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문제 해결의 특별한 방법 (마 14:22-33)

첨부 1


문제 해결의 특별한 방법 (마 14:22-33)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하면 평탄하고 순탄한 길만 놓인다는 생각입니다. 성경도 그런 약속을 여러 군데서 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구 풍랑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회피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명령에 순종하여 건너편으로 가다가 당한 고난입니다. 또 제자들은 주님 몰래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셨기에 순종하여 건너편으로 배를 저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처럼 광풍과 파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따라 순종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은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여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의 앞길은 이루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난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구약의 인물들 그랬습니다. 

신약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같은 신약의 인물들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사명의 길을 갔지만 도중에 수많은 장애와 역경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이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반대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생긴 풍랑 속에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이는 질병의 풍랑, 어떤이는 재물의 풍랑, 어떤이는 자식의 풍랑, 그리고 어떤이는 인간관계 갈등의 풍랑을 겪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풍랑 속에 있을 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은 결코 모른다고 하거나 방치하거나 구경하고 계시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목적도 우리는 모를 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세 가지를 하나님께 질문해 봐야 합니다. 
  

1. 풍랑의 원인이 무엇인가? 

본문의 풍랑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 풍랑을 바다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으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 얻고자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기도하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산기도와 바다의 풍랑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그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음도 알고도 밤 4경쯤, 오늘 우리 시간으로 새벽녘에서야 제자들에게 찾아가셨나요? 

두가지 이유입니다.   

1) 제자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배에 오르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세요.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주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에 타게 하셨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일종의 격리조치입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을 무리와 떨어지게 하신 것일까요?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여러분이 그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중 하나라고 해봅시다.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와~ 이양반이 누구신가? 이양반만 잘 따라 다니면 먹고 사는 것은 끝났겠구나”. 
“야~ 이제 우리 앞길은 대로가 열렸구나” 

그 자리에 있던 오천 명의 군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면서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상황 속에 제자들은 엄청난 흥분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헛된 꿈과 야망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선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뭘까요?

우리 주님의 산기도 제목은 아마도 “제자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알게 하옵소서” 쉽게 표현하자면 “주제 파악을 할 줄 알게 아옵소서”였을 것입니다. 
  

2) 주님을 올바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순히 먹을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떡임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게 하기 위해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들과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여 하겠다는 생각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군중들과 제자들을 떼에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결국 바다의 전문가들인 어부들이 늘 생계를 그 바다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엄밀히 말하면 풍랑은 주님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시 예상치 못한 풍랑 속에서 고난을 당하는 분들이 없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풍랑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새롭게 알게 될 것입니다. 

풍랑의 원인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풍랑의 원인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함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작은 문제라도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여기고 무시하지 마세요.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속히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 해결자인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주님이라 합니까? 그분이 주인님이십니다. 
입으로만 주인님이 아닙니다. 삶속에서 진정으로 주인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풍랑의 원인입니다. 

33절을 보세요.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할렐루야! 
  

2. 주님은 어떻게 우리의 풍랑을 해결하시나요?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만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1)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풍랑 속에 고난당하는 그들에게 물위로 걸어오셨습니다. 
25절을 보세요.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간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이 아들임을 믿게 하기위해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초능력적인 방법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은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다 위를 걷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되 우리 고정관념이나 상식을 초월하여 찾아오시는 분임을 교훈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풍랑 속에서 자기들을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들의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 생각을 초월하고 찾아오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체험을 해보셨나요? 

여러분의 상식과 경험에 매여서 평생을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도 우리가 기대하는 그 방법 이외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한계상황에 제한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생각에 꼼짝없이 매여 사는 제자들에게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안 되지만 주님은 됩니다.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찾아오셔서 한순간에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2)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 것을 선포하십니다.

27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제자들이 엄청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공포에 떨었나요? 그 바다는 그들의 생활터전입니다. 어찌 보면 그 바다에서는 제자들이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밤새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이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는 걷게 해 달리고 소리치고는 바다위로 뛰어 내립니다. 그리고는 걸었습니다. 그런데 바람과 바다를 쳐다보고는 두려움과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왜 두렵지요? 왜 의심이 생기지요? 이유는 예수님보다 환경을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의심이 물밀듯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고 문제 속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왜 풍랑이 두렵지요? 생명을 잃을까 두려운 것이지요. 죽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이 의심이 생기니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그렇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죽어도 하나님 뜻이고 살아도 하나님 뜻입니다. 
  

3) 의심했으나 손잡아 구원해 주십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용감하게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주님이 “오라”하는 말을 믿고 뛰어 내려 물위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물을 바라보고 바람을 보고는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자 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때 소리를 지릅니다. 

30절 이하를 보세요.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뭘 의심했을까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주님의 약속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것일까요? 
어떻든 베드로는 의심했고 그 결과는 물속에 빠져드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심하지 않나요?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있나요?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구주인 것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러면 기적은 내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진 마세요. 의심하는 베드로를 주님은 그의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음이 부족한 것은 책망 받을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들어 쓰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 베드로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어 쓰셨던 주님,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연약한 믿음의 우리도 놀랍게 만들어 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 베드로를 바다에 빠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손을 잡아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과 손잡고 올라가니 모든 문제가 되었습니다. 

문제의 해결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우리 직장에, 우리 교회에 들어오시면 모든 문제는 한순간에 해결됩니다. 할렐루야! 

찬송가 388장 1절입니다. 

♬비바람이 칠때와 물결높이 일때에 사랑많은 우리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지나가도록 나를 숨겨주시고 안식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하소서
주님만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주님만이 우리 인생사의 해결자입니다. 아멘? 
  

3.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위로 걷게 하셨나요? 

1)주님 의지하며 도전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결국 베드로는 주님의 허락 속에 물위를 걷습니다. 

도전하는 신앙에 대한 놀라운 응답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들은 누구나 어떤 고정관념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할 수 없지. 내 운명이지. 세상이 본래 그런 것이지’하는 고정관념에 우리의 인생이 꽉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나름대로 어떤 배 안에 갇혀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망망한 인생의 바다에 “돈”이라는 배 안에 갇혀서 바다를 건너가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라는 배, 어떤 사람은 “권력”의 배를 타고 그 배가 없으면 인생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 안에서 나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배 안에서 나오면 죽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생의 파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을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2) 믿고 순종하면 기적의 인생이 된다고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지 않고 바다 위를 저벅저벅 걸어오시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만이 외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9절을 보세요.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주님은 그에게 너는 안 돼, 너는 못해, 하지 않고 오라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믿음으로 배 안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도 바다를 걷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만 바라보고 약속만 의지하면 기적은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이 하나님임의 아들임을 온전히 믿고 마16장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그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처럼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언제까지나 그 좁은 배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을 것입니까? 돈이라는 배, 권력이라는 배, 자식이라는 배, 명예라는 배 안에 갇혀서 이것이 아니면 죽는다고 언제까지 그것의 노예가 되어 갇혀 있으려고 하십니까?  

우리들도 그 옛날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환경의 배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저 앞에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외치고 뛰어 내려야 합니다. 제발 “나는 안 돼” “나는 못해” “나는 별수 없는 사람이야” 라는 사단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여기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 혹시 “이렇게 되는대로 살다가 죽지” 라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제 베드로처럼 바다로 뛰어내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앞에 주님이 서계십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용감하게 바다로 뛰어들을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거친 풍랑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그 문제에 대한 내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내 힘으로 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방법으로입니까? 

지금도 주님은 내게 찾아오셔서 해결해 주려고 아십니다. 그러면서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죽도록 노만 젖고 있습니다. 노 젖는 것을 포기하세요. 그리고 주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그 주님을 여러분 속에 모셔 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풍랑은 한순간에 해결됩니다. (최일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