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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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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눅 18:1-8)

우리들이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가면서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자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야 하는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을 때에는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많은 군중을 가르치시고, 치유사역하시는 중에도 기도하셨습니다. 

막1:35에서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항상 한적한 곳을 찾아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열어가고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야겠습니다.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담임목사인 빌 하이벨스목사는 기도의 경험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당시 아버지는 비교적 젊으셨고, 대단히 활동가였다고 합니다. 빌 하이벨스는 미시간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차를 몰고 달려가면서, 아버지가 없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계속 꾸려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들을 믿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날 밤 침대 맡에서 빌 하이벨스는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저는 아버지의 죽음을 제 마음 속에서 네 인생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고 안타깝게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마치 막다른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능력이 있다. 너는 나로 족하다. 지금은 이 사실이 의심스럽겠지만, 나를 신뢰하거라”라는 응답을 받았답니다. 

그 후로 빌 하이벨스는 한 번도 그 기도의 응답은 오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도 의심의 안개에 휩싸여 고민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정말 슬펐지만, 그 기도응답을 들은 후로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무슨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보다 더 자상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능력으로 그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는 한 번도 방황하지 않았고, 나침반 없는 배처럼 표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기도하게 하셨고, 그 기도에 응답하셨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하이벨스와 함께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를 실천하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아시는 사람입니까? 기도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아시는 사람입니까? 기도를 체험적으로 아시는 분입니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항상 들어주신다고 믿는 분입니까? 내가 이런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은 자녀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내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고 주님에게 시시콜콜 말씀드리는 것이 송구스럽게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생각하시고 있습니까? 

저도 기도에 대하여 말씀드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의례적인 기도, 문안 인사드리는 기도, 보고하는 기도 정도로 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기도가 그런 수준이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주 만나는 기도, 실속 있는 대화, 저의 영혼의 문제까지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로서 하나님 앞에 내가 겪고 있는 더 많은 것을 보고해드리고, 하나님의 의견을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꼭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신뢰함, 세상을 살아가는 확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위로, 기쁨으로 가득차고 있습니다. 

빌립보서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맛보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비결은 지속성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삼상12:23에서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기도하시는 중에 지금은 기도를 쉬고 있으며, 응답이 더디다고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해보았자,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기도에 대하여 의심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아버지가 되시기에 나 같은 것과 대화하실 수 있는 시간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시느라고 너무 바쁘시기에 사소한 나의 문제 같은 것은 관심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제가 아무리 바빠도 저의 딸들이 전화하면 항상 받습니다. 손자들이 전화하면 정말 반갑습니다. 바쁘니 전화 걸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지만, 가장 기다리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과 대화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만 알고 가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기도가 아니어도 대화의 시간, 자녀들과 대면하여 한 자리에 앉아 말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일에 본을 보여주셨고,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을에 과부가 한 분이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하고 졸랐습니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혼자서 말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인 한 과부는 정말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과부로 산다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 과부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과부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당하였고, 경제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과부들은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과부들은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고, 직업도 없었고, 돈, 재산, 지위, 권력은 그들과 멀었습니다. 다행히 과부를 돌보아줄 아들이나, 남편의 형제들이 있다면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과부라면 그 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과부에게는 적대자가 있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고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인지, 과부로 혼자 살고 있으니, 물질적인 손해를 주고 갚지 않는 사람인지, 원수라고 하였고, 원한을 풀어달라고 한 것을 보면 적대자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과부가 혼자서 원한을 해결하고 문제를 풀어가기에는 너무 힘이 버거웠습니다. 이 과부 혼자의 힘으로는 도무지 원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힘 있는 일가친척도 없습니다. 그의 억울함을 함께 고민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리에서 자주 만나는 원수는 기고만장하였고, 안하무인격이었습니다. 자기 혼자만 잘 나고 자기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입어 고생하는 과부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해결해줄 사람은 재판관뿐인데, 그 재판관은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과부의 원수나 다를 것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불의한 사람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고, 사람의 인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가난한 과부의 호소하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 과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재판관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재판관에게 찾아가는 과부를 향하여 시간낭비하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재판관은 사람을 몰라보는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과부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과부의 사연을 들어보지도 않고, 묵살해버리고 법정에서 쫓아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과부에게는 재판관이 유일한 희망이요, 그가 살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재판관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사건으로 받아주지 않을 때에, 과부는 작전을 세워야 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되고 보니 뇌물을 준비할 수도 없었고, 정부 고위층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힘을 써줄 사람도 없고, 변호사를 살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과부는 이에 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재판관이 원수를 갚고, 원한을 풀어줄 유일한 사람이고 보니, 부탁하고 또 부탁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호소하고, 들어줄 때까지 조르고 또 하소연하고 들어줄 때까지 조르고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재판관이 자기를 돌아보게 하려고 자주 찾아가서 졸랐습니다. 재판관이 집에 퇴근할 때에도 가서 얼굴을 보게 합니다. 찰거머리같이 따라다니고, 부르짖어 호소하고, 마치 일인 시위하는 것처럼 번거롭게 합니다. 

재판관이 생각합니다. 얼마동안 과부의 하소연 같은 것을 묵살하고 듣지 않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어디 조용히 살 수가 없으니, 귀찮아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재판정에 출근하면 더 먼저 와서 진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외칩니다. 재판관이 어디를 나가면 또 따라나섭니다. 아이고, 내가 그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결단하고 해결해주었다고 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선량한 사람이 아닙니다.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 때문에 들어준 것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서 잘못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풍유적인 해석, 알레고리(Allegory) 로 해석하여 가난한 과부는 성도들이요, 불의한 재판관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도 불의한 재판관과 같이 우리가 졸라대야 하고, 또 부르짖고, 호소하고 들어줄 때까지 기도해야 겨우 들어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곡해입니다. 

이 과부의 믿음을 보라, 얼마나 간절하였으면 그렇게 졸라댈 수 있는가? 우리도 하나님을 귀찮게 하여 들어줄 때까지 매달려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래 원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천국의 문을 쾅쾅 두드리고, 성전이 떠나가도록 소리치고, 몇 시간이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지치게 만들고 귀찮게 하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정성들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려고 하는데, 우리가 빼앗아가듯이 가져가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6절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물며”라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비유입니다. 비유는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서로 반대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부와 같지 않습니다. 그 과부는 가난하고 무력하며 사회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형제자매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히 간구할 수 있는 아들과 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닮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마치 하나님에게 비교한 것부터 죄송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보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움켜쥐고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복을 달라고 졸라대고, 하나님은 주지 않으려고 다시 감추시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관대한 사랑으로 자식을 대해주셨습니다. 아낌없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갈 때마다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주시는 부모님이셨습니다. 

마7:9-11에 보면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아버지는 사실 없습니다. 자기는 도둑질하여 자식을 먹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 자식에게만은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싶은 것이 육신의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하물며”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오래 끌고, 들어주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피하였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간구를 신속하게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애원하는 기도, 안타깝게 부르짖는 기도에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속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타케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일어날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빨리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하고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간구하는 그 믿음이 사라질 것이라고 탄식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간구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그 기도의 능력을 모르고 사장시킬 것이어서 우리 주님은 탄식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확신하고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적을 것을 내다보시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로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든 난제를 풀 수 있는 마스터 키,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낙심하고 있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실망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해 보세요 / 마음을 정결하게 뜻을 다하여/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히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옛날 기도에 응답하시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막1:24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엡3:20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은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간 기도하는 났다“고 하셨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사람인 죠지 뮬러는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라고 하며, “늙어 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라. 그러해야 신령한 일에 냉냉해 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간구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더 좋은 것으로 들어주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시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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