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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로 중요한 신앙교육 (삼상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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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중요한 신앙교육 (삼상 2:12-18)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 (중략) ...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사무엘상 2장 12-18절)

사무엘상 2장을 쭉 읽어 가다보면 재밌는 구도 하나가 발견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 2장 속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한나의 아들 사무엘을 계속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말씀 바로 앞 11절에는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그리고 12절부터 17절까지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행악길이 쭉 열거 되지 않습니까? 그런 열거 바로 다음 구절 18절에 또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그리고 21절 하반절에는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이렇게 기록한 후에 바로 그 다음 22절부터 25절까지 엘리가 그 아들들을 책망하는 내용들이 나오고 바로 그 다음 26절에는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다시 27절부터 36절까지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이 선고되고 3장 1절에서 또 사무엘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구도 같습니다. 계속 홉니와 비느하스의 하나님 앞에서의 옳지 못한 모습과 그것으로 인한 여러 어려운 시험거리들을 기록하고 그 다음에 한나의 아들 사무엘을 기록하고 또 홉니와 비느하스를 기록하고 또 사무엘을 대조하고 이것이 오늘 2장에서의 구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문, 특히 두 자녀의 자녀들을 비교하면서 오늘 우리 가정의 자녀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선명하게 흑을 보여주고 백을 보여주면서 대조하는 것처럼 그렇게 2장의 구도가 진행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정 중에서 한 가정은 자녀를 잘 길러서 무섭게 비상하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한 가정은 마치 미끄럼틀 위에서 미끄러져 몰락하는 것처럼 그런 그림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미끄럼틀 위에 서있는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보니까 아버지는 40년 동안 사사 직분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해서 당대에 존경받고 영적인 지도자로서 세움을 받았는데 자녀 교육을 실패해서 그 인생의 마지막이 비참해지는 모습이 성경에 묘사되고 또 무명의 인물 한나는 그 아름다운 자녀를 잘 길러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오늘 이런 부분에서 특별히 우리가 어떤 것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고 어떤 부분을 반성해야 되는지를 깊이 돌아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엘리 제사장 가정을 좀 살펴보고 그 가정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리의 가정

첫째로 엘리 가정의 문제점은 “신앙 교육의 부재와 예배의 소홀”이었습니다. 

본인은 잘 믿었는지 몰라도 자녀들에게는 영적으로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고 또 예배를 소홀히 해서 엘리 제사장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장 12절에서 기가 막힌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이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당대에 그런 우뚝 선 신앙 지도자 가정에서 난 자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모른다는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대한 어떤 성경 지식이 없다는 뜻이겠습니까? “알지 못하더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도도 못하는데 애나 많이 낳자.” 그런데 이 본문을 보니까 그것이 순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를 낳는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많이 낳아서 엘리 가정처럼 방치해 놓고 예배의 소중함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잘 키워야 됩니다.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어릴 때부터 여호와의 제사, 하나님 앞에 나와 드리는 경건한 예배.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를 못해서, 그런 신앙 교육의 예배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것에 실패해서 이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다고 진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엘리 가정의 문제점은 아버지의 권위 상실입니다. 

그 두 아들이 얼마나 개망나니 같이 행동했는지 그랬는지 소문이 퍼지고 퍼져 자기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23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니들 소문이 얼마나 나쁜지 아느냐’고 야단치고 그렇게 하지말라고 하니까 그 두 아들이 반응하기를 25절에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 하였으니” 엘리 제사장의 말에 자녀들을 향한 권위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일시적으로 잘못 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청소년 사역을 많이 했지만 청소년 시기, 사춘기 때에 엇나가고 옆길로 가고 부모 눈에 눈물 많이 흐르게 하는 자식들 가운데 나중에 진짜 그렇지 않은 애들보다 더 잘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 아이들이 옆길로 나가고 엉뚱한 길로 나가고 일탈 행위를 할 때 그 때 중요한 것은 부모의 권위입니다.

부모의 영적 권위, 사회적 권위, 말의 권위.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자꾸 그 부모를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알고 훈계를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나가도 다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할 때 제일 비극적인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의 권위가 다 상실된 가정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습니다. 부모 앞에서 자해 행위를 합니다. 머리를 벽에 박고 식칼을 한번 휘두르고 나면 부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애들이 이미 알고 부모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가정은 정말 불행한 가정입니다. 

오늘날 신앙 생활하는 성도님들 가정에 부모님의 영적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비극 중에 하나는 가장들의 권위가 상실되고 있고 그 책임 중에 주부들, 어머니들이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 자녀들 앞에서 어머니가 자꾸 그 남편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들이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일입니다. 저는 오늘 아내들이 회개하는 은혜가 있길바랍니다. 물론 남편들도 회개할 것이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아내들이 아이들 앞에서 남편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 있었다면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아내가 먼저 가장의 권위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그 미운 남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남편의 권위가 세워지면 그 혜택을 자녀들이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학교가 붕괴되어서 선생님들이 지금 권위가 다 상실된 오늘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선생님들도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나쁜 해악은 우리 아이들이 가장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존경할 수 없는 학교에서 가장 손해보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의도적으로 선생님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저희 가정은 지금까지 아이들 듣는데서 선생님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이로 치면 저보다 훨씬 어리고 목회경력, 교육경력으로 치면 솔직히 제가 가르쳐 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지만 한 번도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최고다. 너의 선생님이 제일 좋은 분이다." 그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권위가 상실된 시대입니다. 권위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권위가 회복이 되면 그 가정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온 교회적으로, 또 나라적으로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한 분이 당선되고 나서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고 할 때에 우리는 참 기뻤습니다. 드디어 이 나라의 잘못된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 시대와 민족 앞에 한 획을 긋는 큰 일을 할것이라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마음 아픈 것이 대통령 자신의 권위까지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큰 업적을 남겼지만 자신의 권위까지 상실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권위가 없어지니까 온 신문, 언론, 온 사람들의 노리개 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권위가 없으니까 나라가 위기를 만날 때 묵직하게 한 마디 해도 거기에 굴복하고 순복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나라가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결국은 그 해악을 백성들이 다 받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이 예수 믿게 해주시고, 그래서 그에게 권위주의는 사라져야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세워지는 이런 일이 있도록. 너무 이 일이 늦었다하면 다음 대통령은 정말 권위주의는 내려놓지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큰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이 나라를 통솔하는 은혜를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는 타 교회에서 전입해 온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 성도들이 말하길 예전 교회를 돌아보면, 목사님이 영적 권위를 가지고 중심에 서서 교회를 이끄시면 그 교회들은 한 마음이 되어서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든지 목사의 권위가 사라지고 성도들이 그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으니까 결국 해악은 성도 자신들이 고통하면서 다 겪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목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지도자의 권위를 세워주는 교회라는 것을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 덕을 많이 봅니다. 제가 밤에 2시간 반 자고 이 자리에 나와도 몸은 힘들지만 영이 살아서 춤추니까 육신의 피곤함을 이길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덕을 누가 가장 크게 보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담임목사의 권위를 세워주고 순종해 주시는 성도들을 모시고 사역하는 제가 혜택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큰 혜택은 여러분이 받는 것입니다. 목사가 피리를 불 때에 순종하며 춤추며 예배를 드리니 은혜의 충만함을 여러분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 인터넷 게시판에 한 달이 가도, 몇 주가 가도 글 하나 안 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간증의 글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 그 충만한 기쁨은 여러분이 다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시대에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권위가 회복되고, 정치가는 정치가로서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가장이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회복될 때에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기 예배하러 오시는 귀한 남자 분들, 한 가정의 가장 분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여러분의 영적권위가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엘리 가정의 문제점은 자녀의 우상화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삼상 2:29) 

이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이 대목에 뜨끔하는 부모님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뜨끔 조차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중병입니다. 지금 ‘나보다 더 중히 여겨’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 시간에 영적으로 여러분의 심령 속에 꽂혀지는 경고의 말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자체가 지금 비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그 안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다보니 이미 오래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보다 내 자식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전부 그러다 보니까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살지만 분명 이것은 비정상적이요, 잘못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진짜 우리가 내 아이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겨 나는 좀 책망을 받고 나는 하나님에게 영적으로 굉장히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내 자식이 잘 될 수만 있다면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좀 어려움을 겪고 나중에 하나님에게 벌을 조금 받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유익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유익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절 13절에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결과적으로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 그것이 우상이 되고 오냐오냐 하며 길렀더니 그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그 아이도 어려움을 겪고 부모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저는 1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청소년 가정에서 그런 비극을 목격던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늦기 전에, 더 어려워지기 전에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가 그 소문을 듣고 너 왜 그렇게 하느냐고 경고할 때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서지 못해 결국은 어려운 길을 갔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흥분하면서 찬양하고 열정적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는 일도 귀하지만 자녀 교육이 이대로 좋은지, 내가 지금 자녀교육 하는 방향이 옳은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나의 가정

여기에 반해서 한나의 가정은 대비되는 소중한 두 가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는 본이 되는 어머니 한나의 삶입니다. 한나의 모습을 보니 자녀 사무엘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태지 못할 때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1장 11절을 볼 때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약속하며 기도했는데 사무엘을 낳고 난 다음에 철저하게 그 약속을 지킵니다. 

사무엘상 1장 27-28절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자기가 기도 응답받기 전에 하나님께 했던 그 서원, 그 약속을 지키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자기를 위하여가 아니라 이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이 서원을 지키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잔소리로, 매로, 입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모습 자체가 이미 신앙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간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릴적 새벽에 눈을 떠보면 안방에서 웅얼웅얼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화장실 가다가 문을 살짝 열어보면 어머니가 어김없이 담요를 두르고 몸을 앞뒤로 흔드시며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저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새벽에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본이 되는 모습이 평생 손가락에 담배를 낄 수 없게 만들었고, 술이 즐겁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떤 세상적인 오락도 내게 즐거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춘기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교육은 물리력이 아닙니다. 강제로 야단치고 못하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려고 애쓰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 치는 삶을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아이들에게 본이되고 신앙교육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한나의 가정이 소중히 했던 것은 예배의 소중함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17절에서 예배를 무시하는 엘리 제사장 가정의 두 아들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였더라.” 이렇게 기록했는데 바로 다음 구절인 18절을 보니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사무엘은 그것과 대조적으로 예배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던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1장 21-22절을 보니까 “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사무엘은 그것과 대조적으로 예배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무엇에 그 차이가 있었을까요? 사무엘상 1장 21절 22절을 보니까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한나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자기 아들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 1:28)

우리교회에 7-8살 먹은 아이들 중에도 예배를 잘 드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얼마나 예배를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만은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예배의 소중함을 알려주니까 그 아이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집에서 아이들을 재우는 일을 담당했었습니다. 항상 아이들을 안고 토닥거리며 노래를 불러줍니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이 노래를 불러주면 어떤 날은 한 번만 불러도 잠을 자지만 잠을 안잘 때에는 잘때까지 계속 이 찬양을 불러주었습니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하루는 막내가 누나하고 소꿉놀이를 하는데 누나는 부인이고 동생은 남편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꿉놀이를 하면서 "이제, 예배드리자" 하더니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노래합니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그렇게 둘이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아이들이 의미를 모르지만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예배의 소중함을 알기 원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막내가 잠을 안자고 칭얼거려서 업어주며 "아빠가 불러주던 그 노래를 기억하니?"라고 물으니 그 아이가 정확히 기억하더라는 것입니다. 한나가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기다렸다가 젖을 뗀 후에 아이를 데리고 나왔던 의도. 그 의도가 여러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일평생 예배를 소중히 하는 그런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교훈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신명기 6:4-9)

저는 요새 교회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읽는 재미가 큽니다. 깜짝 놀랄 은혜의 글들이 올라옵니다. 그 중에 한 어머니가 쓴 글을 소개합니다. “특새(특별새벽기도회) 전 주일에 사랑하는 중3 짜리 딸이 이번에는 특새에 꼭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놀토(학교를 쉬는 토요일)에 깨워서 새벽예배에 데려가면 예배시간에 졸던 아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자리가 꽉 차서 겨우 2층 복도에 앉아서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딸아이가 펑펑 울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튿날은 더욱 뜨거운 만남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깨워서 은혜 받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 잘해서 장학금 받고 서울대가는 것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런 가치를 가지고 계신 어머니라서 아이가 큰 은혜받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반대로 ‘공부 잘해서 서울대만 가면 특새 때 은혜 받는 것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기에도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시험 때 되면 주일날에 아이들을 교회가 아닌 독서실로 보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가 우레처럼 귓가에 경고로 들려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사무엘과 같은 사람이 시대와 민족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됨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찬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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