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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없이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롬 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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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롬 2:25-29)

오늘날 데살로니키(Thessaloniki)로 불리는 성서의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현재 그리스의 살로니카(Salonika) 만에 있는 옛 마게도냐의 중요 항구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치열한 권력 쟁탈전에서 승리한 가산더(Cassander) 장군이 승리 후 잃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세운 도시입니다. 그리고 자기 처의 이름을 따라 데살로니가라고 지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여 전도하자 많은 교인이 생기지만, 핍박도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바울 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했던 야손 일가는 변을 당했고,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를 예배하지 않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고발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신변을 걱정한 나머지 밤중에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행17:1~10).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간 것은 50-51년경의 제2차 전도 여행 때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적어도 몇 달을 머물렀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돌리자 하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몇몇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경험했던 사역과 수난이 직접 연관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 선교를 위해 방문했던 지역마다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고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유대인 중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겨났죠. 물론 사도 바울과 당시의 사도들 역시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고요.

그들에게 있어 조상 적부터 믿고 따랐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고, 예수를 믿는 것이 큰 결단이기도 했지만, 유대교 전통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왜 이방인도 구원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참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문제보다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런 내부적 갈등의 문제였던 것이죠.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할례’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는 징표로 할례를 명령하셨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할례를 받은 택하신 족속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생각, 즉,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 복음을 이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논쟁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앙적 견해를 보여줍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사랑과 평화보다는 반목과 질시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죠. 아무리 생각해도 복음의 본질과는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의 문제가 단순히 할례냐 아니냐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의 삶에도 아주 보편적으로 퍼져 있다는 것이죠. 아니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택함을 받았다는 자들이 범하기 쉬운 우를 우리에게 다시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죠.

지난주에 어떤 교인이 저에게 보내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같이 맞춰보세요.
일명 “닭 시리즈”인데요.1.세상에서 제일 빠른 닭은? 후다닥2.제일 섹시한 닭은? 홀딱3.제일 망한 닭은? 쫄딱4.죽은 닭은? 꼴까닥5.그럼 미친 닭은? 헷가닥▶몇 번이나 웃으셨어요?이런 닭...저런 닭이 있어도 역시 최고의 닭은 '토닭 토닭'입니다그리고 살다보니 최고로 멋진 사람은 늘 곁에서 격려해주며 토닥토닥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조크를 넘 재밌게 잘하시지만, 이것도 유치하지만 재밌죠? 젊은이보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유머코드입니다^^

저에게 제일 맘에 드는 말이 “토닥토닥”입니다. 이게 그 닭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사실 믿음의 공동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서로 토닥토닥 격려하고 사랑해주는 모습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신앙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하고 질시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늘 신앙의 이름으로라고 하지만, 사실은 내 속에 굳어진 지극히 율법적인 이유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신앙의 전통이 참 아름다운 것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죠. 그러나 어떤 전통도 신앙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하나님의 진리를 앞서는 것을 “율법적”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영원히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인 ‘할례’가 복음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혹시 복음의 장애가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오늘 이 부분을 데살로니가에서 겪었던 사도 바울의 논쟁을 통해 짚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율법적 교만과 함정

할례는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의식입니다. 창세기 17장을 근거로 보면,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참여한다는 상징입니다. 태어난 지 8일째 이루어지는 이 가입식을 통해 하나님이 이 사내아이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셨으며, 그 아이는 “약속의 아들”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키는 시각적 장치입니다. 
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어느 순간에 본질을 잃어버리고 외적인 장치에 연연하게 된다는 것이죠. 왜 시각적 효과가 필요합니까?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할례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분을 닮아가고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육체적 할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가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종교적 의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형식적 종교의식입니다. 이 종교의식에 얽매이게 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이중적이 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본문 25-27절입니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아무리 할례를 받았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는 소용이 없죠. 하지만 할례를 받지 않고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할례를 받은 사람보다 낫죠. 결국,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뭘 합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가 아닌가요? 교회를 다닌다고 우리가 다 교인입니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복음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지금 복음의 탁월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아닌 우리의 삶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듣고 알아도 그것이 형식적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결혼을 하면 그 징표로 반지를 교환합니다. 반지를 끼고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지를 끼고 안 끼고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지를 끼는 것이 아니라 반지를 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반지를 낌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짓을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반지를 끼도 다니면서 다른 짓을 하는 게 낫습니까? 반지를 끼지 않더라도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까? 반지를 끼기 때문에 절대로 신실해지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이 반지를 껴야 합니다. 만일 그 반지가 효과가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
마치 할례를 받음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율법적 교만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반지가 효력을 가진 것이라면, 나쁜 짓을 할 때는 반지를 빼놓고, 집에 돌아오면서 반지를 낍니다.
율법이 마치 그렇습니다. 
율법을 기억할 때는 율법을 지킵니다. 남이 보는 곳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율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멋대로 살아갑니다. 율법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좀 잘못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요즘 하나님이 계속 그런 도전을 주십니다.
주일에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율법적인가? 혹시 우리 중에 교회를 다니면서 이방인들과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교회를 다니면서 의무를 다하고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적 형식주의자들은 아닌가?

요즘 우리 교인들이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흩어져서 섬기는 일을 많이 합니다. 율법적으로는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옳지만, 성경의 진리에서 보면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어떻게 신실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장소와 형식을 벗어난 ‘참 할례’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

저에게도 참 어려운 일이지만, 진정으로 이 교회에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 이 교회를 떠나는 것, 그것이 건물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죠, 복음의 진리를 떠난다는 것이 아니죠,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참된 예배자가 아닐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우리 청년들이 제천에서 어려운 교회를 섬기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의 고민이 이런 것도 포함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착각하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놀러 가서 아무 곳에서나 예배를 드려도 좋다! 인터넷이 있으니 장소를 벗어난 모든 곳이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참 멋대로죠.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과 우리의 헌신이 있어야 드려지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형식을 파괴하는 것, 전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죠. 아마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것을 염려하다 전통주의에 빠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형식을 잃어버리면 내용도 잃어버릴 수 있는 인간들의 약함 때문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절대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으며 형식을 지킨다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새로워진 사람은 새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할례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의 삶을 바꾸었다는 표식입니다. 그리고 그 수술의 형식이 “순종”이라는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로마서에서 강변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 언어로 풀어보면, 우리가 믿는 신앙이 언제부터인가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라는 것은 다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내 일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조금 그 말을 수정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시키는 일이 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있어서도 늘 고민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 교회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도 제가 참 힘들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목사가 하라면 해야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편하게 사는 것보다 쉽게 사는 것보다 진리를 향해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종교가 짓는 무서운 죄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자들이 종교꾼이 될 때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리고 그곳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쉽게 넘어갑니까? 

목사가 뭔데 교인들에게 막말을 하고 협박을 하는 겁니까? 그런데 교인들이 그런 말을 들으며 무서워합니다. 진리에서 벗어난 것은 목사가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가 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중세시대 가장 흉악한 범죄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매한 교인들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벗어난 일에 집단으로 참여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성지를 탈환한다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이 전쟁터로 나갔고, 성지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의 피가 하나님께 대한 적개심을 만들었습니다. 
실상 그곳 성지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는데, 하나님을 따른다는 자들은 그 “성지”를 탈환하겠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 비 신앙적인 일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으로!” 외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진리가 아닙니다. 

요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각종 모임을 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을 하기 전에 하는 일들이 꼭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입니다. 
그런데 종종 예배를 빨리 해치우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것을 봅니다. 
종교마다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종교의식이 거행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행해지지 않는 곳에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셔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이고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 맹목적이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 진정한 교회에서는 진리 안에서 얼마든지 야단치고 혼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드셨던 것처럼 매서운 질책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을 바라보는 마음 때문입니다. 제대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무리한 일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순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혼이 잘 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중세 교회가 타락한 것은 무조건 순종하는 교인들을 만들려고 성직자들 외에는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만 볼 수 있도록 성서를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가장 큰 종교개혁의 역사는 당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접하게 되자 무너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교권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교권이 무너진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교회가 무너진다고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서운 일이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보며 무너지지를 기다리지 않을까? 어쩌면 말씀을 벗어난 신앙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핍박의 시간을 지나가도록 하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무섭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난 교회가 교회가 아니다!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크리스천들이 아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복음을 사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제는 "교회를 다닌다고 다 크리스천입니까?"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라는 말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면적 유대인이 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하지요.
교회를 출석하는 형식적인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진정한 크리스천이어야 하지요. 

찰스 스윈돌이 쓴 로마서 주석에 의하면 형식적 신앙이 “종교”가 되어버리면 적어도 세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고 쓰고 있습니다. 

첫째, 종교는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강조한다. 종교는 경건한 행위와 겉으로 드러나는 희생적인 수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종교는 사람을 기진맥진할 때까지 바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칭송받기 위해 하는 선행을 강조한다. 

둘째, 종교는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하고 부차적인 문제를 강조한다. 상징, 전통, 의식이 교회의 실제 사명이나 교인들의 본질적이고 참된 성숙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외부로 드러난 모습이 진지한 믿음이나 순전한 복종보다 더 관심을 받는다.

셋째,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기심을 조장한다. 정말이다. 종교적 열심은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무엇을 하건 그 사람의 동기는 남들에게 보이고 알려지기 원하는 마음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생경한 일이다. 종교는 점점 더 권력과 명성이 우위를 차지하려는 교만을 조장한다.


참된 그리스도인 되기 

오늘 본문의 핵심은 형식적인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8-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라 내적으로 형성된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의도는 그들의 신앙적 전통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유대인이라는 이름값을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제목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책 서문에 보면 “이름값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
위로하시는 하나님,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나를 살피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 등등.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 우리가 예배하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은 그분의 이름에 걸맞게 행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서 믿는 자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단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 이름값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드러난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리라는 것이지요.

“유대인”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의 전통이 귀하고,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통을 가지고 있어도 이름뿐인 “표면적 유대인”의 삶은 능력이 없습니다. 가장 불쌍한 것은 이름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누구다!”라고 말하지만, 상대방에게 무시당할 때 얼마나 무안합니까?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자신을 소개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냉담할 때.

할례받은 자로, 유대인으로 그들은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라는 말을 참 자주 합니다.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경 쓰면, 사람들도 우리를 주목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경 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세상도 우리를 무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이 있죠. 
“저 사람에게는 포스가 있어, 저 사람에게는 아우라가 있어!”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인정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열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죠.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열심을 신앙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정에 우리가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많은 사람을 도우며, 멋진 건물이 들어서고 있습니까? 교회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멋진 것들입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런 일들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율법적 종교와 진정한 믿음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이면적 유대인”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진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 가치와 기준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이 힘을 잃는다는 것은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참다운 예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영적 예배”란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면 그것을 보고 따라와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삶의 방식, 우리가 믿는 것을 따라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인도하면 모두를 어둠과 사망으로 인도할 수도 있기에 말입니다.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은 진리로 이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교회가 진리를 드러내는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가?
누군가 우리를 따라온다면 진정한 소망이 있는가?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더럽게 곯은 상처를 드러내는 날카로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면서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참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의 마음이 아플 텐데. 그런데 진리는 누구의 상태를 고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냥 선포되고,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 앞에서 누군가는 결단해야 하고, 아파해야 하고 그렇게 따라가야 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드러나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교회에서 가르쳐온 것들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고, 건강해진다는 복음입니까? 과연 물질적인 풍요함이, 건강이 회복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회복됩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신뢰함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표면적 교인이 아니라 내면적 교인입니다. 교인 같은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인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참 힘들지만, 도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관계는 인격적이고 발전적입니다.

지난주 영성훈련을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은 인격적 만남이 아닌 신뢰 관계에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하던 쉽게 들어주실 겁니다. 아직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기보다는 믿음의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하나님께서 안 된다 하시면 떠나갈 것 같아 많은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이 보이지 않는 때가 오고,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때가 오고, 우리의 소원을 꺾으시는 때가 틀림없이 옵니다. 이제는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진리의 잣대로 우리의 삶이 인도함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들어지는 때를 지나가며 인격의 성숙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깊은 내면의 신앙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자라나야 하고, 성숙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알게 되면서 같이 마음 아파해야 할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부탁했던 청년의 눈물이 오랜 잔상으로 남았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아플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주십니다. 내 신앙을 지키고, 내 법을 지키고, 내 할 도리를 하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이 참 마음 아팠던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교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 
자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상처를 입고.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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