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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의 복음_ 마음 (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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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복음_ 마음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신라 때에 원효 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동굴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목이 말랐습니다. 어둠 속을 더듬어 바가지 하나를 찾았고 거기 고인 물을 먹었습니다. 너무나 달고 맛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원효 대사는 환히 비친 바가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이었습니다. 시체 썩은 물을 먹었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그러다 원효 스님이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지난 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물이 오늘은 구역질나는 물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현상은 동일한 데 마음먹기에 따라 정하게도 되고 부정하게도 되며,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되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당나라로 가는 유학을 포기하고 그 길로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원효대사가 이 진리를 깨닫고 지은 시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므로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우리가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 때 예수님은 고물에 평안히 누워 잠을 잤던 반면에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환경을 뛰어넘는 마음의 평화가 있었기 때문이요, 제자들은 환경에 매여 마음의 평화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이유를 믿음에서 찾았습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그들이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신병의 근원은 마음의 불안과 근심에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불안, 장래에 대한 불안, 건강과 안전에 대한 불안, 사업 성공이나 높은 자리에 대한 불안, 자녀나 가족에 대한 불안, 물질에 대한 근심과 염려 등 우리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불안의 파도가 일어납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불안케 하고 무심결에 한숨이 나게 만드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의 고별강론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매우 긴 설교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길게 말씀하신 이유 중 하나는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14장 1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7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요13:1) 즉 “내가 곧 죽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오합지졸이고 연약합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까지 좇아왔는데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하니 근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13장부터 16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마음에 근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생의 소망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실 죽는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도 또한 “땅에서부터 들림을 받는다”(요12:3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높은 곳에 달리는 것은 곧 하늘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라 할 것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소유한 것이 무엇이고 장차 소유할 것이 무엇인지 밝혀 주십니다. 14장 1절과 2절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주님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제자들 또한 그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갈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과 심판의 세계가 아니라 따뜻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가는 방법 또한 알고 있습니다.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가는 곳도 알고, 가는 방법도 아는데 어찌 근심하고 두려워하느냐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죽음 때문입니다. 불안과 근심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그림자들에 불과합니다. 내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궁극적인 불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불안과 죽음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현기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입을 크게 벌린 죽음이라는 심연을 우연히 내려다보는 자가 느끼는 현기증과 같은 것이 불안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합니다. 영원한 것보다는 이 세상의 덧없는 것에 연연해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깁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람들이 이 인생을 즐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고향이 있는 자들은 평안합니다.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들은 여행 자체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또한 도마처럼 의심하며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마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14:5) 우리 또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 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모든 종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중 우리 기독교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싸웁니다. 죽음이 오히려 영생에 이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공자의 유교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공자의 제자 중 계로가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 사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솔직한 답변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불교는 죽음을 윤회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해탈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경험해야 할지 모릅니다. 반면에 주님은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죽으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더 묘연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물질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세계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그 이전의 중세나 고대인들보다 더 불안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우리 마음 또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마처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적인 가치관에 맞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에 대한 약속을 굳건히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우리 마음에 평화가 주어집니다.

둘째,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그 자리를 성령님께서 대신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별강론에서는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매우 많습니다. 14장 16절과 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보혜사는 후원자, 변론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보혜사였다면 이제는 성령님이 제자들의 보혜사가 되어서 지켜줄 것입니다.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이제는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를 직접 가르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5장 2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6장 7절과 8절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장 13절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지만 그 배경에는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죽음을 앞두자 요한의 제자들의 근심이 많아졌습니다. 안팎으로 핍박과 이단의 위험이 있는데 자신들의 믿었던 스승이 죽음을 앞두고 있자 불안해진 것입니다. 그때 사도 요한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이 마지막 돌아가시려 할 때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근심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셨고, 그 분의 가르침과 보호하심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진리를 수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을 떠난다고 하여도 걱정할 것 없다. 진리의 성령께서 대신 너희를 가르치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다.

2천년 이후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혼자의 노력으로 무엇을 한다면 힘이 들고 쉽게 좌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또한 일체유심조를 믿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아니 우리 마음 안에 계신 성령님이 결정하고 만들어냅니다. 

불교 중 선 불교는 마음에 대한 문제를 놓고 오랜 투쟁을 했고 이를 통해서 참 자아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달마 대사는 인도 사람이었지만 중국으로 건너와 선불교를 열었던 사람입니다. 달마 선사의 제자 중 하나인 혜가가 달마에게 물었습니다. “제 마음 안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제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소서” 그러자 달마가 역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에 네 마음이 있느냐? 여기 꺼내보아라. 그러면 평화롭게 해 주겠노라” 긴 침묵이 흐른 뒤 혜가는 자기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달마는 “이미 네 마음을 평화롭게 하였노라”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달마 대사는 불안의 근원이 마음에 있고 이 마음에 대해서 묵상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혜가는 거짓된 마음과 본성에 해당하는 참마음을 알게 되고 거짓된 마음에 매이지 않음으로써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조석으로 변하고 천당과 지옥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에 매이면 평화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좋아 하는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새’입니다. 우리 안에는 악마가 살기도 하고 천사가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사는 온통 우리 마음이 가시나무 같다고 노래합니다. 쉴 곳도 없고, 새들도 날아왔다가 찔려 돌아갑니다. 이 노래에서는 우리 마음이 온통 슬픔과 절망 덩어리뿐이라 노래하고 있습니다. 진짜 그런가요?

마음에 대한 연구는 현대 심리학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의식에 대한 연구, 마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마음이 거대한 바다와 같은 것임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상처의 근원이, 모든 인류의 경험의 근원이, 모든 행복의 근원이, 어떠한 파도도 해쳐갈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마음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우리 마음의 한 중심에 성령님께서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마음에는 온갖 허무로 가득하고 상처의 빙하들만 떠돌아다니는 곳만이 아닙니다. 뜨거운 불덩이가, 시원한 생수의 근원이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 39절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나의 목마름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마름을 해결할 생수가 흘러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마음은 대단한 존재이며, 대단한 능력이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참마음을 붙잡는 자에게 평화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 성령님을 잡지 못하고 세상의 풍파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끊임없이 불안과 근심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여러 마음이 있고 절망과 상처의 파도가 출렁이지만 그것을 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께서 그 수면 위를 날고 계십니다(창1:2). 그 분의 품속에서 어둠은 빛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혼돈은 질서로, 허무는 생명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셋째,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별강론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기도에 대한 교훈을 얼마나 많이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7번에 걸쳐 기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4장 13절과 14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5장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장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6장 23절과 24절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6장 26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주님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위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근심하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문제는 끊일 날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다 보면 우리에게는 평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고별강론이라는 한 설교에서 무려 7번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장래의 문제, 물질의 문제, 근심의 문제 무엇이든 내어놓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 기도는 우리 마음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내 욕망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아니면 선한 동기이든지 가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나 모든 소원을 주님께 다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기도는 어린아이처럼 보자기를 넓게 펴고 하나님 앞에 나가 조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도 달라고 하고 저것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담하고 순수하게 간구하십시오. 

이런 간구에는 어린이들의 탐욕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절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 편에서 보면 그 기도 내용들이 불필요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당신을 신뢰함으로 기도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간구하되 마지막에 이런 기도 하나만 덧붙이십시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당신은 옳고 선한 일을 행하시니 우리의 우매한 기도 중에서 옳은 것만을 선택하시옵소서. 당신은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시나이다”(틸리케의 설교 중에서)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만 기도하십시오. 우리 마음에 평화를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되 믿음으로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십니다. 이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그런 하늘의 평화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단지 관념이거나 선언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방법입니다. 능력입니다. 이 평화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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