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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하는 교회 (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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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하는 교회 (행 1:1-8)

- 12. 6. 10(총회선교주일)

우리 교회 영구표어는 '하나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땅끝까지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3년간 동고동락하시면서 훈련시키신 목적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훈련 중에 12제자뿐만 아니라 따로 70인을 세우셔서 두 사람씩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임상훈련’도 실시하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말씀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하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노회는 선교하는 노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총회는 선교하는 총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그러나 문제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전도하기가 어렵고, 부흥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진리를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사람들은 복음을 귀찮아하고 외면합니다. 옛날에는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를 통하여 전도의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방법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과 혐오감만을 키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범람하면서 현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참된 생명과 신앙에 대하여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오직 육신의 즐거움과 행복만이 최대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지상명령인 선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선교에 대한 사명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부흥기를 맞았던 몇 십년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오늘의 시대는 선교의 문이 닫혀가는 듯이 보입니다. 여러 가지 통계 조사 결과가 그렇고,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니 더 열심히 복음전파와 선교에 매진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복음이 전파되는 데 크고 작은 장애물이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던지 주님께서는 그 시대를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 11:17)라고 개탄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역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기를 원한다고 할 만큼 그의 삶은 복음을 위한 시련과 역경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에 핍박이 일자 안디옥까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면서 결국 안디옥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는 장차 이방인선교(세계선교)를 위한 교두보요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확장은 장애물이 없거나 미미했기에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초대교회의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무엇을 하든지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들의 믿음과 영성이 세상과 장애물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디도서 1:3에서는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복음을 전파하며 헌신한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본래 중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미국 선교사로 조선에도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늘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한문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대동강을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관군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배는 불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육지로 피하였지만 관군에게 붙잡혀 평양 감사 박규순에게 잡혀가서 순교하였습니다. 선교의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참수당하기 전, 가지고 간 한문성경을 자신의 목을 치는 박춘금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성경을 받아든 박춘금은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이후 평양은 “한국의 이스라엘”이라 할 정도로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됩니다. 선교자에게서 흘려진 순교의 피가 오늘날 세계교회가 주목하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는 밀알이 된 것입니다.

일찍이 서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선교의 문이 닫혀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선교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식어가고 희생이 작아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오늘날에도 우리가 죽을 각오로 선교의 사명 완수에 온 힘을 다하면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의 열매가 더욱 풍성히 열릴 줄 믿습니다.


둘째, 이제는 말이 아닌 선한 행실로 선교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성장이 아닌 퇴보를 겪게 된 데는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인이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언하셨는데, 우리 한국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은 아직 생활 속에서 체화된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가 사회에 대해 비판이나 충고를 하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핀잔을 듣기 일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명령하셨습니다. 

과연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대체로 로마제국이라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타락한 로마의 문화와 풍습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신앙문화를 가지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의 황제마저 자신의 행정관에게 "구제에 관해서는 기독교인들을 본받으라!"고 나무랄 정도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행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동화되지 아니하고 성별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풍요와 향락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배워 실천하는 선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몇 마디의 말로 영혼을 사로잡고 회심케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는 이들에게는 몇 마디 말 대신에 사랑과 실천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다."라고 말씀하였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되어,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 참여와 복지는 훌륭한 선교가 될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신학자 호켄다이크(J. C. Hokendijk)는 "교회에서 하는 선교란 사회적 공동과제의 수행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전쟁, 평화와 생태의 문제,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여성 해방, 민족, 경제 평등과 같은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선교적 과제"라고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곧 기독교 선교가 개인적인 영혼 구원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포괄하는 전인적인 구원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영혼의 생명 따로, 육신의 생명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실현되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것이 선교의 올바른 목표요 방향이 될 것입니다.


셋째,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종합적인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기장 교회 가운데 전주 안디옥교회가 있습니다. 일명 깡통교회로 알려진 전주 안디옥교회는 한국 교회 가운데 가장 선교적 비전과 체계가 잘 갖추어진 교회입니다. 우리 교단의 자랑입니다. 이 교회를 개척하셔서 오늘의 안디옥교회로 성장시키신 이동휘 원로목사님은 사도행전 1:8,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토대로 선교 대상지역을 총 4개로 구분하였습니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그 교회가 위치한 전주(혹은 전북)를, 다음 '온 유대'는 대한민국 전체를, '사마리아'는 이방인처럼 천대받았던 지역을 상징하여, 북한선교사역이나 장애인사역, 교도소사역 등 특수선교사역을, 그리고 마지막 '땅끝'은 세계선교를 뜻하는 것으로 적용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이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볼 만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비단 한국인들만을 위한 교회가 절대 아닙니다. 서구교회가 공동화 현상을 빚는 요즘, 한국 교회는 이제 이 시대의 세계선교를 책임지고 나아가야 할 막중한 선교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국내에서 선교적 결실이 미흡한 동안, 한국 교회는 세계선교에 대단한 열정을 보여 왔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전쟁과 반목의 앙금을 상당 부분 털어내면서 꾸주한 지원과 준비를 해오고 있습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이주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와 섬김으로 대한민국이 세계복음화의 허브로 성장해 가고 있는 듯싶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선교활동의 궁극적인 힘은 한국 교회 신자들의 영적, 인적, 물적 토대에서 나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가 곧 세계교회의 위기요, 이 시대의 위기로 인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거대한 세속주의의 유혹과 도전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면 이 시대는 더욱 영적 암흑기로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말씀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일에 앞서서 행해야 하는 최우선의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단이 한 뜻,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주제는 “주여, 이 땅을 고쳐주옵소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은 주님의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주님의 복음을 따르지 못한 채 상처를 갖고 죽어가는 이 세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돌봄의 실천과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 땅, 죽어가는 생명의 회복에 우리가 앞장섭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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