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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인생 (시 3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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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인생 (시 36:1-12)

요즘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마음은 ‘예수님의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국가도 회사도 탁월한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시대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예수님의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서면 가정과 이웃과 교회와 나라가 살게 됩니다.
많은 교회,가 담임목사를 찾고 있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너무나 적습니다. 또 누가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인지 분별하는 능력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에 영성일기, 스마트 폰에서 사용하도록 앱을 만들어 보급하게 되었습니다. 영성일기를 쓰는 것은 예수님의 사람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것이 열쇠입니다.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믿어지느냐, 믿어지지 않느냐” 로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도무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1절에서는 “악인” 이라고 했습니다. 듣기 거북하겠지만 사실입니다. 악이 주인 노릇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는 잘 사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차라리 내 주먹을 믿어라” 소리칩니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성경책을 찢어 버립니다. 십자가를 내동댕이 치고 발로 밟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1절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교통 신호 어기는 것, 교칙 어기는 것, 법 어기는 것, 지혜요 재미요 자랑인 사람이 있습니다. 잡히면 재수 없어서 그런 것이고 법을 어기고도 “세상에 법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 있느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느냐?” 하고 큰 소리 칩니다.

2-4절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 양양하고, 제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 한사코 악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러나 똑같은 세상을 살고 같은 형편인데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차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5절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놀라와 감사하여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7절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이 다 같지 않습니다. 근본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가난과 질병, 전쟁과 재난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쁜 일만 골라가면서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던 사람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너무 좋은 사람이, 아직도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많은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 그것도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는 일이 왜 생기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어지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순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는 시편도 거의 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세요. 요셉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일마다 고난이었습니다. 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충성되게 일해서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간수장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늘 함께 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급에 그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마음에 생명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산천이 아름답고, 작은 벌레 하나도 신기한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면 해충이라도 아름답습니다. 모기의 바늘,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것들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곧 흉물스러워집니다.
스스로 움직이고, 먹고, 자고, 대소변을 본다는 것, 아름답습니다.
생명체 중에 가장 신비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몸도 영혼이 살아있을 때, 생명이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귀해도 죽으면 매장을 하거나 화장을 합니다. 
우리가 귀한 것은 육신의 생명 때문이 아닙니다. 영혼 생명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과 별도로 영혼의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 생명은 어디에 간 것입니까? 답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자는 큰일입니다. 

9절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영생을 가진 자와 영생을 얻지 못한 자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왜 공평하지 않으실까? 우리가 매사를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내다보면 공평하십니다.

계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이것을 믿으면 어려운 환경 여건이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지나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듣고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2-4절에 나옵니다.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지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했습니다. 

하늘에서의 상급을 알면 옥토밭에서 살 사람 없을 것입니다. 돌짝밭이 귀한 것을 다 알 것입니다.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에 대화여 혼란스러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믿는 자야 불신자야? 불신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는 자도 아니라는 느낌에 당황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오늘 말씀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믿어지는 자와 믿어지지 않는 자, 두 부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여전히 죽은 상태에 있습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가 믿어지고 예배드릴 은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불신자의 자리에서는 떠났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온 우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지는 못합니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앞으로 누리게 될 믿음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머뭇거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c. s. 루이스는《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실로 지옥에 이르는 길은 점진적인 길이다. 즉 급회전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표지판도 없는, 부드럽고 완만한 비탈길이다." 지옥 가려면 노력하고 결단하지 않고 가만히 지나면 됩니다. 예수 믿어라, 회개해라, 교회 나가자! 하는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말고 가만 그대로 살다보면 어느 순간 ”여기는 지옥, 여기는 지옥!“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기도회, 영성일기, 제자훈련, 단기선교, 아무 반응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영적으로 죽습니다. 불신자인지 믿는 자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게 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지 스스로도 확신이 안될 순간도 옵니다. 그러나 결코 뒤돌아 가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어느 사모님은 결혼할 때부터 남편 목사님을 위한 기도 사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낙심, 분노했습니다. 남편 목사님의 마음의 쓴뿌리가 너무 강하고 상처가 깊어서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도망가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 얼마 뒤,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남편 목사님이 대소변을 받아내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싫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남편과 큐티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열리며 분노가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기도하려고 결혼했는데, 정말 기도해야 할 때, 기도를 놓아버린 죄가 이렇게 크구나! 그러면서 기도가 수고와 희생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얼마나 쉬운 것인가, 기도받는 입장에 있어 보니 깨달아졌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아멘이었습니다. 

그 후 남편 목사님이 집회 후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회개하더랍니다. 남편 붙잡고 울며 기도하는데, 소변 마려운 느낌이 들더랍니다. 추위가 사라지더랍니다. 몸의 마비가 풀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감각이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기는 커녕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지도 못하였는데요?”
주님의 음성을 이렇게 듣나 저렇게 듣나, 조급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주님이 듣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생각을 주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신경쓰지 말고, 오직 그것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들리나 의식하면 전혀 안들리는데, 의식하지 않은 채 지내다 보면 주님이 마음에 말씀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이 듣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문화 사역자 신상언 형제, 청주교육대학 일학년 일학기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제적을 당할 지경이 되었었답니다.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2년제 교육대학 그마저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돈 없는 부모에 대한 원망, 친척들에 대한 원망,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세상을 저주하였답니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결시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등록 마감 직전에 과외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학교로 달려 갔습니다. 사정을 했더니 무뚝뚝해 보이던 학생과장이 저금통장을 내밀며 우선 학비를 내고 천천히 갚으라고 하셨답니다. 정확히 오분 전 돈을 내고 나오면서 얼굴에는 눈물인지 땀인지가 흐르더랍니다.“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지켜 보시는 것 같더랍니다.‘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너의 가슴을 열 수 가 없었단다.’신상언 형제는 그 때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상처많은 성격, 모난 성품, 자존심과 열등감에 병든 상태에서 비로서 사랑의 하나님,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의 깊은 바다를 지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병상에 누워서 병에 시달리시고 계십니까? 사업의 실패로 앞길이 막연하십니까? 직장을 잃어버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십니까? “하나님, 지금 어디 계세요? 당장 이 문제를 나에게 설명해 보세요!” 성급하게 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0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변함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더 분명해집니다. "암입니다!" 그래서 비로서 하나님을 찾고 영생을 구하였다면 고난이 꼭 저주인가? 실패가 세상 소망에서 하나님 나라 소망으로 뛰어 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된다면 실패가 꼭 저주일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 라곤 귀신 들린 여자가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 준 것 밖에는 없었습니 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매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캄캄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안다.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의지하겠노라.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으며 빛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입에서 절대로 믿음 없는 말을 하지 아니 하겠노라.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바른 자세입니다. 

책 한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길갈] 안종혁교수, 신시내티 대학 석좌교수, 포항공대 석학교수. 
 지금 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저는“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십자가 복음의 영광을 깨달은 후, 이 복음의 증인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제가 만나 증인 중 한분입니다.

이 분은 방직공장의 전기공원이었던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하신 증인입니다.
“첫돌이 지난 3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8세에 홀로 된 어머니, 어린 시절 매 끼니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았기에, 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끝이었습니다. 방직공장의 전기공원으로 일하며 절망과 좌절로 몸부림쳤고, 결국 전문대학의 야간 학생으로나마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인생의 앞길이 시원하게 뚫려 본 적이 별로 없다. 또 내 인생의 앞길이 밝아 보인다고 느껴 본 적도 별로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
안종혁 교수는‘담배를 끊는 과정, 성경을 읽다가 속죄의 확신과 예수님을 영접, 기도하다가 잠이 든 채 꿈을 꾸다가 성령의 불을 받는 체험, 그리고 전도자가 되었다.’

7장과 8장은 안종혁교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게 된 감동의 체험입니다. 박사학위 자격시험에서 계속 떨어져 포기해야 할 때,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도도 성경공부도 예배도 포기하고 공부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에 마비가 와서 쓰러져 기도할 때, 하나님은“박사 학위를 포기할 수 있는지”물으셨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박사 학위가 하나님 보다 앞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진정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박사 학위를 포기한다고 고백합니다. 진정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만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 뒤에 읽는 9장은 너무나 신납니다.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꿈조차 꿀 수 없는 어려운 현실을 사는 청년들과 고난을 당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격려와 위로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생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믿음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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