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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백성 (렘 7:13-15, 눅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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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백성 (렘 7:13-15, 눅 14:4-6)

맑고 따뜻한 좋은 봄날에 가족이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아빠가 운전하는 것을 보고 아들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굴러가는 거예요?” 

아빠는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응, 자동차에 휘발유를 연료로 넣으면 휘발유와 공기가 섞여 압축되어 혼합기체가 되어 들어가면 엔진이 흡입, 압축, 폭발, 배기의 과정을 거쳐 움직여. 그리고는 그 힘을 축을 통하여 동력을 바퀴에 전달하게 되는 거야”. 

아들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아들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굴러가는 거예요?” 

엄마는 아주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빙글빙글”. 그 때 아들은 “아, 그렇구나”라고 하더랍니다. 
  
아이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가 힘들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 것은 아이들의 심리적 성장이나, 지적 성장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또 누구의 질문이든 성실하게 답변하는 것은 인격이며 예의입니다. 
  
중국 현대문학가 쟈핑와의 ‘친구’라는 책에 보면 스궈칭이라는 문인이 왕무두라는 문인을 찾아가는 얘기가 나옵니다. 스궈칭은 병으로 말을 더듬게 되었습니다. 왕무두를 만나러 성에 들어가 한 행인을 만나 말을 더듬으면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인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스궈칭은 화가 나서 가버렸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행인이 바로 왕무두였습니다. 

후에 다른 사람이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왜 대답을 안했습니까?” “나도 병이 나서 말을 더듬습니다. 내가 대답을 하면 고의로 자신의 흉내를 내는 줄 알 것 아닙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편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요”. 진심의 부답은 좋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리고 가장 좋은 답이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성실한 대답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소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특히 구약의 하나님은 소리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은 우리에게 은총이며, 우리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대답은 축복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대답은 죄 지은 자와 의로운 자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죄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엉뚱한 대답하게 합니다. 의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바르게 대답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무엘이나, 모세나, 신약의 사울이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하여 바르게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흔히 대답이 없다는 것은 듣지 않는다는 뜻이거나, 듣지만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 중 어느 것도 부르는 자에 대한 무례이며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부르시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부르시고, 대화하기 원하시고, 일러주시고, 알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는 선지자를 통하여 열심히 말씀하시고, 빈번하게 경고를 호소하시고, 약할 때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하였습니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귀에 경을 읽는 격으로 아무리 읽어도 듣지 않습니다. 조금만 들어도 유익하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도움이 될 텐데 이런 작은 관심도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진 말로 “서당 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에게 복이 되고 은혜를 베푸실 텐데 아예 귀를 막고 산다는 말입니다. 
  
김소월의 서정시 ‘초혼’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는 임의 부재에 대한 확인과 절망과 슬픔을 담은 시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것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절망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를 간절히 찾으시고 말씀하시는데 외면하고 대답하지 않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심과 진노하심을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오늘의 말씀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자식을 교훈하는 아버지의 애절함과 슬픔과 분노를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의 한탄과 간구와 부르짖는 소리에 민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하게 듣고 응답하는 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부지런히 말씀하시는데 듣지 않습니다. 

13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부지런히 가르치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인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자’를 보세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앞에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택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이 되는데 듣지 않으므로 저주가 되고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리에 민감한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소리를 잘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바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또한 이삭이나 야곱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전에서 자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의 사사가 되고 선지자가 되어 두 왕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또 성군 다윗도 하나님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일까지 하나님께 일일이 물어보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늘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늘 하나님의 소리대로 살았습니다.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십계명과 성막을 짓는 모형도를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형대로 성막을 지어 봉헌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소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말씀에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혜자는 듣기를 원합니다. 지혜가 아니면 듣지 않습니다. 잘 들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교만한 사람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히게 하여 듣지 않게 합니다. 어떤 격언에는 “듣는 것이 보는 것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듣는 것은 가장 이해와 지식의 기본입니다. 학교에서도 보면 잘 듣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합니다.  
  
하루 시간의 9%는 글쓰기에 소비하고, 16%는 읽기에 소비하고, 30%는 말하기에 소비하고, 45%는 듣기에 소비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듣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고, 그만큼 듣는 것이 기본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온통 소리이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며 구원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수 없이 많은 말을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님의 지구의 기후변화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세계적인 대지진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태국과 일본의 쓰나미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간에는 우리나라 영일에서 강도 3.4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도 지진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랍니다. 지진을 통하여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외에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북한이 헌법에 핵보유국이라고 명기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귀 기울여 잘 들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전도서 5:1에는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며 듣지 않는 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는 말씀이 27회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애타게 말씀을 들으라고 권고하십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여 12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시며 들으라고 하십니다.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며 첫 순교자인 스데반은 복음을 전파하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54에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무언가 감동을 받았다는 증거인데 회개하지 못하고 이를 갈며 돌로 쳤다는 것은 말이 가슴에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듣지 않는 백성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서로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막으심으로 그 후로는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바벨탑을 쌓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무속인과 역술인이 약 45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연간 매출액은 2조 원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모 재벌 그룹의 회장이 점쟁이의 말을 듣고 회사 돈 수백 억 원을 선물 투자하였다고 합니다. 유수한 재벌이 점쟁이의 말을 듣고 경영한다고 하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나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울을 꼭 빼 닮아 점쟁이에게 물어보고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헤밍웨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을 생각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백성과 우리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말씀하여도 듣지 않는 백성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복 받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13절에는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해도 안 듣더니, 이제는 불러도 대답도 없습니다. 인간의 악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을 불순종하였습니다. 대중에게 말씀하여도 듣지 않더니 개인에게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인간의 영혼을 닫고, 귀를 막게 합니다. 죄인이 된 아담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부르심에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악의에 찬 대답을 하였습니다. 
  
죄는 서로의 사이를 막히게 합니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담입니다. 가운데 높은 장벽이 되어 서로 통하지 않게 합니다. 소통부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게 합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게 만듭니다. 
  
일전에 어느 사이좋은 닭살 부부가 텔레비전에서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서로가 정말 다정하게 서로 부를 때는 “여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면 “이봐”라고 한답니다. 서로가 사이가 좋을 때는 “예” 하다가 화가 나면 “왜?” 그러기도 하고 혹은 대답을 안 하기도 한답니다. 기분에 따라 대답은 달라지는 법입니다. 
  
‘주역’(周易)에는 “窮則變 變則通”, “막다른 골목에 달하면 변화하게 마련이고 변화하게 되면 밖으로 뚫고 나가게 마련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서면 변화합니다. 돌아섬은 회개인데 회개는 곧 변화를 의미하며 회개하면 통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과 통하게 되고 하나님의 물으심에 바르게 대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힌 담이 헐려야 바른 대답을 합니다. 뚫리고 통해야 바른 대답을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 때 비로소 바르게 대답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바른 대답을 하는 분명한 법칙입니다. 
  
다메섹을 가던 사울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울은 다메섹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2:9에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사울은 듣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귀가 열린 사람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귀가 열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양심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전혀 감동이 없고, 마음이 닫힌 상태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일컬어 “양심이 화인을 맞은 자”라고 합니다(딤전 4:2). 이런 자들은 귀신 소리만 듣고 대답하고 귀신을 따르고 살아갑니다. 귀신을 듣는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리 없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동전을 넣고 손금을 보는 기계가 있습니다. 이 기계 위에 ‘손금은 운명이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점쟁이나 손금쟁이를 만나면 누구나 손바닥을 보입니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본심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손바닥은 인간 심리와 밀접한 관련 있는 부위입니다. 손바닥을 보이는 것은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손금을 보는 사람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있으면 정직해집니다. 점쟁이가 묻는 말에는 고분고분 모조리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음을 가지고 신뢰하면 손을 내밉니다. 손을 듭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사도입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이방인 제자입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환상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영이 허락하지 않아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길을 돌려 드로아로 갔습니다. 때로는 소리 없는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고 방향을 전환할 필요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유부남 헌장’이라는 것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아내가 부를 땐 한 번에 대답하라. 아내 앞에서 여자 연예인, 다른 이의 아내 회사 직원을 칭찬하지 마라.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마라. 두 시간 정도 전화로 수다 떤다고 해서 아내를 결코 나무라지 마라. 아내가 걸레를 빨면 그대는 진공청소기를 들라. 설거지를 하기로 했으면 늑장부리지 말고 곧장 하라. 쇼핑은 가능한 한 함께, 아내에게 남편과의 쇼핑은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다”. 아내가 부를 때 단번의 대답한다는 것은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진 자는 신속한 대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최고의 책임은 부르심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 드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해드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부족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대답만 잘 하면 만점입니다. 그래서 책임은 응답하는 능력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긴 여행을 할 때에 잠을 잘 자는 것은 중요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안 먹고 잠을 잡니다. 귀를 막게 되면 자기 숨소리도 크게 들립니다. 침 삼키는 소리도 다 들립니다. 심장 박동소리도 들립니다. 바깥소리를 차단하면 내면의 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으면 하나님의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리에 대답하게 됩니다. 

  
결론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집에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없어 아기를 입양하였는데 입양하자 임신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8살, 9살이 되었을 때에 동네 어느 아줌마가 물었습니다. “어느 아이가 당신의 아이입니까?” “둘 다 내 아이입니다”. 아줌마는 다시 물어봅니다. “어느 아이가 입양한 아이입니까?” 그 때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잊어버렸네요”. 
  
우문현답도 있지만 ‘동문서답’(東問西答)도 있습니다. 물음에 대하여 전혀 다른 답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다 ‘묵묵부답’(黙黙不答)도 있습니다. 물음에 대하여 아예 대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대답들도 있지만 지혜로운 대답도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지혜롭게 대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민족이 말씀을 듣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답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훈의 달, 나라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답 잘하는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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