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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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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2-19)


할렐루야! 오늘 교회 창립 43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이 있기까지 눈물로 헌신하신 신앙의 선배들과 성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뜻깊은 창립주일에 18명의 임지자들과 세우고 한생을 주님만을 바라보고 교회를 위해 정말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친 4분의 권사님들이 은퇴하는 아주 중요한 시간을 갖습니다. 은퇴하시는 4분은 한 생을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충성을 하신 분입니다. 이제 그 사명의 바통을 이어 당신들의 눈물의 기도를 먹고 이처럼 멋진 18분의 일꾼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자리에서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할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공동체가 얼만큼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어떤 유형의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와 매우 중요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꿈이 없는 공동체, 비젼이 없는 공동체는 결국 후퇴하고 점점 소멸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매달리고, 과거의 향수심에 사로잡혀 옛날이야기나 하는 복고의식이 그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는 한 그 공동체는 후퇴 할 수밖에 없는 것 입니다. 아무리 과거가 영광스러웠다 할지라도 과거는 빨리 잊는 게 좋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늘부터 우리는 밝은 미래를 이야기 하며 비젼을 나누며 살아가는 미래지향적인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로마의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세상, 그러니까 주후 62년 전 후의 이 시기는 한창 로마의 영광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죄수의 몸으로 로마의 옥중에서 쓰면서 로마의 영광이 아닌 교회의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를 가졌던, 매우 영향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기 생애에서 한 곳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오랫동안 보낸 시간, 적어도 3년여의 시간을 보냈어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기부터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에베소에는 우상이 창궐하고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는 고통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신앙이 흔들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기억하며, 이 교회가 로마의 지배와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무릎 끓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기대 속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막연히 의자에 앉아 조용히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스럽고 답답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형무소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4-15절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여기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 사도의 13개의 서신서에는 곳곳에 기도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표현은 여기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만큼 이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세속의 한 복판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세상 앞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이기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피를 토하듯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기도가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입니다. 

여기 속사람이 나오죠. 그렇다면 속사람의 반대적인 용어가 무엇이겠습니까? 겉사람입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의 초미의 관심사, 최대의 관심사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외모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유행하는 신종어(新種語) 가운데 '외모산업'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미용실이라든지, 피부관리실, 스포츠센터, 각종 화장품회사, 이 모든 것들이 다 외모를 관리하는 외모산업입니다. 최근 가장 호황을 맞는 병원 중 하나가 성형외과가 아닙니까? 옛날에는 흉터 정도를 고쳐주는 병원이었지만, 지금은 멀쩡한 것을 다 고치는 공사를 합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쳐서 예뻐진다면 공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옷도 깨끗하게 입고, 자기 가진 것에서 최고로 예쁘게 보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몸매도 가꾸어야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보일 권리가 있고, 어떤 면에서는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을 위해 사람들은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할 뿐 아니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건강보조식품을 반드시 챙깁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우리의 건강을 좌우할까요? 의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음식과 운동이 우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2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건강을 좌우하는 나머지 75%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 즉 속사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속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겉사람의 건강조차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열심히 치장하고 바르고 두들기고, 맛사지를 하고 운동을 해도, 아무리 좋은 웰빙 음식을 먹어도 그 육체는 결국 늙고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을 상품으로 비유하여 10대를 신상품, 20대를 명품 30대는 정품, 40대를 기획 상품 10%세일, 50대를 50% 반액세일, 60대는 재고정리 70대 창고정리, 80대 대방출, 90대 소각처리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참 웃어넘기기에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처럼 아무리 우리의 겉사람을 가꾸고 다듬어도 가는 세월은 속이지 못한다는 게 진리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후4:18절에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므로 썩어져 가는 겉 사람, 후패해 가는 겉 사람을 위해서만 노력하지 말고, 속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들어와 거기에 접붙이면 우리 안에 새사람, 속사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연한 순처럼 자랍니다. 보기에 흠모할 것이 없는 것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처럼, 털 깍이는 잠잠한 양처럼,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속사람입니다. 이것은 눈에 별로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입니다. 복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을 심으면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능력은 정말 신비의 능력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하여지면 세상 앞에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습니다.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당시 통치자였던 메리여왕은 열심있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존 낙스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목표를 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저에게 주십시오. 아니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가 기도하던 방의 창문으로는 메리여왕이 살고 있는 궁전이 보였는데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같은 기도를 몇시간씩 되풀이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자 메리여왕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여왕은 죽기전에 "존낙스 한사람의 기도가 백만대군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존낙스의 기도를 통해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마귀가 치를 떨고 무서워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한번은 메리 여왕이 존 낙스가 설교하던 교회에 나와 예배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낙스는 중풍에 걸려 �嶺�사람의 부축을 받아 겨우 강단에 서야했고, 말도 오눌 했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그 날 설교 한마디 한마디 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응을 합니다. 죄를 지적하면, 하나님은 꼭 공의의 하나님만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지 안느냐며 마치 부모 앞에 메달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중풍으로 몸마져 가누지 못하는 한 연약한 인생인 것 사실이지만, 그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 힘입어 세상을 호령하던 메리 여왕을 어린 아이 다루듯 하는 신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일은 속사람의 능력을 입고 섬겨야 합니다. 성가대든 , 교사든, 봉사자든, 누구든 간에 이 속사람의 강건이 없으면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세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믿는 사람 마음속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계실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모든 믿는 자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신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적으로 그러할 뿐 실제로 우리는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시게 하여 달라는 이 말은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주님이 목적이 되시는 내 인생의 통치자가 되달라는 고백입니다. '계시다' '거한다'하는 말은 헬라어에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파로이케오'로 이것은 천막을 친다는 뜻이며 임시적으로 나그네가 거한다는 뜻이고, 또 하나 '카도이케오' 라는 말은 영구 거주를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일어설 수 있는 것 바로 그 근거는 예수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니까 내가 사망의 몸에서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분입니다.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지닌 분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니까 힘이 생깁니다. 내속을 바라보니까 소망이 없었는데 성령님의 힘 주심을 바라보니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치지도,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믿어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실망 어린 나를 품에 안으시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의 강팍한 가슴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불꽃으로 임하셔서 내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지금 우리을 향해 ‘너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겼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손으로 친히 빗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한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은혜가 내 심령에 임하면 나는 더 이상 옛것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지금 바로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3.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17-1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여기서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신앙의 현주소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말씀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으며,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을 예로 드는 것이요, 터가 굳어져야 하는 것은 건축하는 것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잎이 마르지 않습니다. 건축하는데 있어 기초가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사랑이어야 사랑이고, 베푸는 사랑이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기 사랑에 대한 표현이 네 가지 나옵니다.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길이입니다. 이 사랑의 넓이는 사랑의 포용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길이는 사랑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높이는 사랑의 지고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깊이는 사랑의 심원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성도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그 사랑을 어떠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어떠한'은 원어로 '포타포스(potapos)'입니다. 이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잘 쓰입니다.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풍랑 이는 호수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바람과 바다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들은 '어떠한'이라는 말을 써서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 그리고 깊이의 '어떠함을 깨달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떠한 사랑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깊은 절망의 감옥에서 피를 토하듯 외치는 노 사도의 그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주인이 오직 예수라는 그 사실을 잊지 말고, 내가 받은 이 구원과 지금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고 정말, 정말 하루 하루의 삶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로서 당당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또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은 위대한 영향력을 나누며 살아가게 될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바꿀 위대한 백성 거룩한 백성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표가 어디 있어요?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충성 된 분들의 뜨거운 수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고 속사람이 강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이 사명을 함께 공유하는 충성된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다 각오도 다짐도 하지만, 정말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자인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 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충성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세워지는 18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정금 같이 다듬고 변화 되어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께로 이끄는 근사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세워진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들만 보면 은혜가 되고 힘이 생기는 기쁨이 교우들에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동성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 주님 오실 때까지 모두가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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