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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보고 낙심한 자여, 주를 바라보고 일어나라 (시 3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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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고 낙심한 자여, 주를 바라보고 일어나라 (시 37:1-40)

요즘 우울증, 공황장애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교우들을 상담하면서 지금이야말로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려고 역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세상을 바라보면 정상적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범죄가 극심해지는 배경에는 술 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술 때문에 범죄가 더욱 극심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범죄와 사건이 술로 인하여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서운 흉악범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술로 인하여 망가지고 있습니다.

여수 엑스포를 찾은 관람객들 중에 술을 마신 이들이 여성 도우미들에게 막말을 하고. 발로 걷어 차고, 머리채를 잡고 심지어 뺨까지 때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가막혔습니다. 철제 봉을 한 여성 도우미에게 던져 팔이 다치고 한 여성 도우미는 술에 취한 한 관람객이 던진 플라스틱 입장권에 눈을 맞아 핏줄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고, 아쿠아룸 많은 물고기들이 취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받아 먹거나 소음 등으로 인해 줄줄이 폐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 문화는 술을 마시게 하는 문화입니다. 
둘째가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지성인 사회라는 대학이 술부터 마시게 한다는 사실이 분노케 합니다.
한 여자대학에서 올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학에 입학한 한 여학생에게 선배로부터 "금요일 오후 6시까지 강의실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책상 뒤로 다 밀고 3줄로 맞춰 앉은 후 신입생들의 손에는 소주 1병씩이 쥐어졌다. "지금부터 앞줄부터 일어나 원샷을 한다. 다 같이 하나가 된다는 우리 과의 전통이니까 '술 못 마신다' 이딴 소리 하지 마." 울어도 소용없었다. 곳곳에 눈물을 흘리는 신입생이 나왔지만 "짜지 말고 마셔라"라는 말만 반복됐다. 견디기 힘들었던 술병을 바닥에 놓고 출입문을 향해 달려가니 한 선배가 앞을 막아서고 말했다. "너, 여기서 나가면 우리 과에서 제명이야. 졸업할 때까지 왕따로 살고 싶으냐?" 결국 꾸역꾸역 1병을 통째로 다 마셨다. 그러자 선배들은 다시 소주 1병씩을 나눠줬다. 3병까지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2번째 병을 2~3모금 먹었던 기억까지만 있다. 그 이후 기억은 과방에서 시체처럼 쌓인 동기들 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 학생은 결국 위장병으로 이달 초 병가 휴학계를 내고, 대구의 부모님 집으로 내려가 있다. 아버지(50)는 "주변에서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자식 보냈다고 축하를 받았었는데, 공부하라고 보낸 대학에서 술만 퍼먹었는지 몇 달 만에 얼굴이 새카매져서 돌아왔다"며 "다음 학기에 서울로 올려 보낼 생각만 하면 걱정이 돼 죽겠다."고 말했다.

대학교 3학년 딸을 둔 차모(52)씨는 "밤 11시 30분이 넘어가면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했다. 12시까지는 집에 들어오기로 딸과 약속을 했지만 딸에게는 '엄마 혼자 한 약속'이다. "새벽 2시가 넘어서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온 딸이 당당하게 엄마에게 맞고함을 치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학생이라면 마시던 술도 가능하면 끊으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시 37:1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이 구절을 묵상할수록 속이 답답해져 옵니다.  
정치인을 볼 때, 그렇습니다. 경제 상황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진짜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악한 자들이 성공하고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볼 때, 분개하게 됩니다. 

어떨 때에는 순수를 고집하고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악해져 가는 것을 볼 때, 절망하게도 됩니다.
술, 음란, 폭력, 도박, 인터넷, 스포츠 중독 등 세상을 바라볼수록 우리 마음이 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낙망하는 자에게 다윗은 되풀이하여 정신차리라고 말합니다.

시 37:1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7절 ...마음 상해 하지 말아라. 8절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

불평하고 분노하고 낙심하다가 우리 자신이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8절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우리 안에도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악한 세상을 보고 낙심이 되고 분노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으로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악한 자는 반드시 망한다고 말합니다.

2절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12-40절까지가 다 그 내용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입니다.

3절 주님은 오히려 악인을 비웃으실 것이니, 악인의 끝날이 다가옴을 이미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것을 압니다. 악한 자의 결국은 비참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도 안됩니다. 어떤 때는 솔직히 악한 자가 오히려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딸이 어릴 때, 콩쥐 팥쥐 이야기를 읽고 자기는 팥쥐가 되고 싶다고 하여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착하지만 고생하는 콩쥐와 성격이 못됐지만 편안하게 사는 팥쥐를 보고 갈등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착하지만 고생하는 콩쥐가 되고 싶으십니까?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러나 어떻게 선하게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면 악한 세상에서도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저 악한 자를 보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라고 계속하여 도전하고 있습니다.
3절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4절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5절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7절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이번에 나온 책,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읽고 질문 메일이 왔습니다.‘천국가는 자는 사랑해야 한다’는 글을 읽고“‘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까?’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니, 삶은 변화되지 않아도 괜찮다’, ‘믿음이 있다면 사랑은 없어도 구원받는데 지장은 없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사람은 자기 성질대로 예수믿게 마련이다. 성질은 어쩔 수 없다’ 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심각한 패배주의입니다.

평생, “주일마다 ”이번 주간도 또 죄짓다 왔어요. 그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왔사오니 주님의 은혜로 용서해 주시고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기도요, 은혜롭고 솔직한 기도로 여깁니다. 

“할렐루야, 주님 이번 주간, 승리하였습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은혜와 주님께 영광돌립니다.” 라고 기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그렇게 기도하면 복음이 아닙니까?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흔히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천국에 같더니 헌금 많이 한 사람은 고래등같은 집에서 살고 헌신이 없었던 사람은 개집 같은데서 산다, 개털모자를 쓰고 산다, 라는 등 천국 갔다 온 간증을 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니 행함을 가르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행함없이도 천국은 가되, 상급받는 정도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알고 복음을 교리로 받아들이는데서 그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마 28:20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후 13:5 …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자,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도 죄 지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선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찰스 듀튼이라는 영화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공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삶을 살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다른 죄수들처럼 나는 한 번도 감방을 장식하지 않았소.”
감옥에 갇힌 사람은 너무나 무료하기 때문에 감방을 장식하는 일에라도 마음을 쏟기 원합니다. 그러나 챨스 듀튼은 자신의 감방을 장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감방은 자신이 살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감방을 꾸미는데 공을 들인다는 것은 현재 감옥 생활을 그대로 고수하겠다고 결심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감방이나 장식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꼭 교도소에 가야 감옥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가정이나 직장이 감방일 수도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나 과거의 학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 스스로 자초한 상처, 술 담배, 음란 동영상, 도박, 인터넷, 스포츠 중독 등 우리 마음을 가두어 놓는 것은 다 감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의 감옥에 갇혀 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의 감옥에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이나 원망하고 낙심하고 분노하며 살다가 끝날 인생이 아닙니다. 

믿사남 조별 모임에서 한 권사님의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미 다 장성한 아들이 좀처럼 신앙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큰 기도제목이었는데, 그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상처를 심어준 것이 깨달아졌다고 했습니다. 별 생각없이 아들 잘 되라는 마음으로 매를 들었던 일들이 아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고 아버지와 마음의 벽을 쌓고 사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번 5월 가정의 달에 아들에게 회개하리라 주님께 약속하였는데, 막상 아들에게 회개하는 것이 쉽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가 5월 30일이 되었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저녁을 먹고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아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TV를 끌 수 없겠느냐고 하였답니다. 조원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보통 이런 때 부위기가 깨어지는 것이거든요. 아들이 TV를 끄자 이 권사님이 아들 앞에 무릅을 꿇고 눈물로 아버지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였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믿음이 성숙치 못하여 쉽게 매를 들었고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데도 깨닫지도 못하였었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아들은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보고 당황해 하면서도 함께 손을 잡고 울면서 기도하고 화해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권사님이 아들과 손을 잡고 서로 울면서 기도했다는 고백에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정말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영성일기를 쓰시면서 권사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악한 세상에 살지만 선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면 악한 세상을 보면서 낙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무엘 S. 스컬이라는 사람이 애리조나의 사막에 있는 농장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토네이도가 들이닥쳤다. 날이 밝자 사무엘은 아픈 몸을 일으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농장은 우박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트럭은 헝겊처럼 찢겨져 땅에 쳐박혀 있었다. 집은 지붕이 반파되었고, 닭장은 어디론가 강풍에 휩쓸려 간 듯 보이지도 않았고, 죽은 닭들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온통 파괴와 황폐의 잔해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 수탉 한 마리가 더미 속에서 힘겹게 몸을 비비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탉의 몸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깃털도 대부분 빠져 버리고 없었다. 그런데 그 수탉이 잔해 더미 밖으로 올라서더니 그 더미 제일 높은 나무 판자 위로 올라갔다. 그 때 동쪽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 수탉은 앙상한 날개를 퍼득거리며 의기양양하게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수탉은 자신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수탉에게는 하나님이 매일 하루의 시작을 알리도록 그의 유전자 속에 집어넣으신 본능이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암울해도 우리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희망을 노래합니다. 선하게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세상만 묵상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절망에서 오히려 사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증인"을 만나게 해 주소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곳곳에 십자가의 복음으로 놀라운 삶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사람 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되는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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