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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빌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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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빌 3:17-21)


근래에 리더십에 대한 글들이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모든 이론을 폐하고 리더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힘’일 것입니다. 
과거 농경시절의 영향력은 신체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그 힘은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영향력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감동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지닌 인격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오늘날은 누가 힘이 있다 하더라도 감동받지 않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 하여 특별히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각과 말, 행동이 조화를 이룬 신실한 인격이 구비될 때 주변에선 말없이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은 자주 이런 요구를 합니다.
바울서신에서 몇 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전 4: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전1: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참 놀라운 요구입니다.
오늘 성직자들 중 과연 몇이나 자기 양떼들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믿음, 나의 경건한 삶, 나의 헌신된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교단에서 40년간 봉직한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은퇴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장선생님이 마지막 인사말을 하면서 “내가 40년 동안 선생으로 가르쳤으나 단 한 번도 학생들에게 나를 닮으라고 말해보지 못한 채 교단을 떠납니다.”하고 눈물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참 훌륭한 교육자였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가르칠 때 “내 말을 들으시오. 이 진리를 배우시오. 이 교훈을 따르시오.”라고 말 할 수 있으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이야기할 부모는 많아도 나를 닮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새신자를 영접하면서 이런 덕담을 건넸습니다.
“자매님, 이 집사님만큼만 잘 믿으세요?”
전도한 집사님을 칭찬하는 말이지요?
특별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새신자는 자기를 인도한 사람만큼 믿게 됩니다.
인도자가 주일 예배만 드리고 수요예배를 안 드리면 그도 따라합니다.
인도자가 여전히 술 담배를 하면 그도 술 담배를 하면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매님, 이 집사님만큼만 잘 믿으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집사님이라면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1.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바울이 자신의 양떼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특징이 20-21절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집니다.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시민권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줄잡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노예였고, 나머지 가운데 절반은 자유인이었고 절반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로마 시민권은 로마 군인으로서 21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주어졌거나, 세금을 많이 내 로마제국에 충성한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돈으로 로마시민권을 샀다는 것입니다. 
로마시민권이 어떤 특권이 있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로마 당시 가장 혹독한 처형은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이 베드로처럼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것은 로마시민은 어떤 죄를 져도 가장 혹독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죄인일지라도 대우를 받았습니다.

로마시민권만 해도 그처럼 대단한데, 바울은 지금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가 그 당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특징들을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그의 뜻을 첫 번째 관심사로 삼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을 끝장내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사모합니다.
이것들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을 뵙고 직접 간구하며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할 권세’라고 말합니다.
히10: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경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을 때에도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빌4: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날이 오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죄와 죄가 끼친 영향, 죄가 낳은 결과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영광중에 거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신분이자 권리입니다.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이들이 신학교를 마치고 간단한 짐만을 챙긴 채 남미의 에콰도르라는 나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이곳에 엘리엇과 5명의 친구들이 찾아간 것입니다. 
에콰도르라는 나라에는 아쿠아족이라는 잔인하고 독하기로 이름난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해변에 내린 이들이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아쿠아족에게 복음을 전하 
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지 닷새 째 될 즈음, 선교 본부에서는 이들에게서 소식이 없자 혹시 

하는 생각에 비행기를 보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 해변에서 다섯 명의 청년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해변가에 그들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뽑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라이프 지와 타임 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그 기사의 타이틀은 "What a Waste!"(이것이 무슨 낭비인가!)였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멀리 남미에까지 가서 제대로 일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엘리엇의 아내가 그가 시카고에 있는 위튼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시절부터 썼던 글과 일기들을 모아서 출간했습니다. 

그 속에는 깜짝 놀랄만한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들을 쓸 당시 엘리엇은 겨우 19살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께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짐 엘리엇은 29세에 죽었고,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일기장의 한 쪽 구석에 이런 글도 적어놓았습니다.
"제게 다시는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것에 바치는 나의 희생을 어리석다고 말하지 말아요." 
사람들은 나이 50이 지나서야 비로소 세상 것들은 움켜쥐면 쥘수록 다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떻게 엘리엇은 20대에 그 이치를 알았을까........
사람들은 짐 엘리엇과 같은 사람들을 미쳤다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적당히 믿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짐 엘리엇은 이미 19살 때 알았습니다. 
이세상은 유한하고, 하늘나라는 영원하기에 영원한 삶을 향한 갈망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2.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삶

세상에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이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하는지 주목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자기가 선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노력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부 십자가의 영광을 훼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삶의 특징이 19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한마디로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는 삶’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배 곧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인 배에 충성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능과 탐욕과 정욕을 좇아 삽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나옵니다.

가인의 이야기도 나오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세상과 세상의 삶입니다.
마음과 관심과 흥미와 생각이 전부 이 땅에 매여 있습니다.

며칠 전 세계적인 신약학자인 ‘크렉 불룸버그’ 미 덴버신학교 교수가 방한했습니다.
이분과의 인터뷰 기사가 국민일보에 나왔습니다.(2012년 6월16일)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현재 미국 기독교의 최대 이슈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미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질주의’이다. 물질적인 부요로부터 영적인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유입되어 잘 살게 된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 안락한 집,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 승차감 좋은 차, 즐거움........
하늘나라가 좋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인데 그래서 온통 물질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미국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어쩌면 이 문제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눅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가 이렇게 넋두리를 합니다.
눅12:19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느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어쩌면 성경은 이렇게 쉽게 현대인의 심성을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이 부자가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눅12: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이 부자의 어리석음의 핵심은 영혼의 문제를 도외시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시간과 돈과 힘을 어디에 쓰는지를 살펴보면 그가 무엇에 충성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간과 돈과 힘을 어디에 쓰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신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 여러분.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사모하고, 자신의 시간과 돈과 힘을 쓰는 삶을 살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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