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붕을 뜯고 (막 2:1-12)

첨부 1


지붕을 뜯고 (막 2:1-12)
  

들어가는 말

톰슨(Francis Thompson)이란 미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소원을 만족시켜 드리려고 의학공부에 6년을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학이란 학문에 별로 취미를 못 느껴 책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에도 만족이 없어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군대에도 있을 수 없게 되자 완전히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편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죽기 얼마 전 자기 삶을 고백하는 시 한편을 발표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하늘의 사냥개(Hound of Heaven)'입니다. 
이 시는 작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엮은 이야기입니다. 
못된 나, 도망만 가는 나, 핑계만 대는 나를 끝까지 쫓아다니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은 동산 그늘에 숨은 아담의 뒤를 쫓으셨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더 이상 도망가지 말자. 더 이상 숨으려고 하지 말자. 더 이상 말라버릴 나뭇잎으로 나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지 말자. 
주님은 이미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신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그 놀라우신 사랑 믿고 나아가는 것뿐이다.”

저가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시 한편을 읽어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에는 도전하는 삶이 있는가 하면 도피하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뚫고 나아가는 삶이 있는가 하면 뒤로 물러서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의 삶이 더 멋있을 것 같고 더 행복할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그 증세가 심각하여 혼자 힘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 중풍병자에게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는 그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친구는 많은 대화를 통하여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줍니다.
착한 사람과 사귀게 되면 착한 사람이 되기 쉽고, 악한 사람과 사귀게 되면 악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사귀게 되면 영화관에 가기 쉽고, 운동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사귀게 되면 운동장에 가기 쉽고, 술을 좋아하는 친구와 사귀면 술집에 가기 쉽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살게 돼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은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친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합니다.
그런 친구와 사귀게 되면 신앙적인 도전을 많이 받습니다.

“나도 한번 성경을 읽어 봐야지!” “나도 한번 기도를 해봐야지” “나도 한번 예배생활을 제대로 해봐야지”
이런 도전을 통해 하나님과 자꾸만 가까워집니다.
반면 어떤 친구는 그나마 있던 쥐꼬리만 한 신앙도 잃어버리게 하고, 세상과 가까워지게 합니다. 
그저 말끝마다 세상재미 타령입니다. 
‘어디 가니 뭐가 있더라.’ ‘무엇을 하니 재미있더라.’ 
그런 친구와 사귀게 되면 하나님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세상과는 가까워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친구와 사귀느냐는 인생성공, 신앙성공에 너무 중요합니다.
자신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여러분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있습니까?

본문에 나와 있는 중중병자는 불행 중 다행으로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이 한심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는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친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김인수 권사님은 “나에게 전도한 사람이 지금 살아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열 번이라도 큰절을 하고 싶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어떤 친구보다- 술친구, 돈 빌려주는 친구, 얘기해주는 친구들보다- 예수님께 안내해준 친구가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예수님께 이 병든 친구를 데리고 갑세!”
“아니,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께 데리고 간다는 말인가?”
“아닐세. 들것을 만들어 맞들면 되지 않겠나.”
우리는 그들 사이에 오고갔을 이런 대화를 상상하면서,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껴봅니다.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는커녕 얼굴조차 뵙기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생각 끝에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 없다며, 지붕을 뜯고 이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들은 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나무를 걸친 다음 짚을 썰어 넣어 이긴 진흙으로 평평하게 덮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진흙지붕이 가능했겠지요?
그리고 집 바깥에는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이 계단을 이용하여 지붕에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1)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2) ‘그냥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묵상 중에 받은 은혜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1.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병자를 예수께 데려갈 수 없을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하겠지요?

1) 포기하는 것입니다. 

들것을 내려놓고 한숨을 지으면서 “우리는 친구로서 할 만큼 다 했네. 자네도 보다시피 더 이상 어떻게 하겠는가? 자네 운이 다했는가보네. 자네 팔자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한다고 누구하나 탓할 수 없습니다. 
여건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상황이 어려울 때, 실패자가 취하는 가장 쉬운 선택은 포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황이 힘들어질 때 이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포기는 맨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2) 또 다른 반응은, 가능성을 찾는 것입니다. 

4절에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어떻게 지붕을 뜯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들은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일을 되는 방향으로 몰고 갔습니다. 
바늘구멍만한 가능성이 보일 때 그 찬스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99%의 불가능성을 보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1%의 가능성을 보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지붕을 뜯는 행위를 주님은 뭐라고 평가하셨습니까?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지붕을 뜯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1%의 가능성을 보고 지붕을 뜯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상황은 보통사람과 믿음의 사람을 구별합니다. 
어려운 여건은 보통 집단과 믿음의 집단을 구별합니다. 
불경기는 보통사업가와 믿음 가진 사업가를 구별합니다. 
선교적 상황이 열악한 것은 보통 선교사와 믿음의 능력을 가진 선교사를 구별합니다.

지난 1991년 8월 19일 구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반대하는 군부, KGB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의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때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남쪽 1,500KM 떨어진 곳에 있는 크림반도의 대통령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쿠데타군은 고르바초프를 별장에 억류시켜 놓고,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의사당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열친은 모스크바 남쪽 191KM떨어진 자작나무 숲이 있는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열친은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방탄조끼를 입고, 개인경호원 6명과 함께 쿠데타군인 공수부대와 탱크부대를 뚫고 의사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탱크 위에 서서 쿠데타는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의 정치적 상황은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열친은 그 위기를 돌파했습니다. 
그 당시 소련에 정치가는 열친 한 사람뿐이었습니까? 

많았지요! 
모두가 그 위기 상황에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열친은 1%의 가능성을 보고 맨몸으로 부딪혔습니다. 
이것이 열친을 위대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1%의 가능성이라도 발견하여 상황을 헤쳐 나가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2. ‘그냥 돌아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저가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조차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사람들이 이 병 고친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그들은 혀를 내둘렀겠지요? 
‘저런 방법도 있었구나!’ 
‘병을 고쳤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저렇게 손으로 만지듯 체험했으니 얼마나 좋을까?’ 

본문에 보면 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12절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여러분 이 구절을 주의해보십시오.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이 말은 보는 자, 관객의 입장에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여기에서 관객과 주인공이 갈라집니다. 
관객은 사건을 보고 놀라고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사건을 몸으로 체험하고, 감격을 몸으로 맛보고, 박수를 받으며, 영광을 얻습니다. 

관객과 주인공의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관객은 앉아있고, 주인공은 나섭니다. 
그게 차이점이 아닙니까?

찬 302장을 펴보십시오.
2절을 보면,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관객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주인공이 되어 은혜의 바다에 뛰어들라는 권면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은 왜 이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재미있는 옛날 얘기로 읽으라고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도 1%의 가능성을 보고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는 주인공이 되라.’고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5월 20일(2012년)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첼시(잉글랜드)는 바이에른 뮌헨(독일)을 승부차기 끝에 누르고 팀 창단 후 처음으로 유럽 프로축구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경기 결과를 두고 국내외 언론들은 “드록바에 의한, 드록바를 위한 경기”라고 평했습니다. 
드록바(34)는 1대0으로 지고 있던 후반 43분에 천금의 동점 헤딩골을 넣은데 이어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와 승리를 확정했습니다.축구공 하나에 인생을 걸고 있는 아프리카 청소년들에게 그는 우상의 차원을 넘습니다. 

일부 축구 팬들은 코트디부아르를 드록바의 나라, 즉 ‘드록국(國)’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국내 축구팬들은 그를 ‘드록신(神)’으로 칭합니다. 
코트디브아르는 2006년 독일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건국 이래 첫 출전이었습니다. 
물론 드록바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코트디브아르는 1960년 독립 이후 내전으로 근대사가 점철된 국가. 
특히 2002년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국토 전역이 피폐됐습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전의 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2005년 10월 드록바가 이끈 코트디브아르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티켓을 획득했습니다. 국민들은 환호했습니다. 
본선 티켓 획득 직후 드록바는 코트디브아르 전역에 방송된 생중계 TV 인터뷰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호소했습니다. 
“일주일만이라도, 단 일주일만이라도 무기를 내려놓읍시다. 전쟁을 멈춥시다.”드록바의 호소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호소 이후 일주일간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 이후 최초로 총성이 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전 종결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년 뒤, 내전은 종식됐습니다.전 세계 축구팬들은 드록바에게 ‘검은 예수’란 별명을 붙였습니다. 
디디에 드록바. 
드록바의 손에 쥔 것이라곤 축구공 하나뿐이었습니다. 
축구공은 그에게 단 1%의 가능성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축구공 하나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그 땅을 외면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 ‘검은 예수’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가 지키는 제 34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평신도들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주인공으로 참여시키자는 의미입니다. 
평신도 여러분, 1%의 가능성을 보고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땀과 눈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