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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마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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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마 4:5-7)

사람들의 환호가 때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곳에 올라가면 불안해집니다. 추락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런 두려움이 심한 공포에 이르는 것을 고소공포증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높은 곳은 겁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땅을 디디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의 스릴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 번지점프를 해보셨습니까? 50미터도 더 되는 높은 곳에서 몸을 줄에 묶은 채로 뛰어내립니다. 떨리고 두렵지만, 뛰어내리는 순간의 짜릿함을 느끼려고 사람들은 번지점프대 위에 섭니다. 이것을 한 번 해본 사람들은 그렇게도 자랑을 합니다. 내가 두려움을 이겨냈다고, 마치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뽐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그냥 뛰어내리라고 한다면, 뛰어내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을 하다가 어떤 해외 토픽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발 6543m 봉우리에서 90초 만에 하산” 제목은 추락이 아니라 분명 ‘하산’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베이스점프 전문가인 발레리 로조프(47세)가 한라산의 3배 이상 되는 높이의 인도 히말라야 산맥의 쉬블링이라는 봉우리에서 뛰어내리는 동영상을 담고 있는 기사였습니다. 그가 셰르파(Sherpa)라고 하는 히말라야 산악 등반 안내인들과 쉬블링 봉우리를 오르는데 걸린 시간은 꼬박 6일이었습니다. 6일이 걸려 올라간 정상에서 스카이다이빙용 윙수트를 입고,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는 시속 200km의 속도로 하강하여 90초 만에 하산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이 내려오는 데는 3일이 걸렸습니다. 아마 이 사람에게 아내가 있다면, “여보, 제발 그런 일 좀 하지 말라”고 말렸을 것입니다.

해발 6543m 높이의 산에서 뛰어내리기. 인간적으로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 일입니까? 어쩌면 남자분들 중에는 ‘나도 조금만 더 젊었으면 해볼 마음이 있는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험한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해보고 싶다는 유혹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높은 곳이 무섭긴 하지만, 한 번 뛰어내려오면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멋지다고 말하는 소리가 벌써부터 귀에 쟁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유혹의 도구로 쓰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 유혹을 받으십니다.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뛰어내려라. 너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느냐? 하나님의 아들답게 능력 좀 발휘해라.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보고 메시아인줄 알지 않겠느냐?” 능력을 통해 사람들이 믿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6)

재미있는 것은 마귀의 유혹 방법입니다. 돌덩어리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했던 첫 번째 유혹에서 예수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신 것을 마귀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도 전략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좋다. 그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인용해 보지!’ 

마귀는 시편 91편 11절~12절 말씀을 들어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네가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쳐주도록 하나님께서 하실 거다. 네 발이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거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느냐. 너 분명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그대로 뛰어내려봐.” 

하지만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 말씀을 거절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분명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나, 여기서는 사탄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백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왜 인용하는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고, 사탄의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에 이단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성경말씀을 문맥과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전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표적이 믿음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 왜 유혹이 되는 것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뛰어내리셨다면 멋지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으로 떨어지는 예수님을 받쳐주면 사람들이 환호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릴 때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을 겁니다. “나 예수 믿는다. 내가 63빌딩에서 뛰어내릴 테니까 살아나면 다 예수를 믿어라” 말하고 뛰어내리는 상상 말입니다. ‘표적을 구하고, 기적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왜 그러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가끔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그 마음을 이용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라. 빠른 시간 내에 보여줘라. 강력한 힘과 권세를 가진 인물로 등장해라. 세상 사람들이 다 인정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적과 표적을 보여줘라.” 

마치 3일의 시간이 걸려야 내려올 수 있는 길을 90초 만에 내려오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신속하게 하라는, 지름길로 가라는 유혹입니다. 또한 하늘의 능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남이 하지 못하는 강력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영웅적인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는 것, 슈퍼맨이 되는 것. 그렇게 예수님께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비난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에게 비슷한 요청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절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숨어있지 말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인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구체적인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기 위해서 표적을 구한다고 말했지만, 속마음으로는 ‘믿지 않겠다’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표적을 보이면 또다른 표적을 구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탄식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받으면 쉽게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의심을 하게 되고,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표적은 결코 믿음의 초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대적하기 위해서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한 기적과 표적은 예수님을 불신하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 이상 대화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내려가셔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표적이 있기 전까지는 너희들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 때마다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길은 시간이 걸립니다.

마귀는 강력한 능력과 동시에 빨리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강하고 빠르게.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도 이런 일을 행했던 아주 지독하고 무서운 사상이 있었습니다. 필요하면 폭력을 써서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운동입니다. 1848년 마르크스(K. Marx)와 앵겔스(F. Engels)가 공산당 선언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 후 100년도 되기 전에 공산주의는 지구 전체 1/3을 빨갛게 물들입니다. 아주 강력한 역사 변혁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2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지구 전체의 1/3을 빨갛게 물들였습니다. 속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빨갛습니다. 하나는 피의 혁명이고, 하나는 예수님의 보혈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남을 무너뜨리는 피의 숙청을 감행했습니다. 이 혁명은 잔인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미움과 분노, 그리고 투쟁이었습니다. 그것을 전면에 구호로 내걸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절제하신 예수님이 자기의 피를 흘리는 종교였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분노와 공격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독교는 속도를 중요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은 초청하는 것이고, 이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어느 기독교 공동체라도 강제성이나 협박이 있다면 그것은 가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대표하는 공산주의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돈과 빵, 물질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이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성을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은 물질의 힘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힘, 정신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만드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에 참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공산주의는 윤리적인 상대주의를 표방합니다. 절대적으로 정립된 도덕이나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세워놓은 목표, 즉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혁명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짓말이 횡행하고, 폭력이 함부로 사용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그들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가장 무서운 계급사회를 만들어 냈습니다.

셋째, 인간이 지닌 개인의 존엄성을 너무 쉽게 파괴시킵니다. 정치적으로 전체주의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서의 개인은 집단에 철저히 종속됩니다. 개인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평등권이 사라집니다. 개인이 누려야할 모든 것들이 ‘국가를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제거됩니다. 공산주의에서 국가란 결국엔 권력을 쥔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레닌(Vladimir Il'Ich Lenin)과 스탈린(Joseph Stalin), 그리고 후에 파시스트가 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와 김일성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 내려오심으로 구원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상의 문제가 어떤 신적인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는 기적으로 인함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문제 많고 신음하는 삶의 자리에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상처 난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을 친히 만지셨습니다. 우리의 슬픔과 고통에 참여하시면서 당신도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서도 그랬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복음 27:40-42)

“너 하나님의 아들이지? 너 능력 많지? 사람도 구원한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한 번 내려와봐라. 왜 거기에 달려 있느냐? 내려오면 내가 믿겠다” 그들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이야기와 똑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믿음을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이 주신 죽음의 잔을 마시고 계셨습니다. 이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 죄인 된 인간들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길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묵묵히 그것을 받아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보이라는 마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7)

마귀의 요청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왔던 삶을 다시 되돌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과속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빨리, 빨리! 이건 속도전이야!’ 외치며 달려오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마치 로또복권에라도 당첨되어서 인생을 한 방에 바꿔보려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 내가 서 있는가?’ 라고 물으며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확인이 된다면, 조금 늦어도 괜찮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디디시면 됩니다. 그런데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가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능력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기적을 만들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기적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워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생각하지 않고,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를 외치며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잠시 멈춰 서서 “주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싶습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이제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한 걸음 한 걸음 가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인도해 주세요” 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축복을 경험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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