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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곤할 때, 예수님 생각합시다 (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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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할 때, 예수님 생각합시다 (히 12:3) 
 
 
피곤함의 원인

여러분은 언제 가장 피곤하세요? 여기서 피곤이라고 했을 때 육체적인 피곤은 물론이요 정신적인 피곤까지도 포함하는 질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에도 우리의 가장이 직장의 사무실에서, 노동의 현장에서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우리의 어머니들이 가사일로 자녀양육으로 얼마나 몸이 힘들었을까요? 또 우리의 자녀들은 학업과 직장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쏟아 부은 에너지, 그것으로 인해 지친 모습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만약 이러한 모든 피곤함의 원인이 단지 육체적이라면 해결하기 쉽습니다. 그냥 일을 멈추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면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컷 자고, 좋은 영양을 섭취하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피곤함이 육체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의 상당부분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지난 한 주간 동안 왜 피곤하셨는지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육체적인 노동보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큰 원인일 것입니다. 또 영적인 문제에서 그 뿌리를 찾을 것입니다. 여하튼, 피곤함의 이유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은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솔로몬 왕은 전도서 1장 8절에서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피곤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냥 방치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무기력해집니다. 마음에 낙심이 찾아옵니다. 악한 영으로부터 공격을 당합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행진할 때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를 신명기 25장 17~18절은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정신이, 영혼이 지친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하면 악한 영이 그 피곤함을 틈타서 우리는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의 피곤을 이기기 위한 분명한 대안이 필요합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12장 3절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피곤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대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피곤할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할 이유

여러분은 몸과 영혼이 피곤할 때 누구를 생각하시나요? 어떤 분은 부모님이라고 말할 겁니다. 또 자녀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혹은 선생님이라는 분, 아니면 남편이나 아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지난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날'을 참 많이 만드네요. 그런데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닌 듯합니다. 무슨 날을 자꾸 만든다는 것은 그것에 관하여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저는 이 부부의 날에 페이스 북에 친구가 올린 글로 인해서 웃음 한방이 '빵' 터지기는 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글을 그대로 인용하다보니 아내가 되는 분들에게 정중하지 못함에 양해를 구하면서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늘 제 지갑에 울 마눌(아내) 사진을 넣고 다닙니다. 그리고 심각한 일이 있으면 항상 마눌 사진을 봅니다. 그러면 그 일 모두가 괜찮아집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지갑 속 아내의 사진을 보면서 힘을 얻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글을 쓴 사람의 답인즉, "이 여자가 내 마눌이다...이거보다 더 심각한 일이 뭐가 있을까? 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쏟아난다"는 것입니다. 조금 황당한 대답인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특별한 순간이 되면 누군가를 떠 올리는 버릇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도 이러한 인간의 습성을 알았던지 우리의 몸과 영혼이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누군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을 보세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가 피곤하여 낙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영혼이 지친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처방치고는 너무나 생뚱맞지 않습니까? 잠을 푹 자든지, 여행을 하든지, 좋은 영양을 섭취하라고 하면 더 실제적인 대답일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예수님 생애 전체에 비추어 묵상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이제 피곤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한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 같이 피곤함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한 인간으로 오셔서, 오늘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과도 씨름하신 분입니다. 이 순간에도 위험한 노동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목수의 아들로 중노동을 하면서 하루 종일 여가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시느라 병원의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종일 앉아있는 의사나 종일 뛰어다니는 간호사들처럼 병든 자를 치료를 하기위해 피고름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학교와 여러 교육현장에서 아이들과 청년들을 가르치느라 목이 통통 부어있는 선생님들처럼 무지한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피곤함을 똑 같이 경험하셨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피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관계' 문제입니다. 사람들 간에 일어난 갈등으로 인하여 서로 주고받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그리고 상처와 분노는 이로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더 지치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 역시 이런 문제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거기에는 선한 사람도 있는 반면, 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나열해보자면,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이방인들 중에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표적과 가르침을 부정하며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까지 나갔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예수님을 좀 더 이해하고 따라야할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롯 유다라는 제자는 예수님을 은30개에 팔아넘기어서 십자가에서 죽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히브리서 12장 3절은 '예수님을 거역한 죄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거역한 죄인들을 통해서 인간관계에서 겪는 갈등과 아픔과 분노를 우리와 똑 같이 경험하신 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가진 감정을 똑같이 가지고 계신분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언제 처음 울었을까요? 성경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지만 한번 상상해볼만합니다. 그야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몸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와 똑 같이 울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장하면서 우는 일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는 모습을 두 가지 사건 속에서 말해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요 11:35). 또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 19:21). 예수님의 감정에는 울음뿐만 아니라 '웃음'도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고 웃으시며 "삭개오야! 이리로 내려오너라" 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희 효자교회 팀사역에도 이런 동병상련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사역팀이 있습니다. 바로 '라파팀'입니다. 이 이름의 근거는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나오는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라파팀은 중한 병을 얻어 수술과 투병의 경험이 있는 분들이 주로 모여서 환자들을 심방하며 위로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물론 경험해보지 않은 분들의 위로도 크겠지만, 똑 같이 병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한 위로는 더 큰 것이 사실이기에 아주 귀한 사역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우리는 '동병상련'의 관계입니다. 즉 예수님은 속이 타고 아파서 눈물을 쏟을 정도로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언제 피곤한지, 왜 피곤해 하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몸과 영혼이 지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생각하라"(히 12:3 하반절)고 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비교하라' 또 다른 하나는 '묵상하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과 예수님께서 사신 이 땅의 삶을 비교하며 묵상해보세요.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아, 예수님도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다 당하셨구나.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피곤함도 짊어지셨구나. 아니, 이보다 더한 것을 짊어 지셨구나' 그러면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확신이 생깁니다. 이것은 곧 우리들을 피곤함으로부터 탈출시키는 든든한 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다 경험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실 것입니다"(사 4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 참 쉼을 허락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은 "죄인들이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 곧 예수님 자신을 팔아넘기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은 일에 대하여 "참으셨다"라고 말합니다. 로마당시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입니다.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망신거리이며 구경거리입니다. 예수님 역시 한 인간이었기에 그 수치 앞에서 얼마나 많이 망설이었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것은 그의 겟세마네의 기도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얼마나 처절한 기도입니까? 여러분, 십자가 앞에서 고뇌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까?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금세 바뀝니다. 이어지는 기도가 무엇인가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두려운 자신의 마음을 거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인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소망'과 '인내'가 동시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장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현재 십자가의 수치 앞에서 자신이 인내하였습니다. 이는 곧 낙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 낙심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어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하면 십자가의 그 수치도, 십자가의 그 고통도 다 물러갈 것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을 통하여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꾸만 뒤로 처지는 것만 같아서 낙심이 됩니까? 하지만 우리는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낙심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담담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미래에 주어질 영광을 생각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인내했습니다. 낙심의 상황이 내 앞에 놓여있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을 생각하며, 장래에 주어질 축복을 생각하며 인내하십시오. 낙심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낙심된 여러분들의 몸과 영혼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실천: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을 생각할까?

그러면,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다 경험하시면서도 낙심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마다 방법이 다 있겠지만, 저는 두 가지 정도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조용한 시간을 정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루 24시간 중에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최근에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보았더니, '참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일에 소홀했던 것입니다. 또 문득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구체적인 표현(행동)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기억한다"(살전 1:3)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는 믿음과 사랑과 천국 소망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체적인 행동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므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1분이든, 10분이든, 1시간이든 간에 하루 일과에서 따로 떼 놓으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줄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처음에는 온갖 잡념이 생길 수 이었습니다. 그럴 때는 찬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 놓고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을 생각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조용한 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생각하고, 깊이 만나는 첫 출발점입니다. 

다음, 말씀을 되새김질 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용한 시간을 정해놓고, 찬송과 기도와 말씀을 '읽어라'고 했습니다. 물론 각 사람마다 좋아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조용한 장소를 정한 후에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라는 제언을 합니다. 사실, 말씀을 묵상하려고 성경을 펼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안 들어올뿐더러 어디를 읽어야 할지조차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여러분이 주일에 들은 말씀의 한 부분 선택하여 조용히 읽으며 묵상하십시오. '지난주일 이런 말씀을 들었지. 이 말씀은 이런 뜻이었지' 그러다보면 해야 할 기도가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해야 할 찬송이 떠오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내 입술에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 방법을 굳이 표현한다면, '되새김질'입니다. 저는 성장배경이 시골이라, 소여물을 먹여본 경험이 있습니다. 소가 여물을 먹을 때 정신없이 먹습니다. 숨이 차서 허덕이며 언제 씹어 넘기는지도 모르게 마구 먹어댑니다. 그런 후에 한쪽에 가만히 앉아서 먹었던 여물을 되새김질해서 다시 꼭꼭 씹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새김질 한 여물을 두 번째 위에 채우고 두 번째 위가 차면, 세 번째 위에 채우고 세 번째 위가 차면, 네 번째 위까지 가득 채웁니다. 그런 후에 소의 침과 풀이 잘 섞여서 위를 통해서 영양이 흡수되므로 건강하고 통통한 소가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말씀, 보았던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김질 하듯 곰곰이 되뇌어 봅시다. 우리의 기도가 변하고, 찬송이 변하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입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 여러분만의 조용한 시간을 정하고, 매일 매일 성경말씀을 되새김질 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을 다 경험하시면서도 낙심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실 것입니다. 삶의 무거운 짐으로 몸과 영혼이 지친 우리에게 참 됨 쉼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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