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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지수 (눅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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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지수 (눅 17:20-21)

성자라고 불리는 수도자 한 분이 아주 귀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집과 돈과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미 행복하다면 그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너무나 귀한 말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 세태에 대해서 정말로 새겨들어야할 귀한 말입니다. 이미 행복하다면 집, 돈,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면 가지고 있는 돈이나 이름이나 집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돈이나 집이나 이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며칠 전 신문 광고란에서 ‘당신은 행복한가?’ 라는 제목의 책 광고를 보았습니다.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 이 책 제목과 비슷하고 저자가 같은 책이 십여 년 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이 다시 눈에 뜨인 이유는 책제목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너무도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 제목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우리 모두 다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오늘날은 이전보다 생활형편이 더 좋아졌습니다. 생활수준도 좋아졌고 환경도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볼 것은 ‘행복지수도 높아졌는가?’ 라는 것입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제학계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1983년에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임용될 당시 역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경제학을 연구한 이 분은 경제학이란 경제를 살리기 위한 학문인데, 경제를 더 살리고 높여보아야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대단히 뛰어난 이 학자가 연구를 하다 이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경제학의 임무란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부의 측량으로 치면 유례없이 풍족한 세상이다. 그러나 치안부재, 불안, 불만이 가득 찬 세상이 되었다. 

미국인 대다수는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갔다고 믿고 있다는 비판적, 비관적 인식이 퍼져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같이 있다.’ 라고 짚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대체로 공감하실만한 이야기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어느 때에 이루어집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을 하는 목적은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따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러분들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같은 일들은 무언가 눈으로 볼 수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국 이스라엘이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 주권을 찾는 것입니다. 로마를 격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요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천국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고 말하는데 이미 임했다면 당연히 우리가 볼 수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가? 아니지 않는가?'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정확하게 짚어주십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눈은 상당히 물질적인 곳에 한계되어 있고 물질적인 것에 가려져있습니다. 물질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자기들 눈에 무언가 보여야하고,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손에 잡을 수 있어여 하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그것이 있어야지 천국이고 하나님의 나라이고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근간에 와서 이 말씀은 훨씬 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바꾸어야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먼저 이 눈을 가지시고, 인생사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좀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에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안타까운 말을 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고린도 교회에 있었을 때 나는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로 생각하고 어린아이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나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음식,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못하고 영양이 별로 없는 젖을 먹였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여러분들은 내가 깊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단단한 음식을 주면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나 나와서 보니 그때까지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눈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밖에 보지 못하는 일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것이 있어야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것을 그들 또한 싫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영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말만 영적이고 말만 종교적입니다. 

이 눈을 바꾸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슬퍼해도 큰소리치면서 웃을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칠 때에도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는 사람, 모든 사람들이 주머니를 움켜잡고 풀 줄 모르는 그때에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가지고 있음에도 얼마든지 풀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종교인이 아니겠습니까? 내 주머니에 있어야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게 있는 것을 ‘나의 소유’로 생각하는 사람은 참된 종교인이 아닙니다. 

열왕기하 6장의 일입니다. 당시 엘리사의 존재는 적국에 상당히 위협적이었습니다. 적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군은 어떻게 하든 엘리사를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적군이 가득 둘러싸여있었습니다. 다급한 사환은 큰일 났다고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이보게, 자네는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모르는가?”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이 사환의 눈을 밝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사환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밝아진 사환은 깜짝 놀랐습니다. 엘리사와 사환을 둘러싸고 있는 적군들 뒤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군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하고 세상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누릴 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좋은 집에서 찾고 돈에서 찾습니다. 좋은 차, 좋은 음식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들여 비싸고 멋진 곳을 여행할 때 그것으로 행복을 찾습니다. 이 일이 해결되기만 하면, 저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습니까? 큰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로 행복을 주었던가요? 있으면 정말로 좋을 것 같은 그것이 있으니 정말 행복이 찾아오던가요? 이것만 해결되면 나는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는 하던 그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정말로 그렇던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한 친구가 횡재를 했습니다. 본래 간호사를 하던 사람인데 어찌하다 조그마한 건강 관리회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회사를 인수한 지 1년 6개월 만에 대기업에 그 회사를 팔았습니다. 횡재를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지만 더 이상 돈을 벌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모든 것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신과 의사가 한참 지나고 난 뒤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가 “그래, 여행도 마음대로 하고, 갖고 싶은 것도 갖고, 돈도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고 지금도 얼마든지 쓸 수가 있는데 그 흥분이 사라지고 나니 모든 것이 다 본래대로 돌아가고 말더라.” 라고 진솔하게 대답했습니다. 지금도 더 새집을 가질 수 있고, 더 좋은 물건도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쓰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더 좋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가 이렇게 횡재할 그 즈음에 정신과 의사의 또 다른 친구가 공교롭게도 에이즈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이도 횡재한 친구와 같은 나이입니다. 한참이 지난 뒤 만난 그 친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말할 수 없는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1년이 지나면서 많은 것이 달라지더라. 지금은 병들기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나는 옛날보다 더 행복하고 옛날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감사하고 있다. 아주 분명한 것은 그 무서운 병이 나의 삶을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켰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찾아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것에서 찾아내야하고,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에서 누릴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통해서 풀리지 못한 문제가 풀리고, 받지 못한 복을 받고, 횡재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국은, 행복은 너의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천국은, 행복은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해결되어야지 천국이 이루어지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소유해야지 천국이 이루어지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이 자리에서 이 상태대로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얼마든지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 혹시라도 지금보다 덜 좋은 환경, 더 어려운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큰 문제가 생겨나도 얼마든지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복은, 이 천국은, 이 하나님의 나라 파라다이스는 얻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찬송한다고, 성경 읽는다고 다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오래 믿었다고 얻는 것도 아니고, 늦게 믿었다고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위해 모든 시도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 또한 이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힘들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어쩌다 천국 같은 삶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잠시가 지나고 나면 또 전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는 말이 경제학에 있습니다. 한계효용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행복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았던 일들도 조금만 있으면 다 별것이 아닙니다.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콜롬비아 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야한다, 이제는 각국의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제정책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정책들이 여러 나라에서 먹히기도 하고 실제로 하지도 못하면서도 이런 말만 가지고도 국민들로부터 표를 많이 얻는 정당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유엔 총회에서 행복을 증진하는 회의를 가졌습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국민들, 시민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논했는데 모인 전문가들 모두 한결같이 마지막에 확고하게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이제 각 나라 정부는 국민소득 확대보다 국민의 행복을 추구해야한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습니다. 부탄이라는 나라는 1인당 국민 총생산이 2,000달러 안팎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유럽 신 경제 재단에서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를 보면 부탄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국민 100명 중 97명이 나는 행복하다고 답변했습니다. 한국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2만불 정도로 부탄의 열 배인데 그때 같은 시기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은 143개국 중 68위를 차지했습니다. 

부탄이 이렇게 된 것은 정책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프리 삭스가 콜럼비아 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것이 1983년이었는데, 이 나라는 이미 1970년에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행복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사실은 부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이름만 다르고 모양만 다를 뿐 다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부탄이라는 나라가 특별히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그것이 항상 정답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국가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정책을 집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하고 확실한 정답을 찾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이 정답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주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온전하게 모실 때 정말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같은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입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다 예수님을 주인 자리에 모시는 것은 아닙니다. 한쪽 귀퉁이에 모셔놓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이것만 온전히 되면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면,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고 그 예수님을 따라 살 때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그렇게 살 때 신비한 행복이 있습니다. 정말로 좋습니다. 옛날에는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이 있습니다. 좋고 편안한 감이 있습니다. 큰소리 치고 주장할 때는 행복이 없었는데 예수님처럼 겸손할 때는 이상하게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할 때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복에 대해서 가르친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질 때 행복합니다. 희한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 없든 간에 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주님만 있으면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주님만 계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애통한 마음을 가질 때 행복합니다. 좋지 않은 일을 보고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면 이상하게 내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슬픈 사람, 불쌍한 사람, 병든 사람들을 보고 슬퍼할 때, 그들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할 때, 정말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 손을 한 번 잡아줄 때 이상하게 내가 행복합니다. 내가 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내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힘들어 할 때 평화롭게 만들어주면 행복합니다. 정말 최고의 남편은 아내의 모든 것을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진실한 심정으로 살아갈 때 아내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합니다. 내가 가는 곳, 내 회사를 행복하게 하고 평화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모이는 곳의 다른 사람을 평화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도 행복하지만 내가 먼저 행복합니다. 고함지르고 큰 소리 치면 기분 좋을 것 같지만 돌아서면 괴롭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바보 같게 보일 수 있지만 이상하게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합니다. 옳은 것을 추구하고 바른 것을 이루려고 할 때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의(righteousness)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미움이 없어지고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 이해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을 이해합니다.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내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이 없습니다. 긍휼이 바로 그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설 때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라고 소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줘도 남는 것을 줄 때는 덜합니다. 내가 정말로 아깝고 귀한 것을 빼서 줄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는 것도 귀하지만 정말로 귀한 것은 없는 사람들, 모자란 사람이 주는 것입니다. 이 행복은 10년, 20년이 갑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행복은 다른 데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죽하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는 이렇게 하면 힘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행복이 있고 예수님의 길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 때 행복합니다. 천국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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