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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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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마 7:13-14)
    
사람이 한 세상을 살다보면 ‘선택’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선택하다’라는 동사는 택(擇)하다, 가리다, 고르다, 뽑다, 골라잡다, 골라 가지다는 뜻입니다. 선택이란 말은 여러 개의 가능성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자유롭게 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택이란 행위는 하나의 의지 결단이요, 선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해야만 합니다. 선택은 나의 마음이요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역시 그의 것이 됩니다. 여러 개의 가능성이 있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논리적으로 보면 그 선택된 것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다 탁월한 선택의 주인공들입니다. 그중에 모세는 명예와 쾌락과 부를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애굽의 황제 바로, 그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 명예와 쾌락과 부를 가질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통 받는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고 고난과 능욕을 선택하였습니다. 

히11:24-26을 보면 모세의 선택을 보는데, 이런 선택에는 자기 의지요, 결단인데, 믿음이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선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아주 많은 사례를 들어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꼭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서 누구와 함께 살고, 어디에서 살고, 모든 것이 다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외쳤습니다. 열왕기상 18:21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알, 풍요를 가져다주고, 화려하고 멋진 삶을 약속하는 바알신을 택하든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모세도 자기의 백성들을 향하여 신30:19-20에서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수24:15에서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선택의 문제는 우리의 일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설가요,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 박사는 ‘소명’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어느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자기의 몫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 존재 목적을 성취하고 싶어 합니다. 그냥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살고 싶어 합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하여 여기에 있습니까? 나는 그냥 생존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시면, 살아가는 목적을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보셔야 살아가는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저널(Journal)에서 존재 목적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그 목적,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해당하는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 사상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살고 죽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 현대인의 고민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고 있지만, 삶의 목적은 너무나 빈약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혹시 이것이 나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였는데, 나를 구원해주신 나의 주님 예수님 앞에 내놓고 보니, 너무나 저급한 목적이지는 않습니까? 현대인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데 비하여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오스 기니스박사의 소명에 대한 정의를 적어보았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 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오스 기니스박사는 목사가 아닙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평신도인데, 현대 기독교문명과 철학의 흐름에 대하여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고위 관리이며, 주 서독대사였던 아더 번즈(Artur Burns)라는 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에서 도널드 레이건에 이르는 수많은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으로 활약한 사람입니다. 1970년 백악관의 한 비공식적인 기도 모임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이었기에 어느 인도자도 그에게는 대표기도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도모임에 오래 참석하지 않은 새로운 사람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마무리할 때에 아더 번즈에게 기도하기를 부탁했습니다. 유대인이요,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경제학자요, 그래서 감히 그에게 기도하라는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둘러선 모든 사람들로 서로의 손을 붙잡게 하고는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하였다고 합니다. 

아더 번즈의 기도는 워싱턴에서 전설적인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중요한 일침을 가하였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이론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아도 경험적으로 자기 인생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을 주도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나의 인생을 알차게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에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선하게 살면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진리를 따라 의롭게 살면 우리 사회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게 살아가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선하게 사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의롭게 사시기를 소원하고, 의로운 발걸음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짧은 권면, 그리고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중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하시던 중에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온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시다가 잘 모르거나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성경의 마스터키인 십자가를 가지고 플어 보시면 좋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이해하여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는 --- 이다” 헬라어로“에고 에이미 I am that I am"이라는 용법으로 요한복음에서 7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6:35에서 “생명의 떡”, 8:12에서 “세상의 빛”, 10:7에서 “양의 문”, 11:11에서 “선한 목자” 11:25에서 “부활이요 생명” 14:6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15:1에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 중에 세 번째로 요10:7에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이라”는 말씀 중에 세 번째로 하신 말씀이 “나는 양의 문이다”고 하셨습니다. 

문이라는 말은 이 문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가고, 이 문으로 들어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집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우리 주님이 친히 문이 되어주셔서 우리는 그 문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가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그 문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사람들은 문이라는 것을 통하여 집의 세계와 거리의 세계로 나가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말씀하시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여러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길에는 선택의 문제가 일어납니다. 매일 매순간 그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의 끝에는 숙명적인 결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잘못된 길을 선택하였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종점에 이르게 됩니다. 탁월한 선택에는 탁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들어가서는 안 될 길을 가다보면 그 길에는 잘못된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이런 흑백논리가 어디에 있느냐? 중간상태도 있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닌 그런 상황이나 그런 단계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지성적인 윤리관입니다. 오늘의 많은 지성인들이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아닌 상대적인 선과 상대적인 악을 말하려고 합니다. 신앙을 지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 생각은 성경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만을 말합니다. 오직 두 문과 두 길이 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구원받은 자이냐, 멸망 받을 자이냐 이렇게 두 가지만 말합니다. 여기에 중간상태는 없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믿고 따르든지, 아니면 세상 중심으로 살든지 할 것입니다. 중간상태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지 애매모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여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데, 그것은 무엇이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부족한 것을 사실이나 악한 길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부족하지만, 그러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안에 거하시고, 성령님을 부르시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해결방안입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몇 가지 생각을 모아보았습니다. 

첫째로 본문은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현재지향적인 삶이 있고, 미래지향적인 삶이 있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 협착합니다. 현재는 정말 살아가기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길 마지막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풍성한 생명은 이르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현재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외롭지만, 좁은 문 좁은 길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현재지향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우선 편하고 쉬워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넓은 문, 넓은 길 그 길은 확실히 넓습니다. 누구나 쉽게 들어가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넓은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는 소원이,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지금 코앞에 있는 것, 현재만 보지 말고, 멀리 미래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 30대 40대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60대 70대에 이르게 될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60대, 70대에 계신 분들은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의 모습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오늘은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지향적인 사람, 앞날을 위하여 수고하고 힘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몇 가지 생각을 모아보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가치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무가치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상에 가치 있고 위대한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고통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해야 하고, 자기를 다스리고 훈련해야 합니다.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자네가 가려는 길은 좁은 길이라네, 자게 의사가 되려면 여러 가지 즐거움을 포기하여야 하고, 여러 해 공부에 전념해야 하고, 의사가 되어도 사실상 노예와 같이 매어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 때 현명하고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그 좁은 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하는 어떤 여학생에게 음악선생님이 말합니다. “그건 좁은 길이란다. 너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많은 시간을 연습에 몰두해야 하고, 힘든 길이란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면 그는 현명하고 의지가 있어 말합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그 좁은 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가 조언합니다. “당신은 정말 좁은 문에 들어가려고 합니까? 그 문에 이어진 길도 좁은 길입니다. 그 길에는 죄를 동경하는 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악을 포기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가야 하는 길입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인생을 바르게 살고 현명한 사람, 의지와 결단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는 그 좁은 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시고 있습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세 번째로는 자기를 부정하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주는 교훈은 자기 부정,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죄를 회개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16:24-26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는데, 어떻게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합니까?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사치입니다. 정말 죽어야 갈 수 있고, 죽어야 질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거추장스러운 것 짊어지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겨우 자기 몸 하나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소유, 많은 직함, 많은 명예 이런 것은 다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생명만 생각해야 하고 구원받은 감격만 가져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도 되고, 명예도 얻고, 권력의 중심에 서고 그는 천국을 포기하게 됩니다. 눅9:58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은 보이는데, 저 문으로 들어가면 나의 영혼은 평안할 터인데,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업적과 명예와 수백 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물질을 버리고 들어갈 수는 없고, 그것을 가지고 들어갈 방안을 찾느라고 좁은 문 앞에 서성거리고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넓은 문, 넓은 길을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갈5:19-20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가던 넓은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수많은 군중이 밀려가는 그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 길에서 일어나는 매력적인 일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내 일생에 좁은 문을 발견하였다고 확신하시면서 주님에게 붙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인생을 사셨습니까? 그 길은 넓은 길이 아니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좁은 길에서는 헌신, 결단, 절제, 자기 부인과 훈련이 없이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두 문이 있습니다. 모두 다 열려 있는 문이지 닫혀 있는 문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들어가고 못 들어가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어가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그 길의 끝에는 전혀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멀리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문이 되시고, 예수님이 길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길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고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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