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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건강한 신앙 (엡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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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신앙 (엡 3:14-19)  

공자에게 ‘안회’라고 하는 아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아꼈느냐하면 그 제자가 32살로 세상을 떠날 때에 공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땅을 치며 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먼 길을 여행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양식을 구하지 못해 근 일주일이나 굶을 즈음에 ‘안회’는 사방에 다니면서 식량을 구해와 밥을 지었습니다. 얼마나 굶었던지 그 냄새가 너무도 좋아서 공자는 안회가 밥을 짓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회가 솥뚜껑을 열더니 밥을 집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공자는 속으로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내가 인의예지를 그토록 가르쳤는데 제가 먼저 먹어?’ 라며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래서 은근슬쩍 그런 내색을 비추었더니 이를 눈치 챈 안회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솥뚜껑을 열고 보니까 얻어온 쌀이라서 그런지 수수가 몇 알 섞여 있기에 이 밥을 스승님께 드릴 수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제가 그것을 골라 먹었습니다.’ 하더랍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 때에 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때때로 믿어서는 안 될 때가 있다. 또 마음을 의지하고 살지만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믿어서는 결코 안 될 때가 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다툽니다. 내 의견은 무엇이 그렇게 옳고 남의 의견은 틀렸다는 것인지 노상 투덜댑니다. 내 눈도, 마음도 믿을 것이 못될 때가 있습니다. 내 판단, 내 지식도 더더욱 믿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항상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한계와 약함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잠언서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이 아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함께 기도해 달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뒤로 하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신 예수님게서 제자들의 잠든 모습을 보시고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마음은 있는데 의지가 약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우리가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로 마음이 원하면 어떻게 잠이 오겠습니까? 정말로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내일 아침 십자가에 돌아가신다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돈 몇 푼만 잃어버려도 잠이 안 오고, 어쩌다 기분 나쁜 전화 한 통만 받아도 잠이 안 와서 걱정인데 주님이 내일 돌아가신다는데 잠이 올 시간입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잤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이성과 마음은 별도입니다. 지식과 감성이 다릅니다.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 또 의지와 마음이 따로 갑니다. 이 따로따로 노는 괴리를 인정하고 바로 터득해야 합니다. 이게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접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향하셨습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하나님에 뜻에 따라 하나로 집중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 다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신앙과 삶의 큰 괴리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른 신앙생활은 내 생각과 느낌, 의지를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가운데서 이뤄집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로마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속사람, 즉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두 번째 기도가 17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이상한 것은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도의 '속 사람' 안에 좌정하시고 편히 계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속 사람을 마치 편안한 집처럼 여기시고 오랫동안 기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머물러 있다'라는 헬라어 'Kataoikos'는 ‘머문다’라는  Kata라는 단어와 ‘집’이라는 oikos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 속 사람의 집에 편히 거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우리 마음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제시하는 교재 가운데 4영리라는 교재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나오는 그림을 잠시 보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영향력을 전혀 받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그림을 내 삶의 영역 속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입니다. 이 그림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만 내 삶의 주인은 아직도 나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 의지를 가지고 모든 것은 결정합니다. 결정의 주체는 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런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약간의 영향력을 끼치고 도움을 줄 뿐입니다. 내 삶을 집으로 본다면 집의 손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그림은 내 삶의 중심에서 내가 내려오고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에 앉혀 드린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데로 예수님께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을 내가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에 앉혀 드리려면 그 분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을 때 주인의 자리를 내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으면 주인의 자리를 내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려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곳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속사람 즉 마음에 주인으로 머물러 계시려면 우리가 그 분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모시는 열린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면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곳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집에 손님으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계실 수 있도록 믿음의 문을 활짝 여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삶의 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기도 제목은 사랑 가운데 뿌리를 깊이 내리고 터가 굳어지게 하옵소서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를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양 팔을 크게 벌리며 ‘이 만큼!’이라고 대답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준 다음에 ‘엄마, 아빠를 얼마나 좋아해?’라고 물으면 허리를 뒤로 제치면서 ‘이만 -큼’ 혹은 ‘하늘만큼, 땅 만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상대를 향해 마음을 엽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는 립 서비스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으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저들이 하나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으로 저들도 충만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격주로 월요일마다 부부 사랑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부부 가운데 저희보다 젊은 부부가 있는데 아내 되는 분이 남편에 대해 힘든 부분을 말하면서 ‘저의 남편은 잘해줄 때는 정말 잘 해줍니다. 그러다가 한 번 자기가 싫으면 정이 뚝 떨어지도록 괴팍하고 쌀쌀 맞습니다. 한 번 집을 나가서 7일간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런 사랑을 ‘기브 앤 테이크 사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든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사랑을 베푼 만큼 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향해 주었는데 반응이 없으면 실망합니다. 도리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더 서운해 합니다. 우리 사랑의 대부분은 댓가성의 사랑입니다. 주었으니 받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부부, 부모와 자녀,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모두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넓이는 한 평도 안 됩니다. 

사랑의 길이는 한 자도 안 됩니다. 하루도 못가는 사랑이 많습니다. 사랑의 높이와 깊이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선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 제한적인 사람의 사랑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바울을 ‘하나님,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저들이 깨달아 그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배워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수족관 안에  아무리 좋은 산호를 넣고, 좋은 장식품을 설치하고 조명을 아름답게 꾸며도 그 안에 물을 넣지 않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가정의 관계도, 이웃의 관계도, 교회 안에서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귀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수족관에 있는 물과 같습니다. 세상은 물보다 그 안에 넣는 장식품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음의 사람은 장식품이 아닌 물고기가 맘껏 살 수 있는 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도 집에 있는 개하고는 이야기를 잘합니다. 의외로 그런 가정이 많습니다. 부부간의 대화가 개하고 대화하는 것만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 이유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적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신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그 사랑을 가지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삶의 영역들을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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