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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과 금보다 더 소중한 재산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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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과 금보다 더 소중한 재산 (행 3:1-10)


얼마 전에 제주도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는 선배 목사님이 제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리셨습니다.  "주철 목사님! 생일축합니다.  벌써 50 밑자리 깔았네.  하하하."

논어의 위정편에 보면, 인생 나이 오십을 가리켜서 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나이 오십이면 드디어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저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더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더 간절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와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집에 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흑암도 이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모든 고난과 역경에서 일어설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했든지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지금 우리가 간절히 붙잡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태산같은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아침의 안개처럼 있다가 없어질 세상적인 일에는 첫째가 되는 일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일에 으뜸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머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갈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 받기를 정직하게 열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스스로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의 인도는 절대적입니다.

인생 50 밑자리를 까는 동안 제가 깨달은 것은 한 민족의 불행도, 한 집안의 불행도, 한 개인의 불행도 결국 하나님의 남다른 인도를 받는 일에서 실패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탐내고 열망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결혼에 있어서 한 번의 잘못된 결정이 엄청난 인생의 비극을 낳는 것처럼 인생의 갈림길에서 잘못 인도된 결과만큼 크고 아픈 고통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종교인들을 양산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종교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 연약한 생명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끝없는 고백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허물 많고 연약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인도를 사모하고 열망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만을 정직하게 받겠다고 열망하는 사람은 오늘도 그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인도를 정직하게 받았던 개인과 나라는 반드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의 통로가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정직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모든 생활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성도의 모든 축복은 기도의 유산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립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크게 믿으십시오.  항상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하나님과 사람들이 감동되도록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남은 때를 제대로 한 번 믿어보십시오.  주를 위해서 제대로 한 번 미쳐보십시오.  지금은 미쳐야 삽니다.  제대로 믿어야 삽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생활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공중 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는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걸리면 안 됩니다.  여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사탄의 악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주님의 크신 능력 안에서 강한 군사가 되십시오.  그래서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에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유럽 재정위기는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제적 충격을 미칠 것이다"면서 현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고했습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온 나라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인이 함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경제적인 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위기, 영적인 위기입니다.  세계 어디를 돌아보더라도 건강한 인격, 건강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 같지가 않습니다.  혹자는 이 시대를 일컬어서 '막장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은 고난을 잘 헤쳐왔고 지금도 고난을 잘 헤쳐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선한 방향으로 잘 해결해 갈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삼천리 방방 곳곳에서 기도하는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혼자서 몸부림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고 기도하십시오.

고통의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우리는 언제나 더 큰 복을 받아왔습니다.  고통의 시대, 고난의 시대에는 인생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영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적인 위기, 북한의 핵문제, 각 가정마다 당하는 시련,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시는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문제가 있어 왔고, 지금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문제는 항상 있을 것입니다.  사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묘지에는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가 어려울 때마다 포기하고 절망했더라면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다가 조금 어렵다고 죽어 버리자?  그랬다면 이 세상에 살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또 하나님의 교회는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오늘 그 해답을 우리는 본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2장 43절에서 성령강림사건으로 사도들이 능력을 받고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와 표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 3장에 와서 드디어 사도행전 첫 번째 이적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의 병이 고침 받은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성전 미문에서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 개 남짓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문들 가운데 은과 금으로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화려한 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문"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미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누런 황금이 줄줄이 매달려 있고, 아주 아름다운 황홀한 은으로 잘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했을 때에 아마도 그는 거기에 있는 은과 금을 보면서 말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있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그 은과 금을 바라보면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 문은 동쪽으로 들어와 이방인의 뜰을 지나 여인들의 뜰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 제사를 경험했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여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과연 이 문은 아름다운, 미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운 문' 앞에 별로 아름답지 못한 풍경 하나가 있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거지 한 사람이 거기에 멍석을 깔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소위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그의 나이가 사십여세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생 마흔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 동안 걷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은 앞으로 나을 희망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을 것이라는 기대조차 포기한지 벌써 오래 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그는 거지였습니다.  동냥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메고 그곳까지 데려다 주어야 몇 푼돈이라도 동냥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걸인을 보십시오.  성전 문에 자리를 깔고 앉았지만 성전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성전 안에서 어떤 제사가 이루어지는지, 어떤 멋있는 일들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경험과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바가 아닙니다.  성전 안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평생에 소원이 예루살렘 성전을 한 번 방문하는 것입니다.  돈을 모으고 또 모아서 성전을 방문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걸인은 늘 성전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배자들이 던져주는 돈 몇 푼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걷지 못하는 이 걸인은 대단히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우리들 중에 몸은 여기에 앉아 있는데 마음과 생각, 열정과 관심은 엉뚱한데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바로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입니다.  예배 한 번에 평생의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생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목표와 꿈이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온갖 상처와 문제를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체념한 체 몸만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중심의 자리에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십시오.  들어와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음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성령님께서 만지시는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과 뜻이 성전 밖에 있는 사람은 결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다가 몸이 병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 병들면 안됩니다.  몸은 앉은뱅이로 일어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건강하게 뛰고 하늘을 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가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경제적으로 좀 어려워졌다고 영혼까지 위축되어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업 한 두 번 실패했다고 신앙의 실패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몸이 불편해도 마음은 건강해야 합니다.  세상 일에는 실패했지만 신앙에는 성공해야 합니다.  돈은 잃었지만 하나님은 새롭게 만나고 신앙을 되찾아야 합니다.  환경은 불편해도 영혼에 무한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명색이 그래도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믿음의 사람다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정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걷지 못하는 걸인을 어떻게 도와주었습니까?

지금 세상은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교회는 세상적인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의 세상을 향한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비판 중에는 생리적으로 교회를 미워해서 던지는 비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이 왜 이처럼 교회를 미워하고 비판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언제나 교회를 미워하고 비판적이면서도 교회를 향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나에게 큰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가 나의 여러 가지 한계와 제한 때문에 도움을 주지 못할 때 그들이 우리에게 실망을 하게 되고 또 우리를 향하여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왜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모순된 감정으로 비판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 세상 어디에도 기대를 할만한 곳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늘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되고, 세상 모두가 썩어도 교회는 희망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사회가 교회를 비판하니까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될 유일한 책임이 사회봉사인 것처럼 말하고 또 그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물질로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사회봉사가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최우선순위도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복음 전파를 통한 영혼 구원입니다.

한때 자유주의 신학이 온 나라를 뒤덮고 세계 신학을 주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신학은 복음 전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고 교회 성장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봉사에만 깊은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교회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랬더니 회심자가 없어졌습니다.  구원받은 새신자가 없어졌습니다.  교회 성장은 중단되어졌습니다.  결국은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도 사회적인 섬김이나 봉사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도 구제와 섬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초대교회는 성도가 150여명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00명이 넘는 이웃의 가난한 자를 구제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초대교회에서의 사회 구제와 섬김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의 모든 가치 기준은 은과 금입니다.  세상에서의 문제해결 능력은 오직 물질 경제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할 이야기도 은과 금, 경제문제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은과 금을 이야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 본질은 언제나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세상은 진정으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세상이 가지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바와 하나님이 원하는 바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로부터 얻고 싶은 것과 정작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줄 수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사회를 향해 구제를 잘 하려고 늘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구호단체는 아닙니다.  교회는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고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의료기관은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 정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NGO는 아닙니다.  교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 본질도, 교회 능력도, 교회 위상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 목록 제 1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의 유일하고도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으로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붙들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가치가 우리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목적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보배로운 재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이요 재산입니다.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초대교회 최고의 재산은 예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소중한 재산도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은과 금보다 소중합니다.  치료보다 귀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입니다.  진실로 세상이 얻고 싶은 것은 단순한 구제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망 없는 세상 가운데서 소망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 세상 사람들의 진정한 요구입니다.

은과 금을 구하는 걸인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말은 신구약 성경에 두 번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3장 6절과 4장 10절에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유명한 말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불려졌던 이름 가운데 하나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택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가정을 세우고, 내 자녀를 구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길 밖에는 이 나라를 구할 길이 없습니다.  온 백성이, 온 교회가 하늘의 거룩한 것에 취하는 길 밖에는 나라를 구하는 길이 없습니다.  옥수수 밭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온 백성이 거룩한 하늘의 능력에 취해서 흔들거려야 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은 영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소주가 세계 판매 1위인 나라, 경찰이 술 취한 대학생의 오줌을 치워야 하는 나라, 음주 문화가 밤의 문화를 지배하는 나라, 그 속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방황을 끝내고 꿈과 비전을 향해 일어서게 하는 방법은 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모든 인생의 방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모든 생명의 기쁨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은과 금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가 은과 금이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인류가 복을 받고, 가정이 복을 받고, 개인이 복을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힘과 능력입니다.

몇 해 전에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길레스피 총장이 졸업생들에게 보낸 송사의 내용 중에 일부가 인터넷에 게재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는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설교를 하고 몇 몇 교회에서 설교를 한 후 서울 남대문 시장을 찾아본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레스피 총장 내외분은 남대문 시장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수많은 상품에 감탄을 합니다.  상점마다 물품들이 산적해 있었고 길 한 가운데 노점상도 상품으로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었습니다.  온 시장이 상품 더미에 파묻혀 있는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분주한 길바닥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시장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것입니다.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앉은 몸 밑은 고무판으로 쌓여져 있었고, 두 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몸을 움직이는데 수건 몇 장, 목욕 타올 몇 장을 팔고 다녔습니다.

갑자기 어디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옵니다.  두리번거리고 살펴보니 남대문 시장을 기어다니는 사람의 고무판 위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고무줄로 둘둘 묶은 카셋트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복음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길레스피 총장은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서 동행하던 이상은 박사에게 사연을 물어보게 했습니다.  앉은뱅이와 잠시 대화를 한 이 박사는 앉은뱅이가 시장에 나온 목적은 물건을 파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장사꾼이 아니라 남대문시장에 전도단이라는 것을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당당하게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수건 몇 장을 팔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목욕 타올을 팔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길레스피 총장이 미국에 돌아가서 졸업생들에게 훈화할 때에 그가 썼던 모든 훈화를 찢어버리고 대한민국 남대문 시장에서 만났던 앉은뱅이 이야기로 모든 훈화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나가서 목회를 할 때에 내가 가르친 신학으로 목회를 하지 말고 내가 만났던 남대문 시장에 고무판 위에서 두 팔로 시장 바닥을 누비고 다니는 앉은뱅이의 열정과 그의 복음의 능력과 그가 증거하고 있는 예수 이름의 권세로 목회 하라고 교훈을 했습니다.  은과 금이 없어도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두 다리가 없어도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 가운데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는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을 손에 붙들고 담대히 이 교정을 나가십시오.  그가 그렇게 졸업생들에게 훈화를 했다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심령 속에 열정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살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에게서 비전이 새롭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가정이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건강은 일어날지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와서 한국 복음화를 외쳤던 그 복음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들이 되살아나고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세상에서 은과 금보다 더 소중한 가장 위대한 재산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모든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을 세울 수 있고,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손에 들고 이 문을 나설 때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모든 어둠의 영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들이 세상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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