 말라, 조금 있으면 마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126편 5-6절의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한 달이면 씨를 심고 먹을 수 있는 배추와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열매를 딸 수 있는 사과가 같은 가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한해 우리 교회 신천 장로님들이 힘든 시간을 지났습니다. 교단과의 관계에서 진급이 1년 동안 유보된 것이죠.
제가 장로님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교단을 통해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1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1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제가 목회 초년병시절, 은혜를 받고 “목회”를 해야겠다고 소명을 받았을 때, 목사로서 진급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5년을 목사로서 진급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평생 목회하는데 5년 먼저 진급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제가 지금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왜 불법으로 진급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고난도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믿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옥에서. . .

사도 바울의 주옥같은 믿음의 고백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감옥은 사방이 막힌 곳이고, 감옥은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믿음이 증명됩니다. 
감옥에서 기적을 체험합니다. 
감옥에 있으나, 감옥 너머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욥을 가리켜 왜 우리가 “의인”이라고 합니까?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난 가운데서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욥기 23장 8-10절입니다.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감옥 밖에서 밖을 보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감옥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편 121편 1-2절을 보세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긴 것이 위대합니다. 
고난을 겪되, 고난을 왜 겪는지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누구와 함께 고난 겪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빛나는 것은 로마서 8장 26-28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도우시나니”라는 말인데, 본래 원어의 뜻을 보면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딱 두 번 나옵니다. 다른 하나는 누가복음 10장 40절에서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여기에서의 의미는 “함께 담당한다.” “맞잡아 준다.”라는 뜻이지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우리의 고난 중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입니다.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 사방이 보이지 않는 감옥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도움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가 성령을 받았을 때 일어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절망 가운데서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만이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우리가 스스로 문을 닫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들, 불이 혀같이 갈라지고 방언을 하는 것뿐이 아니라 그들이 닫아 놓았던 문을 열고, 두려움을 제치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있어도 혼자였습니다.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그들을 돕는, 그들을 맞잡아 주시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이 영어로 'Acts'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7-8절을 보세요.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을 회고하면서 보니까, 한 번만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싸우며 달려온 것이죠.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의 D-Day라는 말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둔 결전의 날 "Decision-Day"라는 말입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하므로 전쟁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냈기 때문에 또 다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V-Day, 즉 "Victory-Day"입니다. 
결전의 날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결심을 위해 끝까지 싸워 쟁취한 것이 승리의 날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끝까지 싸우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것은 D-Day에서 V-Day를 향해 가는 중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이에는 끊임없는 사단의 저항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불림을 받은 순간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이제 V-Day를 향해 기꺼이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의 사모인 케이 워렌은 [위험한 순종]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표지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yes'라고 했을 때 일어나는 일은 ‘위험한 순종’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순종은 절대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 순종한다는 것은 자기 혼자 독단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며, 내 능력에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케이 워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어릴 때 그녀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우등생이나 장학생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어서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긴 했지만, 피아노 역시 보통 실력을 넘지 못했다. 사람들한테 못생겼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미모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가 결혼한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닌가! 남편 릭 워렌은 뭐든지 잘하는 팔방미인이었다. 
“하나님 정말 크게 실수하신 거예요, 하필이면 왜 저를 요거밖에 안 되는 인간으로 만드셨어요? 우리 남편에게 좀 더 예쁘고 재능 있고 똑똑한 사모를 허락하시지. 저는 아무리 해도 안 돼요.” 하고 울먹일 때, 라디오에서 대니벨 홀의 “평범한 사람들”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나님은 평범하지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게 없다고 늘 불평하고 투정부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만드신 당신께 실수했다고 비난했던 것도 용서해 주세요. 이제부터는 저를 평범하게 만들어 주신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 자신을 당신께 바치며 순종하겠습니다.”
그때 드린 짧고 정직한 기도가 알고 보니 그녀의 생애에 가장 위험천만(?)한 순종의 기도였음을 어찌 알았으랴."

순종하는 믿음은 절대 무모한 믿음이 아니다. 언젠가 모든 그림은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길 기다렸다가 하나님께 “예”라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순히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더 핑크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대할 때 이 성경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틀림없이 고난에 끄떡도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일상생활 중에 일어나는 별것 아닌 귀찮은 일들에 익숙해진 사람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성령의 인도로 기록된 것이며 가장 가혹한 고통에 시달린 사람이 기록한 것이다. 고난 후의 영광은 상상이 아닌 확신이다.

제가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조금 천천히 하세요. 쉽게 하세요.”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속에 있는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 교회 목사로 불림을 받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림을 받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파구스 10호 점을 여는 날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처음 파구스를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 그래서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 일을 감당하는 장로님의 눈물, 아니 그 눈물을 지켜보는 권사님의 아픔이 더욱 컸습니다. 왜 그런 비난과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게 하셨던 것은,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사실을 두렵습니다. 꿈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고, 그 꿈을 가로막는 어려움이 하나님의 계획을 앞서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이 영광 앞에 서는 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 한, ‘고난’이 ‘영광’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힘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영광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계획을 앞서 가시는 하나님의 영광 말입니다. 

지난 연말을 앞두고 석 달 가까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아파서 하는 설교는 가슴에 확 와 닿습니다.”
지난해 말 아마도 처음으로 출석 성도가 만 명을 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인들이 모인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아파서 의자에 앉아 설교했다는 것 말고는. 
정말 살다 보면 고난과 아픔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고난 속에서, 캄캄한 감옥 속에서 부르는 찬양이 빛나고,
절망 가운데서 의지하는 믿음이 확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 속에서 멀리 바라보는 영광. 
그것이 힘이고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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