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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명 (행 20: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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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명 (행 20:22-24)

작년 10월경에 암으로 별세한 스티브잡스는 미국의 애플컴퓨터의 공동창시자로 이 기업을 세계적인 일류기업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티브잡스가 처음 회사를 창업할 당시는 한동안 회사가 제자리걸음하고 있었고 어려웠습니다. 문제는 제품은 좋은데 효율적인 마케팅전략이 부족하였습니다. 

스티브잡스는 회사를 살리기 위하여 마케팅을 담당할 사람을 영입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마케팅의 귀재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펩시콜라의 사장을 지낸 존 스컬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존 스컬리는 38살에 펩시콜라회사의 사장이 된 사람으로 당시 세계제일의 코카콜라를 끌어내리고 펩시콜라를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애플컴퓨터에서는 이런 마케팅의 귀재를 영입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존 스컬리를 공동경영자로 영입하려고 백방으로 힘을 썼지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한 명예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와서 모험할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티브잡스는 충분한 보상과 지위를 약속해도 움직이지도 않는 존 스컬리에게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설탕물이나 팔면서 당신의 생애를 허비하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지겠습니까?” 이 말에 존 스컬리는 마음을 바꾸어 애플사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존 스컬리의 마음을 움직인 스티브잡스의 이 말은 아마 영원한 명언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시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대로 그냥 의미 없이 이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보다 더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 이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생활습관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지만 의미와 가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신의 삶을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바꾼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지파 중, 베냐민의 지파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그가 빌 3:7-8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던 학문도,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수호했던 과거의 경력도, 당시 세계를 호령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시민권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만약 바울이 추구했던 것이 이러한 것들이었다면, 그는 과거에 자기가 누리고 있던 특권이나 높은 지위, 그리고 안정된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움직였던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움직이고 변화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그에게는 인생의 중요한 목적이 생겼습니다.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행 9:15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 목적이 생기고 나서 사도 바울의 삶의 방향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땀과 정성과 사랑을 쏟았던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정리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베소 장로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사랑하는 에베소의 성도들을 살아서는 만날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개종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시처럼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밥도 먹지 않겠다고 결의한 무리들이 바울이 오면 잡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호랑이 굴로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에베소 성도들이 눈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감옥에 갇히고 죽게 됨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단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죽음을 각오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롬 1:1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생명까지 내 놓았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미 복음을 위해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입니다. 갈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이 생명보다 더 귀합니까? 권력이 생명보다 더 귀합니까? 세상의 명예나 높은 지위라 할지라도 생명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돈도 권력도 명예나 높은 지위도 아닌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이 사명을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길이 되어도, 거기에서 잡혀 죽음에 처해질 수 있어도 그 길을 가려고 합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환난과 핍박과 죽음도 복음을 전하려는 자신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살려고 하니까 두렵고, 떨리고, 불안하고, 초조하지 죽음을 각오하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천사가 지어준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천사가 아버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아기를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요 10:1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가지고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20:21절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명령하셨습니다. 마 28:18-20절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은 한마디로 제자들에게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생명을 바쳐서라도 감당하라고 명령하시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물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은 부모의 사명 중에 하나입니다. 또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도 가장의 사명입니다. 사회에서, 국가적인 입장에서 해야 될 이런 저런 사명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본질적인 사명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본질적인 사명을 위해 주시는 수단적인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 모든 성도에게는 다 사도 바울과 같은 동일한 사명,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 2: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전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낸 하나님의 목적이요,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구원, 생명을 살리는 전도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깨닫는 사람도 있고, 뒤늦게 깨닫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깨닫는 것이 문제인데 모든 성도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임을 오늘 이 시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물으실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너 복음 전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 복음 전하라고 했는데 그 사명 감당했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 명령하신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2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서 3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수꾼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전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돌아오면 살 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으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심판을 경고하는 말을 전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에스겔은 책임이 없고, 그 말을 전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죽게 된다면 전하지 않은 네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파수꾼으로서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경고했습니다. 내가 전해야 할 책임, 내가 경고하는 책임, 복음을 전하는 이 책임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그들이 지옥 간다고 하면 내가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또 듣고도 깨닫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롬 10:13-15절 말씀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전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했는데도 내 가족 중에서, 내 이웃과 내 친구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내가 전하지 않아서 지옥 간다면 이 모든 사람의 피 값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내 할 일 다 했다, 사명 감당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전도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 각자의 사명이 다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사명은 그리스도인 모두의 공통 사명입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사명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사명은 곧 생명입니다. 사명 없이 사는 것은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필요할 때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시계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시게가 제대로 맞지 않거나 바늘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말합니까? “이 시계가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올 해 우리 교회는 200명 전도목표를 세우고 영혼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명을 위해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혹시 전도의 사명을 잊어버렸거나, 무관심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사명을 다시 회복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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