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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굽에서 탈출하십시오 (겔 3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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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탈출하십시오 (겔 34:1-16)


< 때로는 질책도 필요합니다 >   

요새 한국 교회가 어렵습니다. 이때 특별히 대형교회의 책임이 요구됩니다. 그런 말을 하면 시기심 때문에 대형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얘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고통과 상처로 신음하는 영혼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했지만 힘과 의를 과시했던 위선적인 리더들은 단호하게 질책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회칠한 무덤’이라 했고 헤롯은 ‘여우’라고 했고 백성들을 오도하는 리더들은 ‘삯꾼 목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생생한 언어는 때로 듣기가 불편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리더로부터 착취당하는 영혼들의 고통을 느끼신 주님께 그 정도는 오히려 절제된 언어였습니다.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현실을 보고도 뜨거운 정의감이 솟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입니다.

위선자들과 강도들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타협의 기술이 아닌 진리의 선포입니다. 진리는 ‘타협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갈등을 딛고’ 드러납니다. 갈등을 피하면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게 좋다!”는 타협적 태도나, “세상은 다 그래!”라는 숙명적 태도를 버리십시오. 가끔 보면 불의한 세상을 향해 돌 직구를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도 있어야 불의와 거짓과 위선이 그나마 위축됩니다. 예수님을 길이라고 고백한 교인과 교회가 예수님의 길로 가지 못하고 있다면 마땅히 질책 받아야 합니다. 
  

< 거짓 목자의 특징 >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유대 나라는 강대국 틈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리더의 타락이었고, 특별히 종교 리더의 타락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해서 거짓목자들을 경고한 말씀이 본문 말씀입니다. 거짓 목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거짓 목자의 첫 번째 특징은 자기 배만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2절). 자기 배만 불리는 목자라면 언뜻 오늘날의 일부 대형교회의 배부른 목회자들이 떠오릅니다. 물론 대형교회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대형교회는 나눔을 실천하며 열심히 분립교회를 세우고 선교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반면에 많은 대형교회들이 ‘지속적인 나눔’보다는 ‘지속적인 탐식’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장해도 교회와 목회자의 명예는 점차 떨어지면서 결국 결말이 비참해집니다.

요새 교회성장이 더디니까 교회성장 세미나를 열면 많은 목회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물론 성공 사례를 나누며 못 보던 부분을 일깨워주고 도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세미나가 성공주의와 기복주의를 조장해 오히려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많은 성도들은 교회성장을 너그럽게 ‘성공 및 은혜의 표시’로 봐줍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대형교회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십자가’보다 ‘힘과 권력’이 더 느껴지면 심하게 비판합니다. 그처럼 불신자로부터 비판과 교훈과 책망을 받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가르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가르치니 얼마나 수치입니까? 

불신자들은 힘을 과시하는 교회를 보면 수준을 낮게 보고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합니다. 어떻게 교회가 그들에게 감동을 줍니까? 교회로부터 ‘힘과 권력’이 아닌 ‘십자가의 희생’이 느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최선을 다해 그 힘을 나눠야 합니다. 물질을 주시면 물질도 최선을 다해 나누고 인력을 주시면 인력 파송에도 더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대형화와 타락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짓 목자는 양을 잡아 그 기름을 취하려고만 하고 양을 먹이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3절). 그처럼 양을 이용해 정욕을 채우려니까 양이 이익을 못 내면 훈련이란 명목으로 채찍질합니다(4절). 그래서 양떼들이 사방에 흩어졌다가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합니다(5-6절). 지금도 교회와 목회자에게 실망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방황하다가 세상과 이단의 함정에 빠져 더 깊은 흑암의 구렁텅이로 내몰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방목의 축복 >   

그처럼 참된 목자가 없을 때 하나님이 방황하는 양을 찾고(11-12절), 양떼를 본토로 데려와 좋은 꼴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설치한 좋은 우리에 누워 있는 양들에게 살진 꼴을 먹이십니다(13-14절). 특히 하나님이 친히 양의 목자가 되어 양들을 누워 있게 하시겠다고 강조합니다(15절). 그래서 잃은 자를 찾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고 상한 자를 싸매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고 살찌고 강한 자는 없애고 정의대로 양들을 먹이시겠다고 합니다(16절).   

이 구절을 보면 목양의 제일 원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양떼를 누워 있게 하는 방목입니다. 성과주의 리더는 성도가 누워 있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떼가 누워 있는 시간도 주어야 합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가장 아픈 일은 ‘방목의 축복’을 잃어버린 일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성장주의 및 성공주의에 얼마나 크게 지배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성공은 세상에서 하고 교회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제자훈련이란 명목으로 양떼를 쉴 새 없이 굴리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제자훈련에서 헌법처럼 여기는 제일 구호가 무엇입니까? “제자는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를 만들겠다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외형주의와 성장주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군대식으로 훈련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그렇게 군대식으로 훈련했습니까?

제자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제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너무 훈련 프로그램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마음의 교감을 이루면 어느 순간에 환경의 역풍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제자가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영어로 목사는 미니스터(minister)라고도 하고, 레버런드(reverend)라고도 하고, 패스터(pastor)라고도 합니다. 그 단어 중에 성경적인 목자의 개념에 가장 맞는 단어는 패스터(pastor)란 단어입니다.

네트영어로 철자와 어근을 통해 각 단어의 원뜻을 설명하면 미니스터(minister)란 ‘자신을 낮춰 쭉 섬기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단어가 가진 핵심 의미는 ‘섬김’에 있습니다. 장관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행정부의 한 부서에서 섬기는 사람’이란 개념에서 그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레버런드(reverend)란 ‘아주 진실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단어가 가진 핵심 의미는 ‘진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명칭은 목사에 대한 존칭으로 쓰입니다.   

패스터(pastor)란 ‘자유롭게 지나다니게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단어가 가진 핵심 의미는 ‘방목’에 있습니다. 양떼나 소떼가 자유롭게 지나다니며(pass) 풀을 뜯는 곳을 패스춰(pasture)라고 합니다. 그래서 패스춰(pasture)는 ‘풀밭, 초장’이라고도 뜻풀이하지만 원뜻에 가장 가까운 뜻풀이는 ‘방목장’이란 뜻입니다. 그 ‘방목 관리자’를 패스터(pastor)라고 합니다.   

왜 본문 14-15절 말씀에서 양떼에 대해 “누워 있다.”는 표현을 반복해 강조합니까? 선한 목자의 제일 요건은 방목에 있다는 뜻입니다. 훈련한다는 명목으로 채찍질하며 몰아대는 것은 참된 목양이 아닙니다. 참된 부모의 제일 요건도 방목에 있습니다. 자녀들을 학업과 진로와 특징과 은사와 행동반경까지 부모가 다 규정해버리는 것은 참된 부모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리 부인해도 자녀를 자기 명예심과 이기심의 도구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사랑으로 방목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가정에서도 방목의 원리를 회복하고 교회에서도 방목의 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훈련하고 채찍질하면서 교회와 사역을 키우면 그 열매를 제일 기분 좋게 따먹는 사람은 점차 왕처럼 되어 가는 담임목사와 그 주변의 이너써클(inner circle)뿐입니다. 제왕적 리더십은 기독교의 리더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누군가 제왕이 되는 상황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과 목양의 기본원리를 따라 즉시 교회분립에 나서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힘 있는 교회는 끊임없이 그 힘을 빼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속 힘을 주셔도 교회 자신은 열심히 힘을 빼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십자가의 기운이 우뚝 느껴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공룡화되면서 수많은 영적인 질병과 악영향을 낫습니다. 그처럼 힘 있는 교회 리더가 힘 빼는 일을 외면하면 양떼라도 힘 빼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힘이 십자가보다 크게 느껴지도록 놔두면 교회도 타락하지만 자신의 행복과 축복도 망가집니다. 

힘 있는 교회가 스스로 힘을 빼지 않으면 나중에는 결국 하나님이 힘을 빼십니다. 그때부터는 교회는 세상의 채찍질을 당합니다. 반면에 힘 있는 교회가 스스로 힘을 빼고 그 힘을 열심히 나눠주면 그 교회의 천국상급과 무형왕국은 더욱 커집니다. 결국 나눔을 통해 지속적으로 힘을 빼고 십자가의 이미지를 키우면 교회의 겉모양은 후패하게 될지라도 교회의 속모양은 날로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과 불신자들의 신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신망이 결국 신앙으로 발전합니다. 
  

< 애굽에서 탈출하십시오 >   

성경에서 세상 힘을 상징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애굽입니다. 만약 교회에서도 힘이 과시되면 그 교회도 역시 영적으로 애굽입니다. 그 애굽에서 출애굽해야 한국 교회도 살고 자신도 삽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주요 원인은 교회의 대형화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안타깝게 생각해서 어떤 사람들은 사명을 따라 십자가를 질 각오로 애굽을 떠나는 거룩한 엑서더스를 감행합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선택입니까?  

대형교회도 자신의 단점과 부작용을 압니다. 그렇다고 힘을 빼기는 싫고 팔다리를 자르는 아픔도 겪기 싫어서 그 단점을 보완하려고 수많은 소그룹을 만듭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역 체계입니다. 그 경우에 구역은 거대한 공룡을 유지시키는 작은 세포들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어도 점점 교회는 본질을 잃게 됩니다.  

목양관계는 ‘기드온의 300명’이나 아둘람 굴에 모인 다윗의 초창기 비전 멤버인 ‘다윗의 400명’ 정도가 최대치입니다. 그 이상이 되면 인격적인 목양관계가 이뤄지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300-400명이 넘어서면 열심히 분립교회를 세우며 힘 빼는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여러 체계와 방법을 동원하면서 ‘방목의 축복’은 사라지고 ‘도구화의 저주’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요새는 구역 체계가 ‘양떼의 도구화’의 첨병처럼 인식되니까 다양한 형태의 셀 체계가 생겼습니다. 셀 체계가 구역 체계보다 교회의 속성에 가까운 모습인 것은 사실입니다. 각 셀에 평신도 목자를 세워 어느 정도의 자체적인 관리권, 말씀권, 교제권을 주어 셀이 ‘교회의 한 부속품’이 아닌 ‘하나의 작은 교회’를 이루게 해서 양떼들에게 ‘인격적인 목양관계’를 맛보게 해주려는 체계가 셀 체계입니다. 그러나 ‘셀 목자와의 인격적인 목양관계’와 ‘담임목사와의 인격적인 목양관계’는 엄연히 다릅니다.  

결국 셀 체계도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이 다양해지면서 획일적인 통제가 어려운 정보화시대에 거대한 공룡 교회를 만들고 지탱시키려는 한 방편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구역이나 셀이 필요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요긴하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조직을 ‘공룡 교회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조직’이 아닌 ‘나눔과 분립을 위한 전 단계의 조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힘과 숫자를 과시하는 타락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어느 날, 늘 자기 교회를 자랑하던 한 대형교회 교인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교회에 10년을 다녔는데 아직도 담임목사님과 얘기를 한 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구나! 혹시 세월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자신이 담임목사와 인격적인 교감도 없이 일방적인 짝사랑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고 교회 모임에 잘 참석하고 교회 프로그램을 많이 쫓아다녔지만 교회 내에서 자기 위치는 1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고 담임목사님과의 인격적인 비전의 공유도 전혀 없음을 깨닫고 결국 그는 거룩한 엑서더스를 결단했습니다. 
  

< 나누기 위해 구하십시오 >   

신앙생활은 스타를 쫓아다니며 팬클럽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는 왕이나 스타가 아닌 자기 이름과 상황을 알고 이름을 불러서 기도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양떼의 이름조차 모르면 그 양떼에게 그 목자는 자기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가 양떼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기도해주고 살펴줄 때 진짜 목양관계가 이뤄집니다. 많은 군중과 프로그램 속에서 일시적인 위안을 얻으려고 하면 나중에 남는 것은 군중 속의 고독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매일 교인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점점 부흥해서 300명이 넘어섰습니다. 그때부터 교인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기도하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교회 건축’과 ‘교회 분립’을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할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마침내 ‘교회 분립’을 선택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교회입니까? 우리 분당 샛별교회는 그런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이름도 모르고 이름을 불러 기도해줄 수도 없다면 자기 양떼도 아닌데 자기 양떼도 아닌 사람들을 계속 행정 시스템과 보조 목회자를 통해 지나치게 붙들려고 하면 그때부터 신적인 목양은 사라지고 인간적인 경영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때부터 목사는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잃고 ‘수많은 일벌을 거느린 여왕벌’의 이미지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인간 왕국이 되어갑니다. 그런 인간 왕국에는 천국이 자리하기 힘듭니다.  

초대교회 중에 기적적으로 커진 예루살렘 모교회를 제외하고는 고린도교회가 가장 컸습니다. 그 숫자는 최대 60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 숫자로도 종합병원처럼 수많은 교회질병을 앓고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교회가 600명쯤 되니까 심각한 질병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거대한 예루살렘 모교회도 분립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 흩으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힘이 있으면 시험과 핍박 전에 스스로 흩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힘 있는 대형교회로서 흩어짐의 원리를 선도해 한국의 전체 교회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모델교회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모델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의 공룡화를 지적한 것은 “숫자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성장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건강한 성장은 필요합니다. 또한 건강한 성장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치 제시도 필요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교회성장을 위한 지혜도 구하고 자기 교회에 맞는 교회성장 방법도 찾아 성장을 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 후에 그 힘을 어떻게 잘 나누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물질을 구합니까?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서 구하십시오. 왜 지위를 구합니까?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 구하십시오. 왜 교회성장을 구합니까? 많은 건강한 딸 교회를 세우고 잘 분립하고 선교하려고 구하십시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이 땅의 왕국이 아닌 천국을 꿈꾸고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아닌 진짜 명예와 영향력을 꿈꾸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 십자가를 붙들고 사십시오 >   

결국 진짜 사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길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모습은 망각한 채 남만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집사님이 좀 변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침내 고치려고 채찍질하고 훈련합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십니까? “아무개야! 그를 고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것이 쉽단다.”   

진짜 해결책은 ‘남을 고치는 것’에 있지 않고 ‘나를 죽이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도 남을 고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꿈을 가지고 항상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오늘 방목의 축복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살면서 그를 바로 잡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남을 고치려고 하면 평안을 잃지만 십자가를 지려고 다짐하면 대 평안이 생기고 새로운 전진이 시작되고 문제해결도 신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를 바꾸려고 금식기도 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려고 금식기도 하십시오. 자기를 죽이려는 기도가 세상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도입니다. 선한 목자가 죽으면 선한 양떼들도 같이 따라 죽는 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십자가의 기운이 교회 전체를 지배하게 하고 죽는 길이 사는 길임을 시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무명한 자 같지만 유명한 자가 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됩니다. 결국 성도의 최대 목표는 십자가의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다짐하면 신기하게 행복도 찾아옵니다.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생깁니다. 그때 죽음의 십자가도 져야 하는데 그 정도의 힘든 일만 당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가 나오고 문제를 극복하는 놀라운 내적인 힘도 나옵니다. 그처럼 십자가를 앞세워 살면 이 땅에서 천국의 삶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낸 삶이 바로 나눔의 삶입니다. 이제 잘 나누십시오. 나눔은 영성의 꽃입니다. 성도는 자신을 것을 힘써 공유하려고 해야 합니다. 공유를 강요하면 최악의 공산주의가 되지만 공유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면 최고의 영성을 얻습니다.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가 빚진 자가 되지만 교회에서는 오히려 가진 자가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남이 가질 것을 너무 많이 가졌구나! 열심히 나누자!”  

많이 버십시오. 남의 몫까지 자신이 너무 많이 가질 것을 염려해서 최선을 다해 버는 것조차 안 하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 버십시오. 어차피 나눠줄 것을 왜 최선을 다해서 법니까? 물질을 잘 쓰려고 준비된 사람이 잘 벌어서 나눠주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펼쳐지지만 물질을 잘 쓰려고 준비된 사람이 멍하니 있음으로 물질을 잘못 쓰는 사람이 많이 벌어가서 그 물질을 꼭 움켜쥐고 나쁜데 쓰면 최대 다수의 최대 불행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벌고 열심히 나누십시오.  

십자가의 삶은 멋지고 복된 삶이지만 쉽지 않습니다. 좁은 문의 삶을 결단하고 최선을 다해 선교하고 심지어는 메이저 그룹에서 마이너 그룹으로 움직일 결단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의 삶을 결단하십시오. 십자가 없이 능력과 축복만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결단하고 나가면 영혼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적인 힘으로부터 거룩한 엑서더스를 잘 감행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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