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혈연가족에서 우주가족으로 (창 3:8-15, 막 3:20-35, 고후 4:13-5:1)..

첨부 1


혈연가족에서 우주가족으로 (창 3:8-15, 막 3:20-35, 고후 4:13-5:1)


<핑계가 너무 많네>
   
오늘은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오늘 봉독한 창세기 말씀을 보세요.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는 국가나 민족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 즉 가족 개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의 친밀한 가족으로 계신 것처럼,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역시 애초부터 가족 공동체로 창조됩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일러주는 수많은 은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그 왕의 백성이라는 은유를 비롯해서 목자와 양, 주인과 종, 등등의 수많은 은유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족적인 이미지 비유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비유이지요. 아니면 하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라는 비유 역시 가족 비유입니다. 
   
이와 같이 가족이 너무나 중요하다면 혈연으로 맺어진 우리 가족은 모든 가족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이 함께 모인 교회는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이 거대한 가정이라고 한다면, 그 하늘 가정의 지상 모형이 바로 가정이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내리교회에 오신 여러분 모두는 내리 가족들입니다. 
   
이제 창세기 3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낙원, 에덴동산에서 천사와 같이 생활하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서 추방당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뒤, 다시 남편인 아담을 유혹해서 둘 다 죄를 짓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이 명하신 금단의 열매를 왜 손댔느냐는 추궁에 두 사람이 변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남자인 아담을 책망하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왜 먹었느냐?”(11절). 아담이 핑계를 댑니다. 12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책임을 여자에게 떠넘기되 그냥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토를 납니다. 하나님이 이 여자를 자기에게 안 주셨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이 반려자로 주셨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것이지요. 궁극적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투로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하와에게 책임을 추궁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이번에는 하와가 뱀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뱀을 안 만드셨더라면 제가 뱀의 유혹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하나님이 지으신 뱀 때문에 넘어졌다는 변명이지요.
   
여기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만든 최초의 가정에는 언제나 책임회피가 있습니다. 핑계와 변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로부터 비롯된 원죄의 지배를 받는 지구상의 모든 가정 역시 불완전합니다. 핑계를 대고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기에 바쁩니다.
미국 목사님 한 분이 오래 전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엘리펀트 맨,’ 즉 ‘코끼리 사람’이라는 영화를 보기 위하여 티켓을 예매했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표였기 때문에 몇 달 전에 예매를 한 뒤 그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상영되던 날 사모님과 함께 극장 근처의 식당에 미리 가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을 마친 뒤 목사님이 호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보니, 맙소사 영화상영 시간이 어젯밤이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상영하는 표를 샀는데 깜박 잊고서는 수요일 저녁에 온 것이지요. 
   
목사님 부부는 디저트를 먹는 것도 포기하고 급히 극장으로 달려가서 검표원에게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짜고짜 저쪽에 가 서 계시면 여직원 한 사람이 도와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쉰 목사님은 어떻게 핑계를 대서 극장 안으로 들어갈까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달 전부터 표를 미리 구해놓았다는 사실을 강조할까.” “나는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처음 당한다고 변명할까.” “이렇게 해도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래 맞아. 최후로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선처를 구해야지.”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핑계거리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자기 옆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부부가 왔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또 다른 부부가 와서 옆에 섰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커플이 왔습니다. 그날 밤 표가 잘못돼서 목사님 부부와 똑같은 곤경에 빠져서 변명을 해야 할 부부는 모두 네 쌍이나 되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목사님 부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극장 안에 들어갈 확률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지요. 
   
드디어 극장 여직원이 왔을 때 사람들은 왜 극장표가 잘못되었는지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부부는 다른 주(州)에 사는데 깜빡해서 표를 집에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부부는 집을 떠날 때 다른 지갑을 갖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부는 목사님과 사정이 비슷했습니다. 밤 시간인 줄 알았는데 티켓을 보니까 낮상영 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핑계거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내 깨달은 것은 어떤 핑계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날 밤 네 쌍의 부부가 극장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모두 입석(立席)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극장 여직원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변명과 핑계거리를 들을까, 극장 측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죄를 짓는 인간이 하나님께 읊어대는 변명과 핑계거리는 또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핑계를 대며 이웃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모든 인류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귀신의 집안에 몰래 들어가 그 두목을 결박하시는 예수님>
   
이제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가족관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막 3: 20-2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요 7: 5 참조). 
   
이와 같이 미쳤다는 소문이 난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의 이야기는 잠시 중단된 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과 벌인 논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서, 즉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이 들려서 그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축사(逐邪) 이적을 귀신의 소행으로 폄하하는 서기관들을 향하여 한 가지 비유를 쓰십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족의 비유입니다. 참된 가족, ‘하나님의 가족’을 말씀하시기 전에 미리 ‘귀신 가족들’을 비유로 들고 계신 것이지요. 바알세불이 귀신의 두목이라면 어떻게 귀신의 두목이 자기 집안의 귀신 가족들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23-27절 말씀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나라나 가정이나 스스로 분란이 일어나면 자멸한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귀신의 두목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국가나 집안에 내분이 일어나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이기에, 예수님이 귀신 두목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에 어떤 집안의 식구를 제압하려면 그 집안에 몰래 잠입해 들어가 먼저 가장 힘센 두목을 결박한 뒤 그렇게 하듯이, 예수님 역시 귀신 두목인 바알세불보다 훨씬 더 힘이 센 분으로서 바알세불을 결박한 뒤에 바알세불의 집안 식구인 귀신을 쫒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28-29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는 다 용서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30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욕하는 사람들이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마귀가 하는 일로 왜곡하는 이들이야말로 성령모독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누가 내 가족이냐?>
   
이제 우리의 관심은 31-35절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룹은 크게 두 그룹이지요. 먼저 예수님의 가족들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과 자매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붙잡아 말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서기관들, 즉 율법학자들 역시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오해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inner circle, 즉 예수님 쪽에서 본다면 insiders, 모두 내부 사람들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가족들은 같은 피를 나눈 혈육이요, 서기관들 역시 혈연관계를 확대해서 같은 동족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outer circle, 다시 말해, outsiders, 즉 외부인들로 보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혈연관계로 본다면 inner circle이 틀림없지만 예수님의 기준은 혈연관계로 inner circle과 outer circle을 나누지 않습니다. 
바알세불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불러내려고 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을 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예수님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반문하십니다. 34-35절을 보세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좁다란 혈연관계에 기초한 가족 개념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우주적 가족 개념으로 확장하십니다. 사실 혈연가족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혈연가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그 가족관계는 위험합니다. 
실제로 성경을 아무리 읽어봐도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다는 이야기만 아주 드물게 나타날 뿐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그 어떤 협조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생판 모르는 갈릴리 뱃사람들, 세리, 열심당원, 세리와 창기들, 강도, 등등,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소외그룹들과 한 가족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 가족관계를 떠나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중심으로 한 우주적 가족관계를 지향(指向)하셨 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우주적 가족관계는 언제나 혈연이나 학연, 지연, 계층간이나 인종간, 남자와 여자간의 차별하는 일체의 장벽을 허무는 가족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 사람이 허물이 크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그가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뜻이 있으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와 창기요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를 하나님의 가족 안에 편입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가족관계는 너무나 협소하고 이기적이고 물량주의적입니다. 나와 피를 함께 나누고 내 편에 서고 나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만 가족관계 안에 들어오게 합니다. 하지만 만일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나와 전혀 피를 나누지 않았고 피부 색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큰 잔치에 기꺼이 참여할 뜻이 있으면 우리와 똑같은 식구입니다. 우주적 하나님 가족의 일원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대로 내리가족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더 큰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세계가족, 우주가족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