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점잖은 돈의 철학 (빌 4:10-20)

첨부 1


점잖은 돈의 철학 (빌 4:10-20)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바울이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계속해서 말을 돌려서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에 대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자신에게 돈을 보내줘서 고맙고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 어디에도 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여러 가지 다른 표현으로 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예, 나의 쓴 것, 선물, 과실, 모든 것, 너의 준 것, 재물, 모든 쓸 것, 이 모든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돈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사역에 재정적으로 동참하기 위해서 헌금한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도 돈이 필요합니다. 이건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고 모든 사람이 압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해서는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한기총이 요즘 목회자가 납세의 의무가 있느냐에 대해서 늘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목회자는 월급을 받는 게 아니고 사례를 받는다는 논리인데 사례와 월급의 차이가 무엇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월급이라고 부르면 세금을 내야 되고 사례라고 부르면 세금을 안 내도 되는 것인지…. 이것은 불필요한 논쟁의 여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냥 월급이라고 인정하고 세금을 내면 됩니다. 

우리 모두는 돈에 대해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돈을 좋아합니다. 돌을 맞은 아기가 돌상에서 무엇을 집으면 부모가 제일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돈을 집을 때까지 계속 집게 합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돈을 집으면 제일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돌상에 돈만 놓으면 됩니다. 그게 단조로울 것 같으면 원화 · 달라 · 위안화 · 엔화 · 유로화 그렇게 갖다 놓으면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소는 인도네시아 교통경찰이 돈 받을 때 짓는 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정직한 미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것을 이중적으로 만드느냐면 모두가 돈을 좋아하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을 죄악시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종교의 영향이라고 보는데 기독교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고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셨고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재물이 많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금방 깨닫습니다. 돈은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돈이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돈에 대한 가르침이 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구약성경은 재물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 대부분이 부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 다윗 · 솔로몬 심지어 고난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욥마저도 부자였습니다. 그가 고난이 끝났을 때 곱절의 부자로 끝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부를 추구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느냐. 이것을 알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영적인 면이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이 실제 가나안땅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가나안 땅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서 요단강은 진짜 요단강을 가리키지만 신약성경에서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세상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처럼 구약에서 신약으로 건너오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영적인 면으로 변화한 면이 있어요. 

두 번째 이유는 구약에서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임박한 종말이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천국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초대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세상이 곧 지나가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뿐만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곧 지나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이든 핍박이든 시련이든 가난이든 이 모든 것이 곧 지나가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이 곧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세상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돈에 대하여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 번째로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에 모든 가르침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다시 맞출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지만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준비 작업이요 또 전초전이요 예표요 예언이요 그림자에 불과했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가 진짜였습니다. 본론. 실체.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윤리와 가치관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체화된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아직 재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기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말이 임박한 것처럼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만 보아도 그러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 일곱 집사중의 한 사람인 빌립에게는 전도의 은사가 있어서 그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종횡무진 사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이 단독으로 사마리아에 날아가서 사마리아를 복음화 했습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가이사랴에 간 다음부터는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조용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빌립이 가이사랴에 정착해서 가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딸 넷을 낳았는데 그 딸 넷이 다 예언의 은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의 영발은 여전했지만 젊었을 때처럼 종횡무진 다니면서 활동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도 해야 되고 자식도 키워야 되고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돈도 벌어야 했을 것입니다. 

신앙인이 돈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티를 낼 수도 없는 난처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의 입장이 그러합니다. 그가 힘들었다는 고백을 하는데 그가 힘들었던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1절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그 말은 돈이 없어서 힘들 때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14절에 ‘그러나’ 여기에서 ‘그러나’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족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그 말의 뜻은 여러분이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 숨통이 틔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신앙인이고 인격자이고 점잖은 인물이기 때문에 여느 사람처럼 자신의 재정적인 궁핍함에 대하여 아우성을 친다든가 불평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할 말은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사도라고 해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기도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되고 물질적으로 도와주어야 되고 돈이 있어야 전도를 하던 선교를 하던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한 올바른 철학이 필요합니다. 진부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은 더 이상 소용없습니다. ‘금을 돌보듯 하라’ 그건 별로 소용이 없는 격언입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다더라, 그러나 돈 많은 남자를 여자들이 좋아하더라구요.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의 상당부분은 돈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복지를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빈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예술을 장려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남북통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미래를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잘못 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돈은 유익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백치 아다다처럼 돈을 불태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돈이 필요하고 부자가 필요하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천박하고 저속한 돈의 철학은 우리가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라느니, 물질만능주의라느니, 돈 때문에 가족끼리 형제끼리 싸우는 것, 검은 돈, 피 묻은 돈, 인간을 타락시키는 돈,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돈, 하나님을 대신하는 돈, 남에게 피해를 주는 돈, 사람을 죄짓게 하는 돈,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돈의 철학을 두 가지 면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돈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돈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돈이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왜 살아야 되는지를 알고 그 돈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돈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을 올바로 사용하면 사회에 엄청난 도움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대에 돈이라는 개념뿐만이 아니고 자본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돈이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자본이라는 개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돈은 그냥 쌓아두는 돈으로만 존재했습니다. 때문에 누가 부자라고 해서 사회에 이득이 될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대의 자본은 쌓아두는 것이 아니고 일하는 돈입니다. 돈이 일을 합니다. 돈이 일을 하게 되면 공장을 지을 수가 있고 제품을 만들 수가 있고 연구를 할 수 있고 경제가 발전할 수 있고 일자리를 만들 수가 있고 생활수준이 높아질 수가 있고 가난을 극복할 수가 있고 나라가 부강할 수가 있고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돈이 일을 하면 가능합니다. 

돈에 따르는 책임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자의 의무가 그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에 있다고만 생각하는데 환원하는 것 또한 방법이지만 돈이 일을 하게 하면 사회에 더 큰 유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가난했을 때 선진국이 그냥 우리에게 돈을 나눠준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나눠주는 데에 우리가 의존했다면 지금도 그것을 의존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선진국이 차관이라는 형식으로 돈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공장을 짓고 고속도로를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뀔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력가는 사명감을 가져야 됩니다. 그가 사회에 진 의무는 그 부를 환원하는 것만이 아니고 돈이 제대로 일하도록 함으로써 모두가 더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중동의 졸부들처럼 사치품이나 모으는 식의 낭비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중동의 부자들을 보면 중동의 부자들을 보면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많은데 그 돈과 부를 과시하기 위하여 그들이 외국의 명품을 얼마나 사들이는지 몰라요. 

도대체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까. 그 부를 외국의 명품을 몸에 입는 옷에서부터, 액세서리에서부터, 자동차에서부터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외국의 명품이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자기 나라가 그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그 모든 것을 외국에서 사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끄러운데 도대체 나라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적어도 우리나라는 과거에 국산품 애용하는 운동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것뿐만이 아니고 최소한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남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을 우리나라가 만들어 수출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돈의 역할, 돈의 사명, 돈을 가진 사람의 책임이 무엇인지 안다면 내가 어떻게 돈을 쓰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사회 유익이 되는 것이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고, 내 돈을 내가 소비하는데 누가 상관하느냐가 아닌 내 돈을 쓰는 것이 어떻게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최소한의 상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돈의 철학은 힘을 잘못 사용하면 남이 다치는 것처럼 돈을 잘못 사용하면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가 광산을 경영할 때 광부들의 가족이 자기가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만 식료품을 사도록 하고 자기가 운영하는 부동산을 통해서만 집을 사고팔게 해서 그 일꾼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또 존 록펠러가 석유사업을 하면서 자신의 엄청난 재력으로 경쟁업체들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독점을 차지했습니다. 앤드류 카네기든 존 록펠러든 좋은 일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욕을 먹는 이유는 그들의 가진 재력을 남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한 것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권력을 산다든가, 돈으로 진실을 은폐한다든가, 돈으로 진실을 왜곡한다든가, 돈으로 사람을 타락시킨다든가, 돈으로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든가, 돈으로 규칙을 어긴다든가, 돈으로 인격을 대신한다든가, 돈으로 사랑을 대신한다든가, 돈으로 하나님을 대신한다든가, 돈으로 믿음을 대신한다든가, 돈으로 봉사를 대신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은 잘못입니다. 돈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고 돈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처럼 돈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교회가 침묵합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저절로 지혜를 얻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침묵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사라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관심사에 대하여 교회가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됩니다. 그걸 회피할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돈의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바로 배워야 되고, 바로 알아야 되고, 바로 버는 법을 배워야 되고, 바로 쓰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부유함을 누리게 하신다면 거기에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뿐만이 아니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 you will be a blessing, 너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어요. 

이게 진짜 복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복을 받음으로 내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대단한 사명이에요. 하나님의 복은 사명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사명을 수반하는 것처럼, 달란트가 사명을 수반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사명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