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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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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 1:3-11)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투옥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헌금을 보냈고, 또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보내서 바울을 시중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와서 시중을 들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돕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 오히려 바울에게 더 짐이 된 것 때문에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또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 후에 에바브로디도가 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의 편에 빌립보 교회의 사랑과 배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글로 써서 보내게 됩니다. 바로 그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는 특별하게 시작됐습니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에서 선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도 없이 계획도 없이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처음 도착한 곳이 빌립보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리고 유럽 최초로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 빌립보 교회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다 바울은 이 빌립보 교회의 유별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막 개척된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원래 자비량 선교를 했던 바울은 이 빌립보에서만은 교회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와 고린도에서 선교하는 동안에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재정적 후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빌립보 교회가 또 나선 것입니다. 재정후원을 했고, 사람까지 보내서 바울을 시중들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그 모든 고마운 마음을 묶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바울은 여러 곳에서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아주 특별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4:1을 보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압권은 오늘 본문 8절의 표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이 표현은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라는 권면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사모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심장은 어떻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달로 ‘심장이식’ 수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장이식 수술이란 ‘생명을 위협하는 심장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죽은 사람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는 수술’입니다. 심장이식을 받는 환자는 대게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못하면, 1년 내 사망률이 30-70%인 환자입니다.

최초 심장이식수술은 1967년 남아공에서 성공되어 심장이식을 받은 사람이 18일 동안 생존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기술이 발달하여 현재는 1년 이상 생존률이 84% 이상으로 늘었답니다. 이제 심장이식 수술로 남의 심장을 이식 받아 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비유컨대 바울은 영적인 차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심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살 수 없어서 아예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수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심장의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심장이식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심장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우리 심장으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심장 그 깊은 곳에 사랑을 담아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배우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애쓰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마음에 품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과 발로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한 뒤 달라졌습니다. 그 심장에 병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담아 두신 사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품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과 발로 행동하는 것들에서 사랑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의식하고 힘쓰고 노력해도 사랑이 잘 안됩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심장이식수술입니다. 우리의 심장을 예수의 심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살 수 있습니다. 

현대과학은 아직 심장이식 수술의 미스테리를 풀지 못하고 있답니다. 심장이식 수술 후 사람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아리조나 피닉스에 살고 있는 빌 홀씨는 심장이식 수술 후 삶이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그저 사업에만 몰두하며 돈 버는 일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식 수술 후 스포츠 광이 된 것입니다. 철인 3종 경기를 비롯해서 각종 스포츠 대회에 출전해서 수십개의 메달까지 딴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재즈 음악에 심취하여 샤데이의 음악에 광적으로 심취하게 됐습니다. 

이 분이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자기에게 심장이식을 해 준 사람을 뒷조사해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헐리우드의 스턴트맨이었고, 재즈가수 샤데이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은 심장을 이식해 준 사람의 성격, 식성, 취향 등을 그대로 전수 받는 사례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 받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심장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산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에서 ‘심장’이라는 말은 성경 원어에서는 ‘스프랑크논’(Splanknon)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염통을 뜻하는 심장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심장을 비롯해서 창자까지를 포괄하는 인체의 속 깊은 곳의 장기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이 스프랑크논 즉 신체의 장기인 심장을 가리키는 말 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시 7:9를 보면 원래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개역개정판에서는 그 의미를 반영하여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로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렘 11:20을 보면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되어있습니다. 역시 개역개정판에서는 그 뜻을 반영해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은 인체의 심장을 인간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이라는 말을 쓰지만 결국은 마음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새번역]과 [표준 새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는 말을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도 의역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RSV](Revised Standard Version)을 보면,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품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품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 불쌍히 여기는 심정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여러 사역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역들의 출발 동기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막 6:34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의 현장입니다. 그 동기가 바로 불쌍히 여기시는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려 할 때 사람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심정으로 할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심정으로 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눅 7:13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의 현장입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사역의 동기 역시 불쌍히 여기는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적을 베풀려고 할 때 사람들에게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는 심정으로 할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이적 이후 무엇인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품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2007년 출판되어 크게 주목을 받았던 책 가운데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무명의 경제학자 장하준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책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전 세계적으로 대세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장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시장원리가 작동하도록 하면 자연스럽게 경제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IMF, WTO, 세계은행이 삼총사를 앞장 세워 신자유주의를 확산하고자 개발도상국들을 압박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개발도상국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투자를 확대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하게 하고 나아가 특허권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약한 나라를 돕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결국 자기들의 잇속 챙기기이고, 약한 나라들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남들을 돕는다고 해도 불쌍히 여기는 심성이 빠져버리면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나쁜 사마리아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바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쟁하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무관심하고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심정으로 서로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희생하는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음속에 담아 두셨던 심정은 하나입니다. 그 심정이 바로 요 12:24절에 나타나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기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바로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심정입니다.

말알의 심정은 바로 희생하는 심정입니다. 바로 이 밀알의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밀알의 심정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이 밀알의 심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밀알의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제임스 키니의 [마음의 추위]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여섯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춥고 어두운 곳에 갇혀 모닥불을 쬐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모닥불이 사그라지면서 추위가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나무 지팡이를 하나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그들 중에 있는 흑인 한 명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자기 지팡이를 꼭 움켜쥐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교회에서 배워서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가 교회가 아니니 실천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걸친 세 번째 사람은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흥, 저 게으름뱅이 부자들을 위해 왜 내가 희생해야 해? 어림없지.” 부자인 네 번째 사람은 자기가 모은 재산만 골똘히 생각했고, 다섯째 사람인 흑인은 이 기회에 어떻게든지 백인들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사람은 자기 것만 태우는 일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결국 그들은 모두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바깥 날씨의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추위 때문에 얼어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희생할 줄 모릅니다. 그들의 심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밀알의 심정, 희생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심장을 이식해야 합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리의 심장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희생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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