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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저를 붙잡아주소서!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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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붙잡아주소서! (왕상 19:1-8)

< 주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 

요새 경제가 어려우니까 많은 사람들이 낙심해 있습니다. 심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우울해지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에 집중을 못하고, 마음의 동요가 심하고, 잘 맡기지 못하는 것이 우울증의 징후들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의 3분의 2가 수시로 다가오는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빠질 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나는 가치가 없다. 나는 희망이 없다.” 그것은 완전히 거짓입니다. 그런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의 가치는 거의 무한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실한 성도는 ‘위대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직 우리 앞에 최상의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최고의 성공의 날보다 더 좋은 날이 우리 앞에 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공만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죄의 영향력은 집요하고 광범위하게 인간사회 전반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모습은 초라할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을 우리가 어떻게 바꿉니까? 물론 우리 혼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 손을 들어 주님께 항복하고 주님이 우리 손을 붙들어 주시면 얼마든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은 19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26세에 박사학위를 딴 인재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섬기면서 철저히 비폭력 투쟁으로 흑인 민권운동을 했습니다. 처음 그 운동을 시작할 때 그의 힘은 너무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손을 붙잡고 가소서!” 

사람은 못해도 주님이 붙잡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는 1968년 39세에 암살되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민권운동을 붙잡아 주시고 큰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는 지금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미국인으로 추앙 받고 있고, 그의 탄생일은 미국의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때, 아무리 많은 기도와 준비를 해도 시험과 환난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때로는 비전이 이뤄지는 기간이 길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때 두 손을 들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나가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반드시 그 두 손을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붙잡아주시는 힘으로 어려운 상황을 딛고 일어서면 시험과 환난은 축복과 성숙을 남기고 물러갈 것입니다. 


< 낙심을 이기는 방법 > 

본문을 보면 구약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승리한 후에 낙심에 빠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우울증은 실패 때만 찾아오지 않는 것을 봅니다. 어떤 선수는 금메달을 딴 후에 우울증을 겪고, 어떤 학생은 졸업장을 받은 후에 우울증을 겪고, 어떤 산모는 출산 후에 우울증을 겪습니다. 때로는 말 한 마디가 우울증을 일으킵니다. 

엘리야도 이세벨 여왕의 죽이겠다는 말 한 마디에 낙심에 빠집니다. 그런 낙심한 상태에서 거의 2달을 보내다가 호렙산 굴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다시 사명을 발견하고 일어섭니다. 어떻게 그가 낙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본문을 통해 낙심을 극복하는 몇 가지 요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정 

여기서 ‘인정’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믿음을 잃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브엘세바까지 도망쳤습니다(3절).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최남단 지역입니다. 순식간에 거기까지 도망친 것을 보면 그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브엘세바에서도 안심하지 못하고 그곳에 사환을 두고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갔습니다(4절). 그러면 안전할 줄 알았지만 그때 너무 지쳐서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스스로 죽기를 구합니다. 얼마나 처량한 모습입니까? 엘리야처럼 갈멜산에서 하늘의 불을 끌어내린 선지자가 곧 이어서 깊은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제의 성공자가 오늘의 실패자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어제는 실패자였지만 오늘은 그 실패를 딛고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봉사하던 사람이 원망의 화신이 되는 경우도 있고, 정말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위대한 성자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사는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하나님은 가끔 시련의 때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경을 통해 “너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앞세울 때 낙심도 사라질 것입니다. 


2. 믿음 

왜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쳤습니까?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영혼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대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사단은 겁을 주는데 선수지 주님의 보혈로 덮인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동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는 사자’는 대개 ‘이빨이 없는 늙은 사자’라고 합니다. 힘이 없으니까 우는 소리를 크게 내어서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이빨 빠진 사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귀보다 훨씬 크고, 문제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의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저도 선천적으로 겁이 많은 편인 저의 두 딸이 두려움을 이기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얼마 전, 할아버지 입관 때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할아버지의 시신을 꼭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서가 말렸습니다. “아이들이 무서워한다! 다시 생각해보라.” 그러나 가족의 마지막 시신을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추억을 오래 남기는지를 저는 장례 예배를 인도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그 좋은 교육 기회를 어떻게 지나칩니까? 그래서 아이들을 설득해 결국 데리고 갔습니다. 대신이 무서움이 없도록 열심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시켜서인지 아이들이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겁 많은 아이들이 입관할 때 할아버지 시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까이 봤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가기 싫다고 질겁하던 조카도 끝까지 할아버지의 시신을 지켜봤습니다. 나중에 동서에게 “조카가 무서워했느냐?”고 묻자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한 리조트에서 개최된 인체의 신비 전에 갔습니다. 전시장에는 진짜 시신 수십 구가 전시되어 있었고, 만질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섹션에는 가이드도 있었고, 20-30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편하게 관람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섹션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이드도 없었습니다. 알코올 냄새와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고 분위기도 으슥했습니다. 

둘째 섹션으로 갈 때 둘째 딸이 그냥 나가자고 했지만 평소에 겁이 많은 줄 알았던 첫째가 말했습니다. “왜 그냥 나가! 돈 아깝잖아!” 그리고 그곳에 가서 진짜 시신과 뼈를 보면서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다 관람했습니다. 그처럼 진짜 시신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대견하게 보였습니다. 

한 번의 무서움을 극복한 경험이 있으면 그 다음에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매일 시신을 만지는 사람들은 시신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게 담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더욱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마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문제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이 있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 문제를 두려워해서 도망치면 더 큰 곤란에 빠집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가 두려움에 젖어 도망치자 그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혼자 있으면서 죽음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기도합니까? 자기를 불쌍하고 비참하게 보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 저의 생명을 취하소서! 저는 가치 없는 존재입니다.” 

엘리야는 자기 연민에 빠졌습니다. 자신은 승리자(victor)가 아니라 희생자(victim)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얼마 전의 놀라운 승리를 잊어버리고 “나는 불쌍한 존재다!”라는 ‘희생자 증후군’에 빠졌습니다. 그처럼 자기 연민은 마음과 영혼을 찢어 삼키는 야수와 같습니다. 왜 엘리야가 그런 자기연민에 빠졌습니까? 첫 단추를 잘못 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두려움이 들어오게 하니까 점점 하나님보다 문제를 크게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귀와 문제는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보십시오. 우리가 실패하면 사람은 대개 떠나지만 그때 주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때 주님을 꼭 붙들면 준비된 ‘주님의 사람’도 보내주시고 꿈과 같은 기회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나가십시오. 


3. 안식 

본문에서 왜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까? 심신이 너무 지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다시 일으키십니까?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가 낙심했을 때 첫째 처방으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은 “야! 엘리야야! 사명을 가지고 일어나라! 다시 시작하라!‘는 권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먼저 천사를 보내어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자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었습니다(6절).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일으켜 또 먹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삶의 페이스를 늦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또한 여행하는 것과 쉬는 것과 잠자는 것도 시간낭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행의 의미는 어떤 면에서는 기도의 의미와 흡사합니다. 사람은 기도할 때 가장 창의적이 됩니다. 저도 기도할 때 그냥 기도만 하지 않고 앞날의 비전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기도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만큼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받을 때가 바로 여행할 때입니다. 일만 하면 결코 사람은 창의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성공적인 사역을 원하면 안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끔 말씀 묵상이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신선한 밥상을 차려 새벽과 주일에 성도들에게 영적인 식사 대접을 잘해야 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심신이 지쳐 말씀 준비가 안 됩니다. 그때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잡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찍 교회에 나와 말씀 앞에 서면 그 전날과는 달리 묵상이 잘 됩니다. 그때 잠의 신비함에 감탄하면서 고백합니다. “하나님! 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은 신비한 힘을 가진 보약입니다. 그래서 저는 휴가 가면 잠을 많이 잡니다. 그러면 아침에 일어날 때 허리에 통증을 느낍니다. 허리가 놀란 것입니다. 그러나 통증 후에는 뼈에 생기가 임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처럼 잠도 중요합니다. 핸드폰 약이 다 소모되면 다시 충전하듯이 잠은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잠을 줄여야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성공하는 사람은 잠을 적절히 자고 자투리 시간을 줄이는 사람입니다. 

시편 127편 2절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잠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사람이 잠을 자지 못하면 생각이 복잡해지고, 생각이 복잡한 사람을 통해 세상도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잠을 잘 자고 열심이 일하면, 다시 잠도 잘 오고, 생각은 단순해지고, 일에 대한 열정은 늘어납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세상도 맑아지고 환해집니다. 그처럼 안식은 재충전과 내일의 창조적인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4. 격려 

본문 3-4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이스라엘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친 후에 나중에는 사환까지 놔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낙심에 빠지면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을 멀리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면 지금 크게 낙심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누군가 옆에 있어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재작년 말에 스포츠센터가 나가면서 떠밀리다시피 미션센터를 시작할 때, 처음에 어떤 용도로 써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때 한 친한 노 목사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영어를 가르쳐보세요. 왜 그 잘하는 영어를 안 써먹어요?” 그때 그분 말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 내가 옛날에 개발한 네트영어가 있지?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 네트영어를 주셨구나!” 

 결국 미션센터 공사를 마치고 네트영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방법이 정말 좋다는 생각이 들고, 한국인들에게 있는 영어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전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그 노 목사님을 만날 때 그 얘기가 잠깐 나와서 제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네트영어가 너무 좋습니다. 점점 듣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전도효과는 별로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눈에 보이는 성취가 없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물은 90도나 95도가 되어도 끓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00도가 되면 비로소 끓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그 한 마디 말이 얼마나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격려하는 말을 힘입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그래! 지금 90도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95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임계점까지 참자!” 

살다 보면 지치고 힘들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의외로 참된 위로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 현실이 사람들을 더 낙담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대개 성공하고 잘되면 찾아와서 친구하자고 하고 동업하자고 합니다. 그때는 은행에서 돈도 빌려가라고 합니다. 반면에 힘이 없고 실패할 때는 위로와 격려와 도움보다는 핀잔과 비판과 외면의 고통이 심해집니다. 

교회도 성장할 때는 충성하겠다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반대로 침체될 때는 여러 이유를 대면서 떠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 누군가의 격려가 없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자신은 그 반대로 살면 됩니다. 누군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패했어도 열심히 격려해주십시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격려가 내게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남을 격려하는 것은 나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유명한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Carl Menninger)가 강의를 끝내고 질문을 받을 때 누군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수시로 우울증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사람들은 “즉시 정신과 의사에게 가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메닝거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는 집에서 나와, 철롯길을 건너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을 도우십시오. 그처럼 자신에 몰입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십시오.” 

지금 마음이 힘드십니까? 그때 더욱 이웃을 살피려고 하십시오. 요새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환율이 급등하면서 후원이 줄어 선교사님들이 많이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선교사님들을 더욱 살펴야 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뜻있는 일에 관심을 둘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과 정성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 주님! 제 손을 붙잡고 가소서! > 

이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려고 하십시오. 위로받으면 큰 힘이 되지만 때로 사람의 위로가 없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선한 손길을 철수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손을 붙잡고 가소서!” 지금 상황이 비참해도 하나님께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 앞에 최상의 때가 주어질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로뎀나무에서 엘리야가 쓰러졌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떡과 물로 새 힘을 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떡은 ‘말씀’을 상징하고 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말씀과 성령은 영혼을 아름답게 지키는 2대 자산입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말씀과 성령, 이 2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1700년대 타락한 영국 사회를 일으켰던 것이 바로 말씀과 성령이었습니다. 

1700년대 영국 사회가 극도로 타락했을 때 옥스퍼드 대학 기숙사에 키가 160센티도 안 되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새벽 4시에 일어나 따로 조용한 곳에서 말씀을 보고 기도했습니다. 매일 그렇게 하자 한 명씩 그 숫자가 늘었습니다. 그 숫자가 점차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그 모임을 ‘홀리 클럽(거룩한 공동체)’라고 붙였습니다. 

그 모임은 끈질기게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모임을 처음 시작하고 이끌었던 그 작은 청년을 향해 메쏘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직역하면 방법주의자, 조금 부드럽게 표현하면 원칙주의자란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좋은 원칙을 세우고 줄기차게 그 원칙대로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감리교단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였습니다. 그래서 감리교인을 영어로 메쏘디스트라고 합니다. 

웨슬레는 그 원칙을 가지고 미국의 인디안 선교를 갔는데 3년간 거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원칙만 가지고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패잔병으로 있다가 어느 날, 그는 모라비안 교도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한번 했다 하면 꾸준히 밀고 나가는 원칙주의자에게 성령의 임하자 그는 불같은 전도자가 되었고, 결국 그를 통해 영국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지금의 감리교단이 생겼습니다. 

배움이 부족해하고 재산이 없어도 좋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희망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끼는 분들도 십자가를 의지하고, 다시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일어서십시오.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이 있고, 기도와 사명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일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손에 꼭 붙들려 큰 소망을 가지고 나감으로 엘리야처럼 크게 쓰임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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