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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 (요 6: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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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요 6:22-40)


오병이어의 기적이 베풀어졌던 벳새다는 지금도 그 지형이 야외 음악당과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완만하게 내려앉은 벳새다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인 무리들을 올려다보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을 하다 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벳새다는 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나 남겨 거두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4복음서에 다 기록된 이 벳새다 기적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첫째로 상황이 절망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예수께 나온 무리들은 소외된 사람들, 특히 병들고 가난하고 압박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빈들에 오천 명이 넘게 모여 있는데 이제 말씀도 끝나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는 벌써 황혼이 다 되어 모두들 시장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기름진 살갗에 부드러운 옷을 입고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부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더 배가 고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먹을 것도 없었고 또 먹을 것을 살 돈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먹을 것을 살만한 동네조차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굶주린 배를 채울 길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둘째로 거기 나오는 제자나 주인공이 하나같이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장소마다 단골손님처럼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모습이나 이름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빌립이나 안드레는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입니다. 빌립은 “와 보라”하며 나다나엘에게 전도도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용기 있게 요청하기도 했으나 뛰어난 행적은 없습니다. 안드레의 경우도 형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형 베드로의 후광에 가려진 채, 말하자면 형의 그늘에 묻혀 있는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셋째로 그들의 믿음 또한 매우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빌립은 예수께 “각 사람에게 조금씩 준다 해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왕이면 “한 삼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면 그런 대로 먹일 수 있겠습니다.”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안드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이 많은 군중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절망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이것이라도 있으니 선생님께서 우선 요기라도 하십시오.” 혹은 “선생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도 어떻게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이런 적극적 믿음을 갖지 못했을까 안타까울 뿐입니다.

제자들이 사렙다 과부에게 나타난 기적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고, 가나 혼인 잔칫집의 기적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왜 그런 기적의 믿음을 갖지 못했을까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믿음입니다. 

넷째로 기적의 재료는 가난한 아이의 도시락이 고작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아니한 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이 무명의 소년이 누구인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한 아이요 따라서 하늘의 상급이 그에게 크게 나타났을 줄로 믿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이었지만 그러나 주께서는 그 옛날 광야에서 아침마다 내리셨던 만나의 기적을 여기서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오늘도 절망을 희망으로 대치시키고 보잘 것 없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소박한 재료를 가지고서도 엄청난 기적을 베푸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제의 감격이 오늘의 감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오늘도 여전히 배가 부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제 배불리 먹었기에 오늘도 배불리 먹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어제 배불리 먹었기에 오늘은 좀 덜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물론 요즘처럼 살찐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조금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한참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 가운데도 원 없이 고기를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좀 통통한 것 같아 고기 종류는 좀 덜 먹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으나 아이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먹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어제 받은 은혜와 감격이 너무도 크고 놀라와 감사하고 감격했다고 해서 오늘은 아무런 은혜도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적을 경험했다고 한다면 더한 기적도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주님도 그런 마음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데이비드 핑크’ 박사는 안정을 위한 4박자 균형이라고 하는 논문을 통하여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언가 하면 정신적인 안정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안정보다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안정보다 정신적인 안정이 시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 된 사람은 항상 불안합니다. 누군가가 반대하는 말을 하면 피해의식을 갖습니다. 한 사람이 정신적인 안정이 없으니까 다른 이들까지 불안하게 만듭니다. 정신적인 안정이 있어야 육체도 건강하고 능력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안정을 위하여 네 가지가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일이라고 합니다.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자기가 일하는 목표가 분명하여야 합니다. 
둘째는 놀이(Play)입니다. 즐겨야 합니다. 재미있어야 합니다. 계속 즐거움이 생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놀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할 줄은 아는데 놀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놀아도 돈내기 화투나 하고 무엇을 하던지 돈내기를 합니다. 
일본 사람들 중에 골프 치다가 죽는 사람이 일 년에 16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골프를 즐기는 것이어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고 병을 오히려 안고 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지나친 경쟁을 합니다. 아니면 돈내기를 합니다. 놀이가 아닌 내기가 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죠.

셋째는 사랑입니다. 사랑할 줄 알고 사랑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 없이 수고 없이 사랑을 받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목사님이 아닙니다. 누구라도 인생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배는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성공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 자신도 은혜를 받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이후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것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배라는 말 자체가 축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놀이방에서 즐기듯 그렇게 찬양하고 있으며 즐거운 게임을 하듯 그렇게 예배를 즐기고 있으며 명승지를 찾고 볼거리를 찾듯 그렇게 교회를 찾고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볼거리가 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예배를 기뻐하고 즐기지 않는다면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다음날 보니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이야 어제 배를 타고 떠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분명 배에 오르시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배 한 척이 거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가 계실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자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까지 가서 거기서 예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 반가운 마음에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러니까 두 가지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썩을 양식이고 또 하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먹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의 양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신의 양식만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고 수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는 온 정성을 다 쏟는데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는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루 종일 나가서 일터에서 일하는 것 외에도 먹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합니까? 정성껏 식사 준비도 하고 때로는 맛깔나게 잘하는 식당을 소개 받아 찾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시간과 정성과 수고가 따릅니다. 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맛난 음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비싼 음식도 때로는 먹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기회와 여건만 된다면 시간도 돈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이쑤시개를 물고 나오면서 잘 먹었다고 배를 두드립니다. 심지어는 너무 먹어서 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뿐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만 필요한 것이 육신의 양식입니다. 하지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양식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이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단순히 영생을 얻은 자가 아니라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또한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생명으로 풍성하도록 위하여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또한 수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서는 많은 수고를 하면서도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는 별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정말 목숨을 걸지 않습니까? 오늘 쓰러질지 조차 모르고 내 온 힘을 다 쏟아 붓지 않습니까? 한데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도 정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아니 별 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는 흥분도 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쏟아 붓기도 하고 자존심 대결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도 참 우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과 무슨 경기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경기하는 당사자도 그렇고 응원하는 우리들까지도 뭐 대단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속이 시원합니다. 지면 그건 초상입니다. 그런데 경기라는 것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이지 뭐 그게 대단한 것 아닙니다. 이겼다고 해도 잠시 이겼다는 기쁨뿐 그것이 내게 주는 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지 않습니까? 지면 그냥 에이 졌네, 다음에 이기면 되지 뭐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지만 정작 목숨을 걸어야 할 주를 위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고 얼마나 수고를 하고 있고 얼마나 마음을 쏟고 있습니까? 더군다나 자원해서 즐겁게 하는 일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을 주시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복의 근원을 삼고자 함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아브라함이 할 일은 본토와 아비와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까 내가 잘 나서 무슨 수고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것을 믿으십시오. 학개서에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수고를 하고 아무리 모아놓아도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정신이 조금 빗나가게 만드신다면 어디 사람 노릇 하겠습니까?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먹고 사는 것은 나중이고 이젠 목숨을 위해 싸워야 되지 않던가요? 그런데 생명을 위한 양식 즉 나의 모든 보장이 되시는 주님을 위하여 나는 무슨 수고를 하고 있고 무슨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보세요. 건강을 잃고 난 다음에 조금이라도 회복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새벽 시간을 주님 앞에 드리도록 하지만 과연 이 시간을 주님의 시간으로 드리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건 뭐 특별히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나 한가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하셨던 일입니다. 너무 피곤해서 풍랑 중에도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실 정도였던 예수님이십니다.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던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셨습니다. 

온 종일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셨던 주님이심에도 오히려 그 날에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린데 우리는 건강을 염려한다면 오히려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야 건강이 보장되는데 이건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꼭 그렇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해라 해라해도 안 하죠. 그러다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운동한다고 비지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니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소 잃지 않도록 외양간을 고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보험을 왜 들어요? 어려울 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한데 하나님은 진짜 보험 중의 보험 아닙니까? 쉽게 말하면 보장성 보험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험이란 문제가 생겼을 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아니면 만기가 되면 일정분의 적립금을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만들어주시고 그러면서도 때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보험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간도 마음도 물질도 다 육신의 양식과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쓰려고 하니 다 모자랄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배워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이 바로 생명의 양식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말씀과는 담을 쌓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일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다 전문가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얼마나 전문가가 되어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전문가라면 내가 아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을 잃은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19세기 대표적인 복음주의자 드와이트 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똑같은 컵을 놓고 물이 반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과 반이나 남았다고 하는 사람의 삶은 차이가 나는 게 분명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및 리더십 개발 전문가인 데일 카네기는 “자신의 일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례를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요즘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가 직업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장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진정한 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에 대해 행복하다고 외쳐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부유함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습니다. 따라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가 프로가 되는 나침반입니다. 일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성경에서 솔로몬은 전 3:22에서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라고 자신의 일을 즐길 수 있음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긍정적이며 적극적입니다. 마크 빅터 한센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의 저자입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에 차서 자신의 책을 33개 출판사에 보냈으나 매몰차게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보낸 결과 또다시 134개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조그만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게 되었으며 독특한 마케팅으로 그 책을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만들었습니다. 
‘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다. 

프로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아마추어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프로는 ‘Know- Where’를 생각하고 아마추어는 ‘Know-How’를 생각합니다. 프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만 아마추어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프로는 이끌기 위해 솔선수범하지만 아마추어는 주어진 직책에 안주합니다. 진정한 프로라면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솝 우화에서 말하듯 개미가 칭찬받고 배짱이가 외면당하는 세대는 지나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오늘에서는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놀 줄 모르는 사람은 일 할 줄도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이야기입니다. 

김정운교수가 쓴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노는 이야기’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한국의 미래가 걸린 정말 중요한 이야기다. 독일에서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도록 13년간 심리학을 공부한 내가 노는 이야기나(?) 하고 다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왜곡된 여가문화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창의력과 재미는 동의어이다. 사는 게 재미없는 사람이 창의적일 수 없는 일이다. 성실하기만 한 사람은 21세기에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세상에 갑갑한 사람이 근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다. 물론 21세기에도 근면 성실은 필수불가결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재미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모든 일을 즐기면서 해야 합니다. 거기서 발전적인 내일이 옵니다. 하물며 영원을 위한 양식을 위해서는 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단순히 생명을 얻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어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고  하늘나라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먹을 것이 풍성해지면서 차츰 버려지는 것이 많아졌습니다. 한 해 동안 먹다 남아서 버려지는 음식이 7조 원어치나 된다고 합니다. 7조 원이면 한강 다리를 네 개나 놓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것을 선용하게 되면 우리 모두에게 그만큼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될 터인데 모두 버려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한 가지 가져야 할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용하는 생활정신입니다. 아끼고 절약하고 선용하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아주 요긴하고 적절하게 선용하고 사용하는 방법부터 터득하여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생활은 시간을 잘 선용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게도 유익이 오고 남들에게도 유익이 주어집니다.

베드로가 욥바의 가죽장사 시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생긴 일입니다. 사도가 왔다고 모두 부엌에서 바쁘게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무료한 시간을 그냥 앉아서 보내지 않고 옥상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이를테면 자투리 시간을 선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시간에 베드로는 아주 중요한 환상을 보게 됐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세례를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짧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기도를 했고 그 시간에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그 기도로 인해 이방 전도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가 그 시간에 앉아서 잡담이나 하고 무료하게 보냈더라면 이방 전도의 문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울도 옥중에 있을 때 시간을 적절히 활용했습니다. 쉬지 않고 간수들과 죄수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전도하는 중에 기적같이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는 물건을 훔쳐 도망 다니다가 붙잡혀 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회개시켜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네시모가 아주 좋은 전도자가 되어 나중에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까지 되었고, 바울의 편지들을 모아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으면서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었더라면 오네시모 같은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은 언제나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그 시간을 가장 요긴하게 선용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시간을 선용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국의 사학자 사마천은 역적을 변호했다고 해서 왕의 진노를 사 거세형을 당했습니다. 남자가 거세형을 받았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그는 그 시름의 날에 깊숙이 묻혀 글을 썼습니다. 그 때 사마천이 쓴 책이 1백30권이나 되는 사기(史記)입니다.

중국의 전략가인 손자도 발이 잘려 나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 속에 있는 동안 그는 무료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그는 병법을 썼다. 바로 그 책이 손자병법입니다.
존 번연은 12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면서 천로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모두 자투리 시간을 선용해서 얻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디자인은 프랑스의 어느 가난한 집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옷을 해 입히기 위해 조각난 천들을 얻어다가 그것을 이어 옷을 만들어 입힌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돌이 모퉁이돌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남는 시간, 자투리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먹고 남은 것 다 거두었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이 자투리 시간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하루의 첫 시간, 한 주일의 첫 날, 모든 물질의 첫 열매 그리고 처음 마음 첫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첫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항상 처음 받은 그 은혜대로 처음 감동된 대로 자원해서 섬기시게 되면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과 평안과 더불어 모든 풍성함입니다. 100배의 거둠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서 잊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머리돌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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