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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안에서 살아가기 (1) (시 131:1-3,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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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안에서 살아가기 (1) (시 131:1-3, 빌 2: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성공이고 잘 살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부모들의 마음과도 비슷하십니다. 우리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고 잘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이 세상을 위하여 뭔가를 이바지 하는 삶을 기대하십니다. 자식들이 병들고 실패하고 남들보다 처지는 모습을 보면서 속상해 하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도 우리 부모들의 마음과 같이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성공하고 잘 살고 건강하게 살기만을 바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번영신학에서는 그렇게 해석하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성공하고 풍부해 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 우리들이 세상에서 실패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노예로 팔리게 하셨고 누명쓰고 감옥에도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원하거나 그 부모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부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호세아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때로 가난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여 제자들은 한결같이 가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성한 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가난함 중에서도 주님을 극진하게 공궤하고 섬겼습니다. 또 하나님은 때로 병듦도 요구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전도자로서 충실하게 전도생활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몸에는 중한 병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그 병이 간질병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독한 안질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 자신은 그 병을 내 몸에 박힌 가시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아팠고 불편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쳐 달라고 기도하였는데도 그 상태로 족하라는 응답만 주어졌습니다. 우리들이 건강하고 풍성한 것만 반드시 복은 아닙니다. 그것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형통과 거리가 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예수의 마음을 가질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에서 예수의 마음을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들이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비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비움의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을 예수께서 실행하셨습니다.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5-7)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격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영광됨을 포기하고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그 말은 “마음을 비웠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스스로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 사탄이 찾아와 돌로 떡을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놀랄 것이고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되는 마음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때 사탄의 말대로 뛰어내리고 떡을 만들어 먹고 나누어 주셨으면 하나님처럼 영광은 얻고 박수는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더라면 예수는 더 이상 메시아도 하나님도 예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스스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좋아하십니다. “비운 마음”, 이 마음이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비워야 합니다. 검진을 받으려면 먼저 속을 다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속을 다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마음을 다 비워야 가능합니다.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10일간 이 비움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싸움이 일어났을 때 마음을 비웠습니다. 조카 롯에게 재산을 다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마음을 비우지 못했습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비우라고 하십니까. 그래야 평안이 주어지고 문제를 쉽게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은 것 때문에 체하여 속이 불편할 때는 토해 내고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시원해집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릿속이 생각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자리에 눕기 전에 먼저 머릿속을 비워야 합니다. 불임 여인들이 아이를 기다립니다. 너무 골똘히 기다리기 때문에 더 지체되고 끝내 불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음을 비웁니다. 그리고 입양하여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비워 평안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비움이 기적을 만듭니다. 

암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암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련입니다. “나는 이제 곧 죽는다, 암균이 내가 잠자는 사이에도 내 몸을 갉아먹고 있다, 내 온 몸에 암이 퍼져가고 있다, 나는 이제 곧 죽는다” 암환자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잠이 오겠습니까?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이 생각이 암균보다 더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레 죽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암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암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마음을 비우라는 말입니다. 비우면 가벼워집니다. 생각이 가벼워지고 짐이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먹고 싶어지고 갈급해집니다. 갈급해지면 낫습니다. 고칠 수 있습니다. 채울 수 있습니다. 몽골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몽골은 남북한의 7.4배입니다. 교회가 600개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모여 교육을 하였습니다. 교육에 참가한 목회자 가운데는 1500km밖에서 온 분도 있었습니다. 

비포장도로를 4일 동안 봉고차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차안에서 3일 동안 잠을 잤다고 합니다. 3일간의 강의가 끝나면 4일간 또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힘들게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온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어있었으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가난하였고 또 얼마나 갈급하였으면 그 먼 거리를 불편함을 무릅쓰고 왔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비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어있음, 이것이 모든 방법의 최선입니다. 비움이 최고입니다. 비움 다음에는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빈 마음이었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비웠으니까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하나님 되려고 함이 아니고 스스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마음을 비우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비워야 예수님처럼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각종 유혹들도 이길 수 있습니다. 

초점

예수님은 비움뿐 아니고 사역함에서 초점과 목표가 아주 분명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8)고 하였습니다. 이 대목이 예수가 예수된 대목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낮추고 비우시고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초점과 목표와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낮추시고 비우시고 복종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비움의 종교입니다. 순종의 종교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때로는 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것이 너무 서툽니다. 비우고 순종하고 죽는 것이 너무 서툽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왜 서툴고 주저하고 고민하는가 하면 하나님께로 향하는 내 마음과 관심의 초점이 흐려져서 그렇습니다. 초점이 흐려지니까 영향력이 줄어들고 파워가 약해지고 기능이 저하되는 것입니다. 렌즈에 초점을 맞추면 불이 발생합니다.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한 시간을 쪼여도 불은커녕 아무 반응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렌즈가 초점이 맞추어질 때 먼 곳도 가까이 보입니다. 작은 것도 크게 보입니다. 불투명하던 것이 투명하게 보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지면 이 마음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처럼 복종하고 종이 되고 비울 수도 있고 십자가를 질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삶의 목표가 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창 2장과 3장을 보면 그곳에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2장은 천국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십니다. 에덴동산을 만드십니다. 아담을 위해 배필 하와를 지으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2장을 끝맺습니다. 천국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과 마음과 관심과 초점이 모두 하나님께 집중되고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너를 보았으나 결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았으나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보았으나 유혹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과 생각과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 생각과 관심과 초점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초점과 관심을 하나님께 맞추어 놓고 사십시오. 그러면 너의 티나 주름이나 결점이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아도 유혹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창 2장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3장으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창 3장을 보면 뱀이 다가와 속삭입니다. 아담 부부는 그 속삭임을 듣고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자 아담 부부의 마음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확고함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으로 선악과를 보니까 전과 달리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고 탐스럽게 보였고 그래서 그만 그 열매를 따 먹습니다. 그 후 아내를 보니까 벌거벗었고 치부가 보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가렸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감추었고 숨겼고 변명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부부가 갈등하고 고민하고 흔들리고 시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왜 이렇게 갈등하며 고민하고 유혹에 끌려 다니는가 하면 모두 하나님을 향한 초점이 흐려져서 중심이 흔들린 까닭입니다. 그래서 네 흉이 크게 보이는 것이고 자꾸만 인위적으로 옷을 해 입고 감추고 변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초점이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초점을 상실한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은 곧 예수의 마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온갖 유혹들이 밀려와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순종하고 종이 되어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마음을 품을 때 우리들도 마음을 비울 수가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도 질 수 있습니다.

역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느니라.”(9-10). 예수님은 비웠고 순종하였고 종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적 기준으로는 이제 끝났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이 기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직도 죽음은 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는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죽음은 곧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높이십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셨으나 살아나셨고 살아나심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역설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역설의 삶의 방정식을 이루셨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역설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죽고자 하면 살아나고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습니다. 낮아지면 높아지고 버리면 채워집니다. 기독교는 마이너스 되면 플러스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세계입니다. 예수께서 이 삶의 방정식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야 성공하는 줄로 압니다. 내가 강해야 이기는 것으로 알고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고 안달합니다. 그러니까 고민이 오고 갈등이 오고 충돌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비웠습니다. 낮추셨습니다. 순종하셨고 종 되셨고 마침내는 죽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고 높이셨고 사람들로 그 앞에서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 품을 때 역설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진리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으나 살아납니다. 낮아지나 높이지고 다 비어있는 것 같으나 가득 채어지는 신비의 삶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역설의 삶의 방정식입니다. 이 방정식을 예수께서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움으로 채우셨고 순종으로 승리하셨고 죽음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모두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라, 애통하라, 평화하라, 온유하라, 청결하라 등 모두 역설입니다. 세상적인 이론과는 정 반대의 이론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역설의 삶의 방정식을 실제로 살고,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잘 살고 건강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좋아하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부분 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자들로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들이 이 마음을 품을 때 나는 부족하지만 능히 예수님처럼 비우고 종 되고 십자가를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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