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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 (요 17:6-19, 행 1:15-17, 21-26, 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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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 (요 17:6-19, 행 1:15-17, 21-26, 요일 5:9-13)

오늘은 부활절 후 일곱 번째 주일이자 부활절의 마지막 절기이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굉장히 길면서도, 다소 산만하고, 그러면서도 신비스럽기까지 한 예수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도는 주님이 하신 마지막 기도는 아니었겠지만 사실상 제자들이 들었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마치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과도 같고,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하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말해 우리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하신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때 둘러서있던 제자들이 엿들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기도를 엿듣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9절을 봅시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여기에 보면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빈다고 했는데, “그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대답이 떠오릅니다. 최초로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제자들, 즉 12사도와 다른 제자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제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위해서 중보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6절을 보면 그들은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입니다. 본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주님께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절 말씀처럼 비록 이 세상 안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천국 시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12사도를 비롯한 우리 모든 주님의 제자들이 앞으로 교회를 세워나갈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다음과 같은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보전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11-12절을 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주님은 가룟 유다와 같이 잃어버린 멸망의 자식이 하나도 없이 우리 모두가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 악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여기 “보전하다”는 헬라어는 “tereo”인데 “조심스럽게 돌보다” 혹은 “굳게 붙들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다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작은 계집종 앞에서조차 자신을 보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끔 유모차에 탄 어린 아기가 유모차를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빠가 끌어주는 유모차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갑한 나머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모차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탈 때 헬멧을 써야지만 안전합니다. 자동차를 탈 때에는 안전벨트를 매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헬멧을 쓰지 않으려고 하고 안전벨트도 벗어던지려고 합니다. 번거롭고 귀찮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악에 넘어가지 않고 보호받기를 위해 오늘도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에드거 엘런 포는 빼어난 문학적 재능을 타고 났습니다. 하지만 술과 도박에 빠져 인생을 탕진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거리를 방황하다가 결국 40세의 짧은 나이에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흉상이 세워져있는데 그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났으나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더욱 비참하였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회계를 맡은 유능한 제자였지만 자신의 물욕과 시기심을 다루지 못해서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온갖 악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17절을 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성결한 삶을 살도록 중보기도를 올리신다는 말씀이지요. 거룩을 뜻하는 헬라어 “hagios”라는 말에는 보통 사람과 구별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컨대 성만찬을 할 때 쓰는 그릇이나 컵은 보통 때에는 다른 그릇이나 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을 위해서 사용될 때 거룩해집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천국시민의 기준으로 살기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됩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하지만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구별됩니다. 토요일 밤늦게 까지 놀다가 주일 아침에 오랫동안 잠에 빠져드는 사람과 우리는 다릅니다. 이른 아침부터 철저히 주일성수를 합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거룩해지는 것이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교회 스스로의 수고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진주를 품고 있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기도를 많이 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 선행을 많이 베풀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진다고 했습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는 혁명적 힘이 있습니다. 구라파를 비롯한 세계 전역에 위대한 혁명이 일어난 것은 모두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썼을 때 일어났습니다. 

마르틴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시편을 집중적으로 읽고 쓰다가 종교개혁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라틴어로 된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장장 1,500년 동안 사람들은 자기 나라말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 어려운 라틴어로 된 성경을, 그것도 평신도는 읽을 수도 없었고 오직 사제들만 독점했습니다.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을 때 독일의 문맹률은 95%에 달했고, 더군다나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발간한 뒤 급격가게 문맹률의 감소했습니다. 300년 후 독일과 불란서가 맞붙어 싸운 보불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불란서는 전체 인구의 1/3 정도가 문맹이었지만 독일의 문맹률은 겨우 3%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쓸 때 위대한 혁명이 일어납니다. 어거스틴이 로마서를 읽다가 회심했습니다. 존 웨슬리 역시 1738년 5월 24일 밤 8시 45분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잇이라는 작은 거리에서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서는 회심했습니다. 웨슬리가 회심한 후 영국은 구라파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산업화, 근대화에 진입함으로써 명예혁명, 무혈혁명을 경험했습니다. 

모두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쓰다가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1-22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거스틴은 교파가 분열해서 난립하는 것은 한 폭으로 된 주님의 옷을 찢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수백 수천의 교파가 난립하는 것은 주님의 옷을 수백 수천 조각으로 찢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운동 중에 하나가 에큐메니즘, 교회일치 운동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만나서 대화해야 합니다. 감리교와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교, 모든 교파가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거듭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이것은 “획일화” 혹은 “전체화”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 우리가 다양한 개성을 표현하며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십니다.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개성을 표현할 때에는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자비를,” 옳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는 항상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큰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것에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이 노리는 가장 큰 속임수 중에 하나는 교회가 분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사탄은 교회의 일치를 허물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올리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영웅적 삶을 살아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중보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중보의 기도를 올리시는 까닭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 새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악으로부터 보전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지길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중보기도 그대로 이와 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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