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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통의 원리 (몬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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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원리 (몬 1:1-25)

교감, 소통 

다른 나라를 여행하므로 얻어지는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겨우 몇 개국만 여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간접경험이라도 하고 싶어서 EBS 세계테마여행이 라는 프로를 작년부터 틈틈이 보고 있습니다. 녹화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멀리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일지라도 계획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잘 관리하는 미래지향적인 나라를 볼 때는 마음이 평안할 뿐 아니라 행복했습니다. 반대로 어려운 환경에 소망적인 계획조차도 없어 보이는 나라를 볼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게 되고 몸까지 무거워 지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이유를 생각하다가 제가 깨달은 것은 가보지도 않은 나라이고, 멀리 떨어져 있을 지라도 시청하는 동안 저와 그 나라와 교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과 교통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과 우리의 꿈과도 교감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소통(疏通)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원하는 방향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소통하는 방법이나 방향도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통의 방법을 빌레몬서를 통해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당시 노예제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시 노예제도와 관계 

빌레몬서 기록당시 로마에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돈을 지불하고 자유인이 되는 방법도 있었지만 주인이 노예를 죽여도 되는 때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은 주인이 맡겨준 일에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하므로 주인이 자유인으로 풀어주기를 기대하기도 했고, 멀리 도망가는 노예도 있었습니다. 

노예가 재산인 때라 기득권을 가진 주인들이 서로서로 도망노예를 신고하는 때이었습니다. 이런 때에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가 도망을 해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빌레몬: 바울사도님을 통해서 빌레몬이 구원을 얻은 이후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님은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으로 인하여 감사기도 했고, 빌레몬의 사역으로 성도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큰 기쁨과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오네시모: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갇혀있을 때에 오네시모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오네시모는 점점 성장해서 바울의 심장과 같이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부탁: 바울사도님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여 달라고 명령할 수도 있지만 부탁을 했습니다.


소통의 원리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소통의 원리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님은 빌레몬에게 편지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처형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담대하게 보냈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빌레몬이 용서해 준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의 역할로 처형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영적인 스승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빌레몬 역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 종을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상황이 쉬운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에서 소통을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원칙중심의 소통을 해야 합니다. 원칙중심의 소통은 오네시모는 목숨을 걸고 빌레몬에게 가야하고, 바울사도님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 했고, 빌레몬역시 예수 안에서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소통의 원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냥 됐다 이번은 용서해 주신다고 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이 땅에 예수님까지 보내셔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고통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과 하나님의 원칙에 따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는 것 때문에 죽이지 않았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편리주의에 물든 우리에게 원칙중심의 소통을 원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상황윤리에 물든 우리에게 원칙중심의 소통을 원하십니다. 이익이 되면 검은 것이 흰색으로 보이는 우리에게 원칙중심의 소통을 명하십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칙중심으로 문제를 풀려고 할 때 문제가 잘못되면 어떻게 합니까? 빌레몬이 바울사도님의 부탁을 거절하면 어떻게 합니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처형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네시모가 두려움 때문에 빌레몬에게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면 어떻게 합니까? 이 문제에 대한 빌레몬서에서 주시는 메시지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희생적인 사랑이면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니고 하나님의 몫입니다. 계획했던 대로 되면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에 추진했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에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과중심의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라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차라리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노인과 바다 & 심청전 

어부 노인이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다른 어부들이 노인을 조롱하기 까지 했습니다. 드디어 노인은 새의 움직임을 보고 가서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고기를 낚아서 사력을 다해서 마침내 고기를 잡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2마리의 상어와 싸우면서 고기의 반 이상을 뜯겨 버렸습니다. 포구에는 겨우 고기 뼈만 끌고 온 노인은 단잠을 잡니다. 결과가 없지만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사상은 결과로만 판단하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서를 심청전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청이는 소경아버지를 눈뜨게 하기 위해서 공양미 삼백 섬을 받고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용왕이 연꽃에 태워 보내고, 연꽃에서 나온 심청이가 왕비가 되고, 심청이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눈이 먼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열고 아버지를 만나서 부르자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가 우리의 의식구조를 잡고 있습니다.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 노벨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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