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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러나느니라! (롬 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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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느니라! (롬 2:12-16)

아덴(Athens, 아테네)은 헬라(그리스)국의 수도요, 서양문명의 모태지인 고도(古都)이다. 2,000여 년 전 사도 바울은 그리스 북부 지역인 마게도냐의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배를 타고 이곳 아덴으로 왔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이곳에 도시가 처음 세워졌을 때 아테나(Athena) 여신과 포세이돈(Poseidon) 사이에 이 도시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누가 이 도시에 더 유용한 선물을 가져오느냐로 승부를 결판 짓게 되었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올리브기름을 내는 감람나무를 가져왔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바닷물처럼 짠물을 가져왔다. 승부는 쉽게 아테네 여신의 승리로 끝났고, 그래서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되었다. 

아테네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탄생했던 학문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덴 거리에서는 사람 찾기보다 신을 찾기가 쉬웠다는 말처럼 아덴 광장에 서 있던 공중 우상만도 300개가 넘었으며 기타 신상을 모두 합하면 3만을 헤아리는 종교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런 도시를 바울은 두 번이나(2, 3차 전도여행 때) 들러 복음을 전했다. 특히 2차 전도여행 때에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서 우상에 대하여 철학자인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등과 쟁론을 벌였다(행17:18). 

그곳은 아크로 아덴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다.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최초의 사람은 할리트 호티우스를 죽인 제우스신의 아들인 아레스(Ares)였다. 그는 자기 딸을 겁탈한 사촌 형제를 살해한 일로 다른 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결과, 아레스는 정당한 복수 살인이었기 때문에 무죄로 판정되었고, 그 후 아레스가 재판받은 곳을 아레스의 언덕, 곧 그리스어로 아레오바고(Areopagus)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유래에서 아레오바고는 원래 살인죄를 범한 사람을 재판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테네 시의회 의원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는 바위 언덕을 지칭하는 지명과 함께 아테네 시의회를 뜻하는 의미를 두게 되었다. 

바울은 바로 그 아레오바고(Areopagus, 행17:22) 언덕에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모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이나 은, 돌로 만든 신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도 외치자 청중들로부터 조롱과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레오바고 관원이었던 디오누시오 같은 유명명사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행17:22~34). 지금도 그 언덕에 오르는 계단 오른쪽 바위에는 바울의 설교문이 조각되어 있다. 언덕을 내려와 다시 왼쪽 길로 내려가면 아덴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디오누시오(해17:34) 기념교회가 아고라 터 옆에 세워져 있다. 훗날 이곳에 교회가 크게 왕성하여 바울의 전도로 믿은 아레오바고 두 관원 디오누시오가 제1대 감독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변증 : 아레오바고에서

사도행전 17장 22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여는 의미일지 모르죠. 이들이 얼마나 종교심이 많은지,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서도 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열심히 절에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교회에도 열심히 다닙니다.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녀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역시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종교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성과 우리가 믿는 신앙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가진 자나 율법을 가지지 않은 자나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고, 인간들이 지키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이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주로 위안을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하다!”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에 나오라는 말에 발끈하는 사람 중에는, “교회에,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고 손해를 봤다!”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악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다 받은 상처들이지 하나님의 본성에 상처를 받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한 사람들이 아니죠. 오히려 하나님께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회의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기도는 다 들어주시면서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나요? 다른 사람들을 보면 만사가 형통하는 것 같은데 저는 왜 만사가 캄캄한가요? 하나님 저만 외로운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기도를 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사야 40장 27절에 “어찌하여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라고 하소연하는 이 소리 앞에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길은 보시고, 다른 사람의 억울함은 풀어 주시면서'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죠. 하나님을 향한 불평은 오히려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읽다 보니까 흥미롭게 이 부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도 불평하신다는 것이죠.

이사야 40장 28절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여기에도 역시 생략된 문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의 뜻에 귀를 기울이다.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한다.”
무슨 말인가요? 너는 왜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하고 힘들어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문제를 비집고 사단이 들어옵니다. 결국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직면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속삭입니다. “종교를 바꿔봐! 신을 바꿔보는 게 어때?”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종교성”입니다. 무언가를 의지해보고, 아니면 바꿔보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선하게 살려는 목적이 무어냐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이런 종교성에 붙여진 신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편 20편 7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사도행전 17장 24-25절입니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의 지적이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왜 아덴의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었나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어떻게 만족하게 해야 할지 모르기에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만족함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가장 큰 만족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문제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동일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우리가 잘못 믿을 수 있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오류, 둘째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일종의 잘못된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율법으로 죄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이 말은 법적으로 보면 분명히 하자가 없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보면 뛰어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도적질하지 않으면 도둑이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탐심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증거가 없으면 죄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보십니다.

과연 여기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으로 번역해서 다시 보겠습니다.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라면, 하나님은 정상을 참작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인 줄 잘 알면서도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듣기만 하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듣기만 하고” 라는 말 속에는 율법을 어려서부터 배워온 교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다음, “명령을 행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도덕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렇습니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져 있으나, 그 양심에 따라 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양심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않기에, 율법을 가진 사람보다 더 위험할 수 있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씀과 율법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양심이 무뎌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지만, 무신론적인 모습이 오늘 우리 신앙인 가운데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 가운데 하늘나라에 가보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니 천사가 큰 책을 그의 앞에 갖다 놓습니다.
“이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니까 “그 책 가운데는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첫 장을 들추니까 글자로 가득 쓰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당신이 세상에 살 때 행동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다음 둘째 장을 들춰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첫 장보다 더 잔글씨로 가득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살 때 말로 지은 죄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말로 지은 죄는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더 많은 모양입니다. 
그다음에 셋째 장을 들여다보니 둘째 장보다 더 잔글씨로 더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의 대답이 “이것은 당신의 마음 가운데서 생각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는 더 큽니다. 
그리고 한 장을 또 들추어보니 이것은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이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하고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5장 19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성이 부패함으로 인간의 지성이 어두워졌습니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 생활도 더러워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부패하고 약하여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가끔 목사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신비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분들을 봅니다. 그래서 교인들과 가급적, 목욕을 한다든지 함께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목회자의 ‘권위’를 위해 필요한 일일지 모르지만, 저는 가능하면 다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무언가를 감춘다든지, 나 아닌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너무 솔직합니다. 아니 너무 순진합니다. 꼭 그런 말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도 기쁘고 두려움이 없어야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참 자의적입니다. 즉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입니다. 
허태균 씨가 쓴 [가끔은 제정신]이라는 책에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모든 왕은 왜 그렇게 잘 생겼나요? 하다못해 한의사도 멋지게 생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책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일 사극에서 위대한 왕이나 역사적 영웅으로 심형래, 만사마, 정준하처럼 생긴 배우들이 나온다면 그 드라마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멋진 왕들과 영웅들의 모습은 실제 그들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의 바람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전해지는 ‘어진’에 그렇게 그려져 있다고? 그럼 당신이라면 왕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는가?”

율법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나와 지키지 않는 내가 있고, 내가 드러내도 되는 나가 있고, 드러내서는 안 되는 내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편안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편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신앙, 율법적인 신앙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모든 것이 드러난다. 

율법의 이중성과 양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늘 사도 바울 자신이 믿는 복음에 의하면, 16절을 보세요.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의 얄팍한 술수들이 얼마나 많이 드러납니까?
태국 방콕의 잠롱 시장이 청렴하다고 얼마나 자랑을 했고, 우리나라의 어떤 시장도 “태국의 잠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모든 사람의 행위가 다 드러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가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때는, 인간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뀔 때입니다. 

얼마 전에 윤복희 권사님이 보내준 책을 읽었습니다. [저예요, 주님]이라는 자전적인 책이지요. 그 책을 읽고 제가 바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새벽에 저예요, 주님을 보았습니다. 권사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제가 알던 믿음 좋은 사람, 늘 찬양하는 사람 윤복희 권사가 아니라, 그의 삶에 직접 간섭하셨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연예인들이 모이는 집회에 갔을 때, 설교 중 계속 큰 소리로 “아멘!”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 권사님 같은.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인사하는데 바로 윤복희 권사님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때 그 권사님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기자가 “이번 뮤지컬에 주역을 맡으셨다고요.”
권사님의 대답은 “내 뮤지컬의 주역은 늘 주님이었습니다.”
그녀는 노래할 때마다 “저예요 주님”이라고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세대가 틀려서 그런지, 저는 윤복희 권사님이 70년대 그렇게 유명한 가수인 줄 몰랐습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하고,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누비며 잘 나가던 때가 있었고, 윤복희 귀국 공연이라는 것만으로도 연예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남편과의 이혼 때문에 술로 세월을 보내고, 후두암 판정으로 가수 생활을 접어야 할 위기 가운데서, 그리고 공연장으로 가던 차가 전복되는 고속도로에서의 사고까지. 
그런데 차가 뒤집히는 그 순간 그녀는 무섭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로소 인생에 개입하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차 사고를 당하고 젖은 몸으로 대구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공연장은 천둥소리와 함께 정전이 되었고,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누군가 무대에 촛불을 켰다고 하죠. 책 내용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그날 오프닝 곡으로 ‘깜깜한 이 거리 왜 여기 왔나, 반겨 줄 사람 없는데.’라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열여섯 살 때부터 부르던 내 레퍼토리입니다. 마침 정전으로 온통 깜깜해서 이 노래가 안성맞춤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날 그 노래가 부르기 싫었습니다. 전기가 나간 탓에 밴드도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이미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노래할 힘이 생겼습니다. 무반주로 부르는 나의 라이브 무대는 어두운 극장 안에 메아리쳤습니다. 나는 내가 부르는 노래에 스스로 감동되었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공연을 마치고 혼자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기차 차창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웠고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나는 다시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혼자 훔쳤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세상이었습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 인생의 모든 장면이 필름처럼 돌아갔습니다. 그때까지의 내 삶이 차례차례 내 마음과 영혼 속에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기뻐서 울었는데 무슨 눈물이 아직 남아 또 흐르는지."

그 후에 윤복희 권사님이 가장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 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신학적인 견해가 아니기에 논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때, 어쩌면 우리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드러나도록 하시는 때는, 마지막 심판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고 싶은 것이 어떤 “심판”이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율법을 가졌든 양심을 가졌든 모든 것이 드러나는 때 인간은 “절망이다!”라고 선포하고 싶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사람들에게 설교하며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믿는 자들에게 심판의 날을 주심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율법과 양심의 법을 가지고는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에 복음입니다.

남아프리카 미개 부족 중에 바벰바 족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광장 한복판에 데려다가 세웁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죄인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 섭니다. 그리고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모두가 듣게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 어떤 좋은 일을 앞에 있는 죄인이 하였는지 말해야 합니다. 좋은 점만 말해야 합니다. 장점, 선행 그리고 좋은 점을 말합니다. 비난, 욕, 책망하는 말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 마디씩 하고 나서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아간 것이 많으면 모두가 용서하여 줍니다.

어쩌면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추적하시며 심판으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심판의 날이 옵니다. 아니 저에게도 말입니다. 감사한 것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준비하도록 예비 심판의 날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윤복희 권사님에게는 교통사고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보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지한 아덴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서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예비 심판이 아니었겠습니까? 로마의 교인들을 향해 율법적 삶을 돌아보게 하심도 또 하나의 심판의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말씀을 나누는 것도 또 하나의 심판의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 심판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책임을 물으시는 마지막 심판의 시간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영광스런 그날을 위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찬양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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