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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때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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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눅 16:19-31)


모든 사람들은 한 생애를 살면서 삶을 보다 즐겁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소원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기쁘게 살고 싶은데 기쁘게 살지를 못합니다.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삶의 방식이 틀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어로 기쁨이라는 말은 'Joy'인데, 이 말은 예수(Jesus)라는 말과 다른 사람(Others)이라는 말과 너(You)라는 첫 자를 따서 만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살고, 나를 위해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기쁘게 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이웃을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나를 생각할 때 인생을 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 삶의 방식이 바뀐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웃도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만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 성공을 향해 달려간 인생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그가 가진 외형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외형을 가꾸고 넓혀봅니다.  오늘 우리가 외형적인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애쓰고 힘쓰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그것만 갖추어지면 인생은 성공한 것이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행복은 외형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외형적인 어떤 환경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생각을 지켜야 됩니다.  자세를 지켜야 됩니다.  습관을 지켜야 됩니다.  생활양식을 지켜야 됩니다.  그러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마다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로 세우면 새로운 기대감과 소망이 살아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건전하게 표현하는 인격적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결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인간의 감정은 언제나 상황에 민감하게 만듭니다.  일어난 사건에 대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언제나 유쾌한 것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쓴 뿌리를 드러내게 만드는 쓰라린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반응하면 우리는 언제나 절망하거나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감정 주도적인 사람을 다른 말로 대응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감정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기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 복도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자기 능력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이 무엇입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성공이라는 그 한 단어를 붙잡기 위해서 무한경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라는 말입니까?  세상에서 남들보다 좀더 넓은 아파트에 살고, 남들보다 좀더 넉넉한 재산을 굴리면서 사는 것이 성공일까요?  반대로 이야기를 하자면, 등골이 휘어지도록 뼈빠지게 살아보지만 남들처럼 여행 한 번 가보지도 못하고, 아이들에게는 다른 아이들이 입는 그 흔한 메이커 옷도 입혀 보지 못하면 실패인가요?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너무 소유 중심에서만 그 해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그 사람의 재산이나 학벌, 사회적인 명예를 놓고 성공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의 출세를 놓고 인생을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행복과 불행의 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인생을 살았던 인생 선배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있고 없음이 성공과 실패가 아니요, 그것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남들보다 조금 더 있으면 편할 것이고, 없으면 조금은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편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자동차가 없으면 어디를 갈 때에 불편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없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소유에서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더! 더!"를 외치면서 인생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자기의 이름을 더 내기 위해서, 자기의 명예를 더 높이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인생은 결국 죽을 힘을 다해 일하지만 결국에는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내가 지금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났느냐를 놓고 그가 성공자의 삶을 살았느냐, 아니면 실패자의 삶을 살았느냐를 말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부귀명예를 누렸다고 할지라도 그 마지막이 지옥이라면 그의 인생은 분명히 실패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비록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지만 그 마지막이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 인생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인생의 마지막에 지옥의 고통 속에서 후회하는 인간의 탄식이 있고,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성공자의 개선가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 것을 계속해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너의 마지막 때를 기억하며 살아라.  순간의 후회가 아니라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  반드시 그때는 온다.  아니 곧 올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후회를 많이 한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 왕입니다.  그의 출생적 배경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서자 출신이요, 왕이 될 수 있는 서열도 한 참 뒤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스스로가 가난한 자로서 왕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세상에서 부귀와 명예를 다 누렸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인생을 가장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세계의 열방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공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그는 칠백 명의 후궁과 삼백 명의 첩을 두고 살았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인들이 자그마치 천 명입니다.  이만하면 솔로몬의 인생을 흠모할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수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인생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에 우리는 절망적인 후회와 영원한 탄식으로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다가 저 영원한 지옥에 간 어느 부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권세를 상징하는 자색 옷과 영화를 상징하는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온 몸에 기름기가 번질거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라고 이름하는 거지는 이 부자의 대문 앞에 가마니를 깔고 개들이 헌데를 핥아주는 위로 속에 내버려진 채 새우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자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저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모든 인생들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진시황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지만 그는 인생 오십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던 이 부자는 그 장례식도 아주 대단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죽는 순간에도 세상에서 내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2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이 세상에서 처참하게 버림받은 삶을 살았던 나사로는 죽는 순간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그렇지만 23절을 보면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성공자는 누구이며, 실패자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을 놓고 본다면 성공자는 분명히 나사로요, 실패자는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니 우리는 지금 부자가 걸어갔던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오늘 우리의 관심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지금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자고 합니다.

오늘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저들에게는 죽음도 없고, 영원한 세계도 없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죽음도 비켜 지나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부자의 인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큰소리치면서 한 번 호화롭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남들처럼 세계 여행도 가보고, 명품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거리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진리는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와 같은 신앙적 자세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나사로라는 이름에서 그의 신앙적 삶을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세상에서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살았습니다.  헌데를 앓고 있는 괴로운 육신이었지만 그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가난하고 어려워도 세상을 기댄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 기댔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는 순간 그토록 소망했던 바대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을 살았지만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산 하늘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이 땅에서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고급 옷을 입고, 자신의 육체적인 즐거움을 위해 매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담벼락 하나를 놓고 가난한 이웃이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면했습니다.  솔직히 외면을 넘어서 아침마다 나사로를 보는 것이 불쾌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내가 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지옥에 간 부자를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자기 집 장롱 속에 쌓아놓은 헌 이부자리 하나라도 왜 나사로에게 덮어줄 수가 없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그가 거지 나사로,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 당하고 있는 나사로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팔 복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향해 한 번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리고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너는 네 인생의 소원대로 땅에서 받은 것이요, 나사로는 그 믿음대로 여기에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선을 심으십시오.  의를 심으십시오.  이웃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선을 베풀고, 의로운 삶을 살고, 이웃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선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선일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선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만족을 채워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놓고 본다면 우리 인간은 모두가 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는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가고 있습니다.  죽으러 가고 있습니다.  걸어가든 달려가든 모든 인생은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이 변하지 않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호화롭게 즐기면서 살았던 이 부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그는 지금 이 고통의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이 부자는 지금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비참한 인생으로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후회는 절망적인 후회입니다.  이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후회입니다.

이토록 후회하는 부자에게 더 절망적인 음성이 들려옵니다.  본문 25절과 2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은 있습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죽으면 끝이다.  죽음 저 너머에 뭐가 있을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껏 즐겨라."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면서 살았던 사람들 치고 인생의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세상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습니다.

구 소련의 스탈린의 딸이 미국 뉴스위크지에 그의 아버지 스탈린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최후의 순간이 가까왔을 때 눈을 갑자기 뜨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노한 눈이었다.  그 눈을 보는 것은 무서웠다.  그리고 나서 왼손을 들고 무엇을 가리키는 듯 하였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빛이었다.  그 팔이 떨어진 후 그는 영면하였다."

필립스(Phillips)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여지껏 없었다."

이들 두 사람의 고백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천국은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며, 죽음 이후에는 천국에 가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이 한 가지만은 똑똑히 알고 살면 내 인생의 코스가 바로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빅톨 유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오늘과 내일의 문제를 싸우고 이기는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들 삶 전체 속에 있는 모든 문제는 결국 죽는 문제로 귀착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생이 저마다 뛰고 달리지만 죽음이라는 문턱 앞에서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눈에만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인생의 목적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물을 다 잃었습니다.  자녀도, 건강도 잃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정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것이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림에 대하여 결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의 잃고 얻는 것에 대하여 실패다, 성공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이 외의 다른 것으로는 후회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탄식도 후회도 없습니다.  현재의 성공과 부요함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더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잃어버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지만 저 영원한 천국을 품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이면 최고요, 돈을 모으는 재미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울기도 숱하게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손자들에게 용돈을 주면서도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돈 때문에 손해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시장에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구걸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몇 차례 걸쳐 얼마씩의 돈을 주고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손녀가 할머니의 이 모습을 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할머니, 참 손해 많이 보네."  왜냐하면 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오늘 손해 봤다는 말을 종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할머니는 이 어린 손녀에게 이런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나는 예수 믿고 많은 은혜를 입었단다.  나는 예수 믿고 욕심도 버렸고, 싸움도 버렸고, 세상 취미도 버렸다.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로 만족하고 예수로 행복하고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간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으로 살 때에는 모든 일이 다 손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로 사니까 모든 것이 다 유익이었습니다.  돈으로 살 때에는 부요한 것만이 행복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사니까 가난함도 행복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돈으로 마음의 평화를 사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돈으로 천국에 못 갑니다.  돈으로 죄를 지은 양심을 달랠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명예나 존경이나 칭찬을 사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 사는 것은 인생 전체가 헛된 일이요, 후회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현대인들이 이 부자처럼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모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요식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부르짖음이 어딘가 거짓처럼 생각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의 감격이 없이 어딘가 위선적인 모습으로 드려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해도 정작 예수님이 나를 모른다고 할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고 말해도 정작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적인 종교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쭉정이 교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려는 사람까지 못 들어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비극적인 쭉정이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시간마다 때마다 일마다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사람을 붙잡지 말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서로를 분열시키는 이간자의 삶을 살지 말고, 순종하고 감사하면서 헌신하는 사역자의 삶을 사십시오.

나사로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 신분이 천한 거지라는 사실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헌데를 앓는 거지, 개들이나 문안하는 천한 자, 한 평생 고난 가운데서 살다간 나그네였습니다.  그는 환경과 일용할 양식과 자기 운명적 신분에 대하여 전혀 불만이나 탄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천대나 생활의 빈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한 성자였습니다.

플루머는 나사로의 침묵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부를 인간에게 불공평하게 나누어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지도 않았고, 그 부자가 돈을 그릇되이 사용한 것에 대하여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후에 자기와 부자의 형편이 바뀌어진 것에 대하여 통쾌감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오직 하늘에 소망을 둔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의 품 속에 있을 자신을 보았고, 영원한 생명의 식탁과 영광스런 하늘나라의 명예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죽음 직전에 있는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그때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하나님이나 잘 믿고 살 것을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 인생에도 끝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엄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하는 심판의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제발 그 때를 좀 기억하고 사십시오.  그 때가 곧 옵니다.  도적같이 옵니다.  죽도록 일하면서 가정을 일구며 살았지만 그것들을 뒤로 한 채 나를 창조하신 그분 앞에 서야 할 그 때가 옵니다.  그때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우리가 그 때를 기억한다면 반드시, 분명히 지금 우리의 삶과 신앙은 확연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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