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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요 9: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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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내가 믿나이다 (요 9:13-41)

고침받은 후의 이야기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13) 고침 받은 직후에 사람들은 이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역사다’하는 사실을 공인받게 하려는 의도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회나 회당의 주역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정받는다면 곧 메시아의 이적을 공인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를 배척하기로 결의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자마자 고침 받은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14-15) 

고침 받은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우선 안식일에 금지된 방식으로 고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것입니다. 눈 뜬 맹인은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15) 

바리새인들은 즉각 치료자 예수를 정죄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16) 유대인의 전통인 미쉬나에 보면 안식일에 금지된 39종류의 일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세 가지 금지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무엇이든지 반죽하는 일을 금합니다.(미쉬나 안식일7:2) 흙을 반죽한 일은 이 조항에 위반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물질을 섞는 일을 금합니다.(24:3)  침을 뱉아 흙에 섞은 것은 이 조항에 위반됩니다. 
셋째로, 상처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를 금합니다.(14:4) 

그러니 소경의 눈에 발라 준 것도 위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 규칙을 위반하면서 치료했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 사람들은 예수가 행하는 이적들(복수형)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다시 고침 받은 본인에게 묻습니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 그는 한마디로 단정합니다. 선지자요!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17) 그가 예수를 지체 없이 선지자라고 고백한 것은 매우 단호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선지자라 한 것은 예수를 가장 높여서 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선지자는 율법보다도 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부모에게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8-19) 

그들은 소경으로 났다가 고침 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본래 소경이 아닌데 소경이었다고 거짓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무슨 마술이나 부려서 일시적으로 눈을 떴다고 홀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말을 믿지 않고 이제는 부모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부모는 간단히 답합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0-21) 

부모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과, 소경으로 난 것만을 확인하고, 치유 사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마다 회당에서 출교하기로 결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22-23) 
  
출교란 회당에서 쫓아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형벌은 견책과 근신과 출교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출교는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출교에도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가벼운 출교 조치로써, 이 처벌을 당하면 당사자는 30일간 회당 출입이 금지되고 사람들에게 4규빗 이상 접근치 못하도록 했습니다. 

둘째로, 무거운 출교 처분이 있었는데 이 조치를 받으면 회당 출입이 무기한 금지될 뿐만 아니라, 교제나 매매나 함께 식사하는 것까지 금지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후에도 돌팔매질을 하고 그를 위해 우는 것까지 금지시켰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두려워서 부모는 본인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미성년의 경우는 부모에게 책임이 있지만 성년이 된 후에는 책임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13세가 되면 성인 취급을 했습니다. 눈 뜬 사람의 부모는 자식의 문제로 인하여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에 대한 입장 표명을 회피했습니다.
  
부모에 대한 심문이 별 효과가 없자, 다시 본인에게 화살을 겨눴습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라’는 말입니다.(수7:19) “소경으로 났다가 눈을 떴다고 거짓말 하지 말고 솔직하게 진실을 말해라.  그리고 예수란 자가 속임수를 행한 것을 인정하고, 안식일을 범한 죄인임을 시인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다시 한 번 사실만을 확인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 심문자들이 이론적으로 묻는데 대하여 이 사람은 사실만(fact) 대답 합니다. “나는 소경으로 태어나서 이때까지 살다가 예수에 의해서 눈을 떴습니다. 예수를 정죄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 그들은 여전히 ‘어떻게’ 떴는가를 묻습니다. 안식일 위반 사항에 대해서 계속 따지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대답합니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  그의 말 속에는 자기는 이미 그의 제자가 된 것을 암시하고, 한편으로는 심문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비꼬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 심문자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펄쩍 뛰면서 욕을 했습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8-29)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예수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믿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모르겠다고 공언한 이 말에 의해 이들은 결정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또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0-33) 내가 당한 큰 이적을 당신들 같은 종교 전문가들이 모른다면 누가 알겠는가 하는 비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 죄인이라면 어찌 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다급하니까 저주가 나왔습니다. 네가 죄 가운데서 소경으로 난자가 아니냐는 말인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가 소경으로 난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소경으로 난 주제에 남을 훈계하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쫓아냈습니다. 드디어 유대 사회에서 출교해버린 것입니다.
  
그가 쫓겨난 후에 예수께서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출교 당했다는 소식을 이미 들으셨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35) 인자란 말은 유대 사회에서 메시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바리새인들에게 박해당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예수를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출교를 당하면서까지 예수를 옹호했습니다. 이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안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주님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열렸는지를 묻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 

그는 메시야를 믿고자 했습니다. 다만 누가 메시야인지 몰라서 못 믿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 이 사람은 감격했습니다. 자기 눈을 뜨게 해 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분을 위해 변호했는데, 이제 눈앞에 계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본인의 입으로 듣게 된 것입니다. 그

는 이미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로 인정함은 물론 그 이상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 없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그는 엎드려 절하고 경배했습니다. 이제 중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바로 이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 

사도 요한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맹인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육신의 눈을 뜬 기적보다 그가 영의 눈을 뜨게 된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그의 신앙이 어떻게 발전됐는지 살펴봅시다.  
  
첫째로, 그는 처음에 오직 육신의 눈을 뜨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전혀 상관치 않았습니다. 눈만 뜨게 해 준다면, 누구의 말이라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무조건 가서 씻었습니다. 박수무당이든 산신령이든 눈만 뜨게 해준다면야!  육신적 문제, 먹고사는 일, 의식주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전형적인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참 신앙에 이르기 전까지 누구나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너는 왜 의식주에만 관심이 있느냐? 비난할 필요도 없고, 비난할 자격도 없습니다.  
  
둘째로, 눈을 뜨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예수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집니다. 내 자신만 바라보던 눈이 이제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향합니다. 이런 관심도 자의로 가지게 된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면서, 예수를 정죄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면서 점점 예수가 누구인지 생각합니다. 나를 고쳐주신 고마우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정죄하는데, 과연 내가 예수를 정죄해야만 하는가?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 분이다! 아니,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부인하면 안 된다! 그는 처음 예수를 비범한 사람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지자라고 했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옹호한 것 때문에 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단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예수를 부인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것은 신앙의 직전 단계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40) 신앙은 긍정에서 옵니다. 믿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절대로 입으로 부인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그런 처지에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출교당한 직후 두 번 째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는 지체없이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갈망하던 바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는 처음에 육신의 눈만 떴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영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를 한 사람으로 알았다가(11), 그 다음은 선지자로(17), 그 다음은 스승으로(27), 그 다음은 하나님께로서 온 분으로(33), 그리고 마침내는 메시아로(38) 믿고 경배합니다. 그는 처음에 소극적으로 예수를 정죄하지 않는 선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다음은 제자로(27), 마침내는 경배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될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 나와서 돈 문제만 해결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고민하던 건강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관계가 해결되고, 소원이 성취되면 믿음의 효능이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좀 더 발전된 사람들은 몇 가지 은사를 받았으니 신앙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신앙이 정체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정체되면 기계적인 신자가 됩니다. 감동은 없고 습관적으로 오락가락 합니다.  교회를 십년 이십년 다녀도 여전히 시험에 넘어지고, 유혹에 빠집니다. 고난이 심하면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납니다. 진정한 신앙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그를 믿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워질수록 생명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습니까?  예수님과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나의 모든 삶이 풍성해집니다.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믿나이다!’ 하고 고백하는 단계까지 발전했습니다.  이런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반이나 주님과 숙식을 같이 했으나 주님을 영적으로 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육신적인 예수만 보고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무당 집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름 석 자만 올려놓아도 복을 빌어주고 액땜을 해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에 이르러야 합니다. 욥은 시련을 통과한 후에 고백했습니다.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매일의 삶을 통해서 더 깊이 알고, 더욱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시기 바랍니다. 육신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인간 예수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선지자 예수에서 신성을 지니신 예수로 발전하고, 날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통 속에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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