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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삶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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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삶 (눅 17:11-19)

이 시간의 말씀의 주제는 ‘감사’입니다. 본문말씀은 지금 수요저녁예배에 ‘예수님의 비유 이적강해’에서 공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다시 이 말씀을 강론하는 것은 ‘감사’라는 주제가 우리의 삶에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이는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어서 중요한 것이며, 또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윌리엄 로우’라는 분은 ‘엄숙한 부르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외식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렵게 살지만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사람은 주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신앙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큰 은혜를 더하십니다. 

시편 50:14-15절에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고, 23절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삶이 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사마리아 지역의 한 촌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갑자기 저만치 멀리서 한 무리가 예수님을 부르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은 열 명이나 되는 나병환자들이었으며, 예수님께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가지도 않으셨고, 다른 어떤 것도 묻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하시기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들도 역시 아무 것도 더 묻지도 요구하지 않고 즉시 제사장이 있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나병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알았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오던 길로 돌아섰습니다. 다시 그 마을로 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감사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혼자 말처럼 탄식하시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날 천하를 다 얻은 듯 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난치병이자 저주의 병인 나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영혼의 구원까지도 얻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우리도 삶에서 누릴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의 능력의 삶을 원하면 예수님을 알고 믿고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소문을 들었든지 아니면 직접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들었든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알지만 믿지를 못하면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기도 하고 믿기도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유익도 없고, 하나님의 어떤 능력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당시의 나병환자들은 일반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가 없었고, 가까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게 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믿고 갔던 것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의 규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판결하는 권한이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나병이 나았을 때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정결하게 되었다.’는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너희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던 그 시간에는 나병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곧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멀리 가지 않아서 자신들의 병이 나았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적어도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고, 이 자리에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혹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거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진실한 믿음으로 이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진실함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예레미야 17:10절에서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진실하게 이 세 가지(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실천하는 것)를 갖추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실 첫 단계가 준비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능력의 삶을 원하면 부르짖고 순종하고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삶을 이루기 위한 두 번째 세 가지는 간구와 순종과 감사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왔을 뿐만 아니라 비록 멀리서지만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간구하는 자세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간구를 예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 응답으로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나병환자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순종한 결과가 병이 나은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들의 병이 나은 것은 믿음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아 육신이 회복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육신의 회복으로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병이 고쳐진 사실에만 기뻐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경험했지만 영의 삶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병에서는 벗어났지만 주님 없는 삶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사람, 유대인들에게는 저속하고 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치부되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고침 받았다는 것을 안 순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돌아서서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에게는 제사장에게 가기보다는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순간이 영의 삶이 회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뿐만 아니라 시편 50:23절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한 날에 육신과 영의 삶이 모두 회복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한 보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적을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도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방법, 자신의 경험,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삽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사야 30:1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이 주님 안에서 형통하고 성공적이기를 원한다면 이 여섯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 그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그리고 그 믿음대로 간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시편 91:14-1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육신과 영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육신의 본능만 따라가는지, 아니면 영의 본능에 충실한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가까이 있으며 내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내 삶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치유로 만족한 아홉 명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육신의 삶과 영의 생명을 모두 얻은 한 명이 되고 싶습니까?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지팡이(clutch)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지팡이처럼 필요할 때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듯 예수님을 의지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지팡이를 버리듯 예수님을 등하시합니다. 이들은 한 가지만 아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십시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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