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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고전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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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고전 3:16-17) 
   
기독교회는 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은 삼위일체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로서 설교의 목적, 설교에 담아낼 내용, 형식을 놓고 결정할 때가 고민입니다. 진리의 깊은 내용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가벼운 형식이 아니라, 논리적인 구조가 필요한데 조금은 딱딱한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담아내려면 큰 틀에 매이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깊은 진리를 이해한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배우는 학생이라는 기분으로 따라오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참으로 좋기는 좋은데, 그러나 교회에 들어오시게 되면 삼위일체 교리를 만나게 되고, 이 교리는 많은 교리들 중에 가장 심오하며, 역설이기에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면 한 분이어야 하고, 세 분이면 세 분인데, 세 분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셋이 하나라고 하니, 이 교리는 논리를 파괴합니다. 역설의 진리입니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교회는 12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3조. 하나님의 본체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다.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라고 했습니다. 

3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삼위는 아버지 성부, 아들 성자, 보혜사 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때에, 아들을 배제하고 성령을 말하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삼위일체 신앙은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이 삼위일체 교리를 가지게 된 것은 철학이나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실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과연 누구냐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면 그를 믿어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에 우리는 그를 믿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는 곧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였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교리사’를 쓰신 J. L. Neve(니이브)박사는 삼위일체론을 설명합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유일신 신앙이 매우 강하게 지배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유일신 신앙이 지배하던 때에 예수님은 과연 누구라고 고백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그 분의 임재로 깊이 체험하지 못했더라면 삼위일체론은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냐,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삼위일체 신앙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모사타의 바울이라는 사람으로, 예수님은 동정녀에게 나시고, 하나님의 능력- 로고스가 내재하여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된 것도 사실이나 그래도 본질적으로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고 일종의 신성을 부여받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사람도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시라고 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신앙을 반대하는 이들이 또 있었습니다.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인데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면서도 범신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삼위의 개성을 부인합니다. 이 사람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데, 삼위는 다 가면이라고 했습니다. 가면을 벗어놓으면 성부도 없고, 성자도 없고, 성령도 없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초대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양태론’이라는 이단사상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 구약의 창조 사역에는 성부로, 신약의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옛날 사벨리우스가 주장한 것인데, 양태론이라는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조직학자들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하지만, 결코 삼신론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삼신론은 교회로부터 정죄된 이단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 분의 신들이 아니고, 하나로 존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유대인의 유일신 신앙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한 하나님을 믿었다는 유일신 사상은 무엇입니까? 

신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유일한 여호와, 하나인 여호와라는 말은 삼위일체론에 적용시킬 수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하나라는 말은 유일한 신, 참 신이라는 뜻입니다. 중동지방에 수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모든 신은 거짓 신들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의 성서적인 근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장할만한 분명한 성경구절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하실 때, 장엄의 복수, 존엄을 나타내는 복수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창1:26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스스로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세 번이나 한 문장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11장은 바벨탑 사건인데, 노아 홍수 후에 백성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큰 탑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시려고 하시는 말씀 중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세 분 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마3:16-17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는데, 예수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여 있었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이요,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중의 하나인 마28:1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례를 베풀었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세례를 집행하는 중에 삼위일체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에 따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였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마16:16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요20:28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후13:13에서 바울은 사도의 축복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예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강복선언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을 한 문장에 놓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학의 성경적인 근거는 전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삼위일체 신학에 깊이 들어가보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종종 만나는 잘못된 이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령도 아닙니다. 성자는 성부도 아니고 성령도 아닙니다. 역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닙니다. 

요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구하겠으며, 하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을 보내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보혜사이시며, 성령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또 다른 보혜사 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진리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님의 영이시라고 했습니다. 

요10:31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말은 성부는 성자이고, 성자가 곧 성부라는 말이 아니라,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메섹의 요한이란 교부가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데,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연합과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아들에게 침투하여 거하시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침투하여 거하시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조직신학자인 김명용교수는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것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하신 존재의 모습을 설명하는 교리이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을 가지시면서 그 세 분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별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상호 연합하시고 내주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각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부가 성자도 되고, 성령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자는 성부도 필요 없고, 성령도 무시하면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시는 여러 신들 중에 하나는 아닙니다. 세 분이 각각 다르면서도 하나로 연합하시고, 들어와 계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는 교리가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역설입니다. 인간의 두뇌로 다 이해하고, 완벽하게 가르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지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성부 하나님, 나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려주시고 부활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들어와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아들을 소유하여 구원받은 것을 인쳐주시고 보증해주시는 성령님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삼위일체 신학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처럼 성령님에 대하여도 잘 모르고, 체험적으로 알고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라고 하셨는데, 역시 성령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성령님을 알고, 모셔야 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면 받은 것도 같고, 성령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을 볼 때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어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예수님을 통하여 알고,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받았습니다. 

롬8:9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갈3:2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고 했습니다. 성령 받은 것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습니다. 

고전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 받음이란 신앙고백, 복음을 믿음, 의롭다함을 얻음, 거듭남과 같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성령받음이 주로 칭의와 신앙고백과 연관되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은 성령세례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거룩한 생활,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이란 표현은 다분히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성령의 강력하고도 전적인 영향과 지배하에 놓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우리를 그 분의 강력한 영향 하에 두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에게 나를 내어드리고, 순종하여 성령이 나를 통하여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역사를 이루시도록 전적으로 헌신해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신 것과 성령님이 나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시고, 보증하시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을 기억하여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다만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되어야겠습니다. 

독일 사람 목사로 라인하르트 본케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본케 목사님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복음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본케 목사님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적인 전도 단체인 Christ for all Nations(CfaN)를 시작하신 분이요, 지금도 그 단체의 최고 지도자로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주최한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집회에서 세계 역사상 유일한 160만 명이 참석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선포한 후에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60만 명이 모여서 집회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음향시설이 필요하였는지, 그렇게 많은 군중을 위하여 음향시설을 한 것도 세계적인 기록일 것입니다. 

저는 한 때, 그의 전기나 그의 설교나 그가 쓴 책을 두루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역에 있어 수많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있어 주목한 것이 아니라, 본케 목사님은 항상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발견한 것은 성령충만과 복음전파의 열정입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삼키는 성령의 화염이 무섭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번의 집회에서 결신서를 써낸 사람이 1093, 745명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역에서 한번에 100만 명이 회심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어느 집회에서는 야외집회를 방해하는 비구름이 몰려올 때에 비구름을 향하여 꾸짖고 물러가라고 외칩니다. 그 때에 먹구름이 흩어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사람은 이렇게 역사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은 기름을 붓고, 불꽃을 사르시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성령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한번의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다고 하여도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시고, 성령님과 동역하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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