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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한 성도가 되라 (마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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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성도가 되라 ( 마 23:23)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장은 고난주간의 셋째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받지 말라고 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켜 표리부동한 자라 또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질타를 당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는 것도,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외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경문’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양피지 조각을 말하며, ‘옷술’이란 옷단 귀에 술을 붙여 유대인이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여 방종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을,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과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잔치와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대접과 높임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놓고 다투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팔화를 선포하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천국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왜곡하여, 조상들의 유전을 율법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정신에서 떠난 삶을 살도록 만들었으며, 자기들도 말씀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로의 개종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얻은 개종자들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인 율법 선생의 지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까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16-19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는 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는 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고 했습니다. 

‘눈 먼 인도자여’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라는 책망은, 하나님보다는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맹인이어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전과 성전의 금 가운데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또한 제단과 그 제단 위의 예물 가운데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주님께서는 성전의 금보다는 성전이, 그리고 제단의 예물보다는 제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제단보다도 그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더 중시하도록 오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까지 방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뒤집힌 가치관을 가지고 진리를 오도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주님께서는 통렬하게 책망하시며 저주하셨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가치관이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1)몸보다는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육신은 잠깐 있다가 늙고 시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2)금생보다 영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라야 고작해서 100년 안팎이지만, 내세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계시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기와 지금’이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에 비추어 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신의 모든 삶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시 39:4-7에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와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분요하며, 재물을 취하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솔로몬의 허사가를 아십니까? 그림자와 같은 것을 붙잡으려고 일생을 허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초로인생이요, 안개 인생이요, 화살 같은 인생이요, 일장춘몽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림자도 꿈도 실체가 아니고 현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는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대학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제자대학 최고의 행복은 인생의 최고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고, 인생 최고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고, 일꾼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재생산 사역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인생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네 번째 저주의 선포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저주 선언은 세 번째 저주 선언과 더불어 가치 전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되, 특히 사소한 것은 취하면서도 참으로 취해야 할 율법의 근본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영적인 사악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대상으로 삼은 것들 가운데 ‘박하’로 번역된 ‘헤뒤오스몬’은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일종의 향료 식물을 가리킵니다. ‘회향’으로 번역된 ‘아네돈’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양념의 향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근채’로 번역된 ‘퀴미논’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향기가 짙은 식물로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드린 것으로 나오는 이와 같은 식물들은,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입니다. 즉 율법은 토지소산 중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의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십분의 일을 엄격하게 떼어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이렇듯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열심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는 열심을 보이나,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하는 그들의 영적무지와, 또한 남에게 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개역 성경은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고 번역했습니다.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의와 인과 신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비교해서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준수해야 할 모든 율법과 비교해서도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모든 율법 조항들의 근본정신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의(義)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89:14절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판단은 의로우시고, 하나님의 의는 영원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의를 바라고 정의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 15:1-2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불의가 판을 칩니까? 이 불의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의롭게 살아갑니까? 주님께서 율법의 중요한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하나는 긍휼 곧 인(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쌍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을 향하여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긍휼 곧 자비를 바라시는 것 역시, 하나님 자신이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들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한 가지 주님께서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신(信) 곧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 곧 신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상은 또 얼마나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 세상의 불신은 거의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뿌리가 깊고, 이러한 불신은 성도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義)와 인(仁)과 신(信) 이 세 가지 덕목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경건한 신앙심 없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드리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정의와 공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열과 성을 다하여 지켜야 할 이와 같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쳐 버리고, 율법의 형식적 외식적 준수에만 치중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제사장이 강도 만난 이웃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 그 실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번째 저주 선언에 대한 결론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페기론 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저것’이란 십일조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저버리지 말고 다 실천하여, 온전한 신앙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적인 것이라고 반대하면서, 신약 시대는 십일조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이상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두 번째 주장부터 반박하자면, 십일조 헌금도 드리지 않는 사람이,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율법주의에 속한 것이니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오늘 주님의 말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이미 십일조 실천의 필요성을 확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축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이 법칙은 모든 영역에서 그대로 적용되어 집니다. 믿음의 세계에도 성도가 지켜야 할 축복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중에 특히 물질의 축복과 관계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곧 십일조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물질의 축복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들에게 물질 축복의 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 설교를 하면 좋아하는 성도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헌금에 관한 설교는 성도들을 위하여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말은 돈에 대한 관리를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재물을 바르게 쓰도록 교훈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성 운동으로 큰 영향을 끼친 ‘리차드 포스트’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척도를 알아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 그리고 침례교의 신학자인 ‘헤롤드 피케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출발점은 바로 십일조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이 분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또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회심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심령의 회심이고, 둘째는 그의 돈지갑의 회심이다.”고 했으며, 웨슬레는 “한 인간 중 회심해야 할 마지막 부분은 그의 돈지갑이다.”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졌던 김재준 박사 같은 분도 말하기를 “구원의 확신을 맛본 사람이 최소한 십일조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웰 목사님은 말하기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거두어 가실 때, 그 돈이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 고통을 주고 도망간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으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교훈을 따라서, 이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 이 잔인한 세상에서 인자한 사람이 되고, 이 엄청난 불신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열심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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